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극작') 4월호, 야마베 미치오 씨의 '연극적청춘'이란 평론을 읽고 있자니 내 이름이 인용되어 있었다. 조금 민폐지 싶어서 내 의견을 확실히 해야겠다.
야마베 씨는 내가 작년 6월 '신조'에서 발표한 '희곡 및 희곡 작가에 대해'란 감상에 내가 예상치 못한 '해석'을 제시했으며 그 해석에 기반하여 반쯤 반발적인 비평을 가하였다. 단지 나도 야마베 씨가 내린 결론에 큰 이의가 없기에 이 글은 결코 야마베 씨의 지론을 헐뜯기 위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단 점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야마베 씨가 내 글 안에서 그 정신을 추출하는 법 없이 어떤 부분의 말을 인용하였으며, 또 내가 가장 주의해 사용한 '조건법적' 표현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나는 결코 "젊은 나이에 희곡을 쓰는 건 생각해 볼 일이다"느니 "이십 살 되먹은 청년은 서정시를 방불케하는 게 낫다"느니 말한 기억이 없다. 단지 희곡이 오늘날까지 소설에 비해 생산이 빈약하고 저열한 원인이 청년이 희곡에 몰두하며 '문학'에서 멀어져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 '문학'에게서 멀어지는 경향은 꼭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니, 어지간한 각오가 없으면 '극작의 길에 임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저도 모르게 정작 중요한 창조적 정신의 육성――요컨대 예술 수업의 길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야마베 씨는 내 지론 중 일부를 발췌해 '지극히 당연한 말로 대부분의 작가라면 말로는 안 해도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말로 안 하는 건 별개로 몸으로 느끼는 게 왜 자신이 하는 일에선 드러나지 않는지를 반문하고 싶다.
일본의 사정이 어떨지라도 '젊은 사람이 연극을 하고 연극을 쓰는 일'은 해서 안 되는 일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 연극을 하고 연극을 쓸 때의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193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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