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한 번, 어렵게 말하자면 연극에 관한 시평, 드러내고 말하자면 연극에 관한 잡다한 내용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극단과 가까워진지 굉장히 날이 짧고 이치무라좌가 니쵸마치에 있다는 걸 불과 얼마 전에 알았으며 인기 배우 사와다 쇼지로의 무대도 한두 달 전에 한 번 본 게 전부이며 사단지 씨가 무사시야인지 마츠자카야인지 기억할 기회가 없었던 데다가 미즈타니 야에코 양은 벌써 서른쯤 된 줄 알았던 어리석은 인간이니 재미난 이야기를 모으는 건 저에게 걸맞지 않을 테지요.
그럼에도 '주평'이라 이름을 박은 이상은 무언가 시수 문제에 관한 논의든 의견 같은 걸 써야 하지만 이 또한 신문을 내킬 때만 읽고 극장에 관여하는 사람하곤 거의 면식이 없는 상태이니 중요한 일을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역할을 받아 들였는가――이에는 짧게는 말 못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본래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연극 요컨대 가부키를 시작으로 신파극, 신극……그런 연극을 좀 더 어떻게든 하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물론, 남의 힘 특히 지지신보의 독자 제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골동취미, 통속취미, 문학청년취미의 연극에서 한 발 앞서 간, 그러면서 무작정 초연히 세간을 소홀히하는 게 아닌, 연극 다운 연극, 몇 번 봐도 질리지 않으면서도 세 시간 쯤 보면 만족할 수 있는 말하자면 '예술적 연극'을 만들고 싶습니다.
조금 말이 지나쳤군요. 실은 그런 연극이 있으면 좋겠다, 어디서 나타나면 좋겠다 하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연극 주평'은 제 희망이나 신념을 독자 제군께 전하는 하나의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될 무원가를 위해 성원자의 역할을 다 하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매 순간의 문제를 포착하여 무언가 말해 볼 생각입니다.
이번 주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군요――그래서야 곤란하지만 정말로 없습니다.
단지 신극 협회가 지난 23일부터 3일 동안 제국 호탤서 현대극 세 개를 상연했습니다. 그중 마사무네 하쿠쵸 씨의 작품 '인생의 행복'이 만인의 예상과 달리 놀랄만한 무대 효과를 발휘했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불행히 이를 보지 못했지만 그 각본 속에서 무대적 생명이 발견되었다면 그건 소설가 마사무네 하쿠쵸 씨의 새로운 예술적 세계가 펼쳐진 것이 되니 무대 감독 하타나카 료하 씨의 결정적 공적이라 칭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뿐일까요. 일본의 신극은 '무대'라는 걸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하는 기운에 도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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