무력한 신극단이 난립하여 서로의 일을 방해하는 상태도 결코 좋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신극의 직접적인 질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현상이 만들어진 원인은 좀 더 멀리 있으며 몇몇 극단의 대동단결은 꽤나 보강 공사하는 셈은 될지언정 장래에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본다.
따라서 무라야마 토모요시 씨 등이 주장하는 극단의 대동단결안에는 방관적 찬성 밖에 표명할 수 없으나 그 운동의 윤곽적 의의에 관해서는 즉, 신극 관계자의 친목 연락 연구 기관의 설립이란 과제에 관해선 두 손 들고 환영하는 바이다.
나는 지난 20일 해당 운동의 실행 위원에게 간절한 권유를 받아 소위 발기인 중 한 명이 되는 걸 승낙하여 이 회의에 출석했는데 운동의 취지 및 그 준비 경과란 걸 상세히 듣고 위원분들의 열의와 노력에 감복했다. 솔직히 말해 극단의 대동단결이란 목적은 아직 만족스럽다곤 못하나 그건 처음부터 낙관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으로 되려 여기서 운동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걸로 위원들의 포부는 한 층 더 일반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현재 정세에서 단일 극단 결성이란 목표를 위해 신극단 관계자 전체의 희망과 관심을 집중시키는 건 여러 의미로 불가능하며 그 정신마저 이해시키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면 그 단일 극단의 지도 및 관리는 누가 하냐는 점 때문인데 무라야마 씨의 대답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한 극단의 존재는 갖은 '예술적 경향'의 사람을 만족시키느냐 만족시키지 않느냐로 설령 어떤 고찰이 담겨 있다 해도 가까운 장래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실질적 지도권을 쥐고 그 편향은 곧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반발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혹은 가령 그 극단이 일본 신극을 대표하는 훌륭한 극단이 되더라도 그걸 위해선 더더욱 신극 관계자라 칭해지는 대부분을 제쳐두고 가야만 한다. 따라서 그 극단과 개인적 이해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제각기 취향과 재능에 따라 스스로에게 맞는 극단 탄생을 재촉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이 법칙을 거스른 채 모두를 단일 극단의 지지자로 만들려는 계획은 제아무리 이상이라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현재 누군가가 강력하며 색이 없는 단일 극단을 만드는 경우엔 찬성하며 성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또 이 지도 정신이 만에 하나 나 자신의 주장과 동떨어져 있어도 그게 신극의 분야를 당당히 개척하는 한 그 성장에 힘을 더해줄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연극을 위해 연극을 사랑하는'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다.
때문에 나는 일반적인 신극 관계자에게 제안하고 싶다. 무라야마 씨의 계획을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 단일 극단 결성이란 문제를 선결 문제로 삼지 않고, 널리 신극에 관련되는 단체 및 개인을 망라하여 그 연락과 친목을 주로 기능하는 기관, 즉 소위 '일본 신연극 협회'의 건전한 탄생을 기획하는 건 어떠할까.
그리고 그 협회의 부가 사업으로 각 극단의 합병 같은 제안 또는 중개의 역할을 취하는 것도 좋지 싶다.(193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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