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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다자이 오사무

작가상 - 다자이 오사무

by noh0058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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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열 장짜리 수필 따위 못 쓸 것도 없으나 이 작가는 벌써 사흘이나 생각에 잠겨 썼다가는 금세 찢어버리고 또 썼다가는 금세 찢고 있다. 일본은 지금 종이가 부족한 시기기도 하여 이렇게 찢어서는 아까운 일이다. 스스로도 조마조마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만 찢어버리고 만다.
 말할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이 작가는 하고 싶은 말과 해서 안 되는 말의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도덕 적성"라 해야 마땅한 게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이다.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있다. 정말로 하고 싶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자기변호잖아."
 아니다! 자기변호가 아니라 서둘러 부정해도 마음 한구석에선 뭐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약하게 긍정해버려서 나는 쓰다 만 원고용지를 둘로 찢고 또 넷으로 찢었다.
 "나는 이런 수필은 잘 못 쓰는 걸지 모른다."하고 시작하여 잠시 쓰다 찢는다. "내게는 아직 수필을 못 쓰는 걸지 모른다"하고 쓰다 또 찢는다. "수필에는 허구가 용납되지 않아"하고 쓰다 황급히 찢는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 분명히 존재하는데 쉽게 써지지 않는다.
 목표로 삼은 상대에게만  정확히 명중하고 다른 좋은 사람에겐 먼지 하나 뿌리고 싶지 않다. 나는 서툴러서 무언가 적극적인 언동을 취하면 반드시 괜한 사람을 다치게 한다. 친구 사이서 내 이름은 "곰손"으로 통한다. 부드럽게 쓰다듬으려는 게 찢어 발기는 게 된다. 츠카모토 토라지 씨의 "우치무라 칸조의 추억"을 읽었더니 그 안에
 "어느 여름, 신슈 쿠츠카케의 온천서 선생님이 장난스레 우리 아이에게 물을 뿌리니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슬픈 얼굴로 '내가 하는 일은 다 이래. 친절함을 원수로 받아들이지'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문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읽고 잠시 견딜 수 없었다. 강 건너편에 돌을 던지려 크게 모션을 취하니 바로 옆에 선 좋은 사람에게 팔꿈치가 꽂혀 좋은 사람이 아고고 비명을 지른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리 항변해보지만 좋은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 팔은 남보다 두 배는 되는 걸지 모른다.
 수필은 소설과 달리 작가의 말도 '날것'이니 어지간히 조심스레 쓰지 않으면 괜한 이웃마저 다치게 한다. 결코 그 사람을 골라 하는 말이 아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인간 역사의 실상'을 하늘에게 보고하는 셈이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웃기만 할 뿐으로 나를 믿지 않는다.
 나는 어지간히 무른 남자인 게 아닐까 싶다. 소위 "단념남아"이다. 언동을 하기 전에 먼저 단념부터 앞선다. 밤에 술을 마실 때도 무언가의 이유를 붙여가며 마신다. 나는 어제도 아사가야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그에는 이러한 경위가 존재한다.
 나는 이 신문(도 신문)에 보낼 수필을 쓰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도무지 할 수 없었다. 이게 수필이 아니라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활달히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에 한 달 전부터 생각해둔 단편소설을 곱씹으니 재밌어져서 쓴다면 소설로, 지금 이 우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전까지는 소중히 담아두고 싶었다. 그런 내용을 지금 수필로 써서 발표하더라도 말이 부족하여 남한테 오해받고 괜히 발을 붙들려 싸우게 되어서야 재미 없으리라. 나는 자중하고 싶었다. 여기선 어떻게든 바보 같은 색을 꾸며
 "오늘은 날이 맑다.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붉은 매화가 벌서 폈다. 하늘과 땅에 정이 있다. 봄이 다시 왔다."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어야 한다. 그런 생각은 했으나 나는 굉장히 서툴러서 감정을 숨기는 게 쉽지 않았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만 히죽히죽 웃고 만다. 별 볼 일 없는 실패를 하면 도무지 얼굴이 어두워지고 만다. 시치미 떼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적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는 일류의 길을 걸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매일 필요 없는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 생각할 때가 있다. 홀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다.
 조금도 알려지지 않으나 나로선 상당히 거드름 피우며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조심스레 언동하고 있다. 큰일을 앞에 둘 땐 작은 일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괜한 일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 불쾌한 일이 있어도 배를 문지르며 웃어야만 한다. 곧 걸작을 쓸 남자지 않은가. 그런 그럴싸한 말투로 얼빠진 감개를 늘어 놓고 있다.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싶다.
 이따금 신문사에게 수필 투고를 부탁받아 용맹히 분투하며 임하는데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며 고작해야 열 장 전후의 원고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생각에 잠겨 있다. 역시 대단하다. 독자가 무릎을 탁 칠만큼 빛나는 수필을 쓰고 싶은 듯하다. 너무 생각에 잠긴 탓에 그러는 사이에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수필이 어떤 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책상자를 뒤져 두 권의 책을 꺼냈다. '마쿠라노소시', '이세 모노가타리' 두 권이다. 이걸 통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수필 전통을 살펴보려 한 것이다. 참으로 우둔한 남자이다."
 여기까지는 일단 큰 문제가 없었는데 "하지만"하고 이어 한 장 가량 쓰니 이건 아니다 싶어 황급히 찢었다. 곧 그럴싸한 말을 하려던 참이다.
 하나 쓰고 싶은 단편소설이 있다. 그 녀석을 다 쓸 때까지는 나에 대해 어떤 인상도 주고 싶지 않다. 이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또 사치스러운 취미기도 하다. 그런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전까진 숨겨두고 싶다. 시치미 떼고 싶다. 그게 나 같은 단순한 남자에겐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제도 고민했다. 무언가 어려움 없는 수필 소재가 없는 걸까. 죽은 친구를 다뤄볼까. 여행 이야기를 쓸까. 일기를 쓸까. 나는 이제까지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쓰는 게 어려웠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어떻게 간략화해야 하는가. 무엇을 적어야 하는가. 취사선택의 경게를 알 수 없었다. 기세로 모든 걸 적게 되면 하루가 꼬박 걸려 기진맥진해진다. 정확히 쓰고 싶으니 가능하면 자기 직전까지 일을 남김 없이 쓰고 싶으니 정말로 성가신 일이 된다. 게다가 일기란 건 미리 남이 볼 걸 생각하고 써야 하는가, 신과 자신의 둘뿐인 세계서 써야 하는가. 그런 마음가짐도 어려웠다. 결국 일기장은 사더라도 만화를 그리거나 친구 주소 등을 적을지언정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은 적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인은 자그마한 수첩에 일기를 쓰는 듯하니 이를 빌려 내가 주석을 달아보자 결심하였다.
 "당신 일기 쓴다면서 좀 빌려줘 봐"하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는데 하인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받아 들이지 않았다.
 "안 빌려줘도 되는데 그래서야 나는 술을 마셔야 해." 굉장히 황당한 결론인 듯한데 그렇지 않다. 달리 이 수필서 도망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이유가 있다. 나는 이유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정해두었다. 어제는 그러한 이유가 있어 아사가야서 그럴사한 얼굴로 술을 마시러 나간 셈이다. 아사가야의 술집서 나는 굉장히 주의깊게 술을 마셨다. 나는 지금 중요한 일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실수할 수는 없다. 늙은 대가처럼 침착한 체 조용히 술을 마신 것이었는데 취기가 오르니 다 허탕이 되어버렸다.
 불량배로 보이는 두 손님을 상대로 "사랑이란 뭐지. 아나? 사랑이란 의무의 수행이야. 슬픈 일이지. 또 사랑이란 도덕의 고수야. 또 말해볼까? 사랑은 육체의 포옹이지. 하나 같이 들어둬야 할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정확할지 몰라. 하지만 하나 더, 하나 더 있어. 잘 들어 사랑이란――나도 몰라. 그 녀석이 알았다면"하고 대단할 것도 없는 헛소리만 늘어 놓고 끝내 한껏 취해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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