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오리츠와 자식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1. 23.
728x90
반응형
SMALL

        하나

 비 내리는 오후, 올해 중학교를 졸업한 요이치는 이 층 책상서 등을 둥글게 만 채로 키타하라 하쿠슈풍의 우타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야"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불쑥 그의 귀를 놀라게 했다. 그는 황급히 돌아보는 와중에도 마침 옆에 놓인 사전 아래에 우타를 숨기는 걸 잊지 않았다. 다행히도 아버지 켄조는 여름 외투를 두른 채로 어두컴컴한 사다리 위에서 가슴까지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 엄마 상태가 영 안 좋으니까 형한테 전보 좀 보내봐라."
 "그렇게 안 좋으셔?"
 요이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 평소에 건강하니 갑자기 어떻게 되진 않겠지――그래도 형한텐 알리는 게――"
 요이치는 아버지의 말을 뺏었다.
 "토자와 씨는 뭐라시는데?"
 "역시 십이지장에 궤양이 생긴 모양이야――걱정할 건 없다는데."
 켄조는 묘하게 요이치와 시선을 맞추는 걸 피하는 듯했다.
 "일단 내일 타니무라 박사 보고 와달라고 해놨다. 토자와 씨께도 그렇게 말해뒀으니까――아무튼 신타로한테 연락 좀 해줘. 숙소는 너도 알지?"
 "그럼 알지――아버지는 어디 가는데."
 "잠깐 은행 좀 다녀오마――아, 밑에 아사카와 숙모 오셨어."
 켄조가 모습을 감추자 요이치는 빗소리가 한층 거세진 것처럼 느껴졌다. 꾸물거릴 때가 아니다――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는 곧장 자리서 일어나 놋쇠 손잡이를 잡으며 조심조심 사다리를 내려갔다.
 사다리를 내려오니 좌우 선반 위에 메리야스볼 상자를 쭉 줄지은 넓은 가게가 나왔다 ――가게에 드는 빗물 섞인 빛 속에서 파나마 모자를 쓴 켄조가 등을 돌린 채로 현관에 한 쪽 발을 뻗고 있었다.
 "사장님, 공장서 전화 왔네요. 오늘 오시냐고 묻던데………"
 요이치가 가게서 내려오니 전화를 받은 점원이 켄조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 외에도 네다섯 명의 점원이 있는데 하나 같이 금고 앞이나 카미다나 아래서 주인을 배웅하기는 고사하고 주인이 나가는 걸 기다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안 가. 내일 간다고 해줘."
 전화가 끊기는 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켄조는 큰 우산을 펼치고는 곧장 거리로 향했다. 그런 모습이 얕게 진흙을 바른 아스팔트 위로 자그마한 그림자를 떨구는 게 잠시 동안 보였다.
 "카미야마 씨는 안 계셔요?"
 요이치는 카운터에 앉으며 한 점원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안쪽에서 심부름하던데요――료 씨, 어디 갔는지 알아?"
 "카미야마 씨요? I don't know네요."
 그렇게 대답한 점원은 아가리카마치에 앉은 채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 동안 요이치는 옆에 놓인 전보 용지에 만년필을 옮기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지방 고등학교에 입학한 형――요이치보다 색이 검고 요이치보다 살이 오른 형의 얼굴이 머리 한 구석에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다. "어머니 안 좋음, 곧장 돌아올것"――그는 당초 그렇게 썼으나 곧장 종이를 찢고 "어머니 병걸림, 곧장 돌아올것"이라 적었다. 그럼에도 "안 좋음"이라 적은 게 어쩐지 불길한 전조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에 들러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누가 이것 좀 보내고 와주실래요?"
 다 쓴 전보를 점원 중 한 명에게 보낸 후, 요이치는 찢은 종이를 씹으며 가게 뒤에 자리한 주방을 빠져 나와 맑은 날에도 어두운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긴 화로 위 기둥에 어떤 직물 가게 광고를 겸한 커다란 일력이 걸려 있다――머리를 자른 아사카와 숙모는 그 아래서 면봉을 써가며 잊힌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다 요이치의 발소리를 듣고는 역시나 면봉을 얹은 채로 시종 빛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왔니? 아버지는 벌써 나가셨어?"
 "네, 막 나가셨어요――어머니 때문에 골치 아프네요."
 "누가 아니래니. 설마 이름이 있는 병일 줄은 몰랐는데."
 요이치는 화로 앞에 진정될 줄 모르는 무릎을 앉혔다. 후스마 하나 너머에는 큰병을 앓는 어머니가 누워 있다――그런 생각은 이 옛된 노인을 상대하는 걸 평소보다 더 성가시게 만들었다. 숙모는 한동안 말을 않았으나 이윽고 이마로 그를 바라보며
 "오키누가 지금 오고 있다네"하고 말했다.
 "누나도 아프다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좀 낫다네. 뭐, 늘 그렇듯 코감기였을 거야."
 아사카와 숙모의 말에는 가벼운 경멸 속에 반대되는 친근함이 묻어 있었다. 숙모는 세 형제 중에서도 오리츠의 배 밖에서 나온 오키누가 가장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켄조의 전처가 숙모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요이치는 누군가에게 들은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며 재작년 마지못해 어떤 옷 가게로 시집 간 몸이 허약한 누나 이야기를 했다.
 "신은 어쩐다니? 너희 아버지가 알리는 게 좋겠다며 나가던데."
 그런 이야기가 일단락되니 숙모는 귀 파던 손을 멈추고는 떠올랐다는 양 물었다.
 "방금 전보 보냈어요. 오늘 중엔 도착하겠죠."
 "그렇지. 교토나 오사카도 아니고――"
 지리에 박식하지 않은 숙모의 대답은 애가 탈 정도로 애매했다. 또 그게 어째서인지 요이치 안에 잠들어 있던 불안을 불쑥 깨우고는 했다. 형이 돌아올까?――그런 걱정이 떠오른 그는 더 거창한 전보를 적을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어머니는 형을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형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죽어버린다. 그럼 누나와 아사카와 숙모가 형을 불효자라 꾸지라겠지――잠시 그런 광경이 눈앞에 또렷이 떠오른 것만 같았다.
 "오늘 도착하면 내일 중엔 올 거고요."
 요이치는 어느 틈엔가 숙모보다도 자신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말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점원 카미야마가 이마서 땀을 빛내며 발소리를 죽인 채 들어왔다. 어디 다녀왔단 건 소매에 빗자국이 남은 줄무늬 하오리만 봐도 명백했다.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기다려야 했네요."
 카미야마는 아사카와 숙모에게 인사를 하고는 품에 넣어 온 봉투를 꺼냈다.
 "환자분은 걱정 안 해도 된다네요. 자세한 건 그 안에 적혀 있다는데――"
 숙모는 봉투를 열기 전에 도수가 높은 안경을 썼다. 봉투 안에는 편지 이외에도 반지에 한 일자를 그은 게 네 번 접힌 채 들어 있었다.
 "카미야마 씨, 이 타이쿄쿠도太極堂, 태극당이란 곳은 어디에요?"
 요이치는 신기하다는 듯이 숙모가 읽고 있는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니쵸메 구석에 양식당이 하나 있죠? 그 골목으로 들어가 왼쪽에 있어요."
 "그럼 카미야마 씨의 키요모토부시 스승님의 이웃이네요?"
 "뭐 그런 셈이죠."
 카미야마는 히죽히죽 웃으며 시계 끈을 걸어둔 마노 도장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곳에 점쟁이가 있었던가――환자는 남쪽으로 눕혀야 하나."
 "어머니는 어느 쪽으로 누워 계셔요?"
 숙보마는 반쯤 나무라듯이 돋보기 안경 너머의 눈으로 요이치를 보았다.
 "동쪽이지. 이 방향이 남쪽이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진 요이치는 얼굴은 숙모 쪽에 가까이 한 채로 손은 소매 안쪽에 있는 담배곽을 찾고 있었다.
 "거기에 동쪽도 괜찮다 적혀 있네요――카미야마 씨, 한 대 피실래요? 실례인 건 알지만 던질게요."

 "아이고 고마워라. E・C・C로군요. 그럼 한 대받겠습니다―― 달리 시키실 건 없고요? 또 있으시면 사양 말고 말해주세요――"
 카미야마는 담배를 귀에 꽂으며 황급히 여름 하오리 자락을 나부끼며 가게 쪽으로 물러났다. 그 순간 장자가 열리더니 목에 파스를 두른 누나 오키누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어머, 왔구나."
 "비도 오는데 잘도――"
 그런 말이 거의 동시에 숙모와 카미야마의 입에서 나왔다. 오키누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면서 곧장 코트를 벗더니 실망한 것처럼 다리를 옆으로 밀며 앉았다. 그동안 카미야마는 오쿠니의 손에서 받은 과일 바구니를 살짝 내려놓고는 바쁘다는 양 거실을 나섰다. 과일 바구니에는 맨질맨질한 청사과나 바나나가 깔끔하게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어떠셔?――미안하네. 전차가 워낙 붐벼야지."
 오키누는 역시나 옆으로 앉은 채로 진흙 투성이 양말을 벗었다. 요이치는 그 양말을 보자 마루마게로 묶은 누나의 몸 주변에 아직 길거리의 빗방울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역시 배가 아프다나 봐――열도 39도나 되고."
 숙모는 점쟁이의 편지를 펼치고 카미야마와 엇갈려 들어온 여종 미츠와 차를 준비하는 등 여념이 없었다.
 "어머, 전화로는 어제보다 많이 나아졌다 들었는데? 내가 받은 게 아니긴 한데――오늘 전화한 건 누구야?――요?"
 "나 아냐. 카미야마 씨 아냐?"
 "맞아요."
 이는 미츠가 차를 권하며 슬쩍 얹고 간 말이었다.
 "카미야마 씨?"
 오키누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화로 옆으로 다가갔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너희 가족은 잘 지내니?"
 "네, 덕분에요――숙모도 별 일 없으시죠?"
 담배를 문 채로 그런 대화를 듣는 요이치는 멍하니 일력을 바라보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론 며칠이란 기억은 있어도 무슨 요일인지는 항상 잊고 있다――그 사실이 그의 마음에 문득 쓸쓸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데다가 한 달 뒤면 거의 붙을 생각이 없는 입학시험이 다가온다. 입학시험서 낙제하면………
 "미츠가 많이 여성스러워졌네?"
 요이치는 문득 누나의 말이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울 뿐이었다. 물론 미츠는 이미 부엌으로 물러난지 오래였다.
 "게다가 저 애는 남자가 좋아할 법한 얼굴이잖아――"
 숙모는 무릎 위 편지나 돋보기안경을 정리하며 얕잡아 모듯 웃었다. 그러자 오키누도 묘한 눈초리를 지었으나 곧 얼굴색을 바꾸어
 "숙모, 그건 뭐예요?"하고 물었다.
 "카미야마 씨가 막 점을 보고 왔단다――요는 잠깐 엄마 좀 보고 올래? 아까까진 잘 쉬고 있었는데――"
 지독히 불쾌해졌던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꽂고는 숙모나 누나의 시선서 도망치듯이 화로 앞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스마 하나를 둔 방에 일부러 가벼운 기색으로 들어갔다. 
 방은 벽의 유리 창문 너머로 좁은 정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원에는 동청목 나무 한 그루가 수수발 옆에 자리해 있을 뿐이었다. 마이불을 덮은 오리츠는 얼음주머니를 머리에 얹은 채로 몸을 돌려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머리맡에는 간호사 하나가 무릎 위에 펼친 병상일지에 근시인 얼굴을 파묻듯이 하여 만년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간호사는 요이치의 모습을 보고는 살짝 애교 섞인 목례를 했다. 요이치는 그 간호사에게서도 이성을 느끼며 묘하게 무뚝뚝한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이불자락을 돌아 어머니 얼굴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앉았다.
 오리츠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른 얼굴이 오늘은 한 층 더 야위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요가 얼굴을 향해 열을 머금은 시선을 보내져 평소처럼 희미하게 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요이치는 어쩐지 한사코 거실서 이야기하던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오리츠는 한동안 말을 않다가
 "요, 있잖아"하고 자못 거창하게 운을 떼었다.
 요이치는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그 동안에도 어머니의 뜨거운 열이 느껴지는 게 불쾌했다. 하지만 오리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어가지 않았다. 요이치는 슬슬 불안해졌다. 유언――그런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아사카와 숙모 아직 계셔?"
 어머니는 겨우 입을 열었다.
 "숙모도 계시고――막 누나도 왔어."
 "숙모한테――"
 "숙모한테 할 말 있어?"
 "아니, 숙모한테 우메가와의 장어를 잡아줘."
 이번에는 요이치가 웃었다.
 "미츠한테 그렇게 말해야 해. 알았지?――그게 다야."
 오리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 위치를 바꾸려 했다. 그 박자에 얼음주머니가 미끄러 떨어졌다. 요이치는 간호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눈시울 뒤쪽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울면 안 돼"――그는 곧장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코 위쪽에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바보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지쳤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얼굴을 붉힌 요이치는 간호사의 눈을 부끄러워하며 맥없이 거실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아사가와의 숙모가 어깨 너머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엄마는 좀 어떠셔?"하고 물었다.
 "눈 뜨고 계셔요."
 "눈이야 뜨고 있겠지."
 숙모는 화로 너머로 오키누와 얼굴을 마주했다. 누나는 올려다 보며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었는데 이윽고 화로에 손을 얹고는
 "카미야마 씨가 돌아온 건 말했어?"하고 물었다.
 "안 했어. 누나가 가서 말해."
 요이치는 후스마 옆에 서서 느슨해진 오비를 다시 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를 죽게 둬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그렇게 다짐하면서…………

        둘

 다음날 아침 요이치는 아버지와 거실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머무른 숙소의 그릇도 덮혀 있었다. 하지만 숙모는 간호사가 긴 준비를 하는 사이에 어머니 옆에 대신 가있는 듯했다.
 부자는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이따금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요 일주일 내내 둘만의 쓸쓸한 식사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두 사람 모두 평소보다 더 입이 무거웠다. 미츠 또한 말없이 그릇만 내놓을 뿐이었다.
 "신타로 녀석, 오늘은 오려나."
 켄조는 대답을 예상한 것처럼 힐끔 요이치를 보았다. 하지만 요이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이 오늘 오는가 안 오는가――그보다는 애초에 오긴 할까. 그는 아직도 형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내일 아침에 오려나?"
 이번에는 요이치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시험 기간 아닐까 싶어서 그게 걸리네."
 "그래?"
 켄조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이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미츠에게 차를 받으며
 "너도 공부 열심히 해야 해. 너희 영은 올해 가을엔 대학생 될 거 아냐"하고 말했다.
 요이치는 밥을 새로 받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라는 문학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공부만 강요하는 요즘의 아버지가 불쑥 원망스러워진 것이다. 하물며 형이 대학생이 되는 것과 동생이 공부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런 아버지의 모순을 비웃는 심리도 없지 않아 있었다.
 "누나는 오늘 안 온다니?"
 켄조는 곧장 분위기를 바꾸어 물었다.
 "올 거래요. 토자와 씨가 오면 전화 한 통만 해달라던데."
 "누나도 고생일 거다. 이번엔 그쪽도 영향 좀 받을 거야."
 "역시 조금은 그렇겠죠."
 요이치도 차를 들기 시작했다. 요 4월 이후로 시장엔 전대미문의 공황이 찾아왔다. 실제로 켄조의 가게 또한 꽤나 손을 넓게 벌린 오사카의 어떤 동업자가 대뜸 파산하여 아직까지도 대금을 받지 못 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타격을 계산하면 적어도 삼만 엔 내외의 손실을 입었을 게 분명하다――요이치는 그런 말을 주워들었다.
 "조금이면 다행이지만――경기가 이래서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이야――"
 켄조는 버거운 이야기를 반쯤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거창하게 식탁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후스마를 열고 옆에 자리한 병실로 향했다.
 "수프도 우유도 먹었어? 오늘은 좀 낫나 보네. 잘 먹을 수 있게 해둬야지."
 "이제 약만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약은 금방 토해버린단 말이죠."
 그런 대화도 귀에 들어왔다. 요이치가 식사 전에 찾아갔을 때엔 어제나 그제보다 열이 많이 내려 있었다. 말하는 것도 괜찮아졌고 몸을 뒤척이는 것도 많이 편해 보였다. "배는 아직 아프지만 컨디션은 많이 좋아졌어"――어머니 본인도 그렇게 말하였다. 그런 데다가 저렇게 먹을 기운도 돌아온 걸 보면 이제까지 걱정한 것보다는 훨씬 쉽게 나을지도 모른다――요이치는 옆방을 들여다보며 그런 기쁨에 휩싸였다. 하지만 너무 형편 좋은 희망을 품으면 그 탓에 되려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는 게 아닐까 하는 미신과 같은 걱정도 조금은 들었다.
 "도련님, 전화 왔어요."
 요이치는 역시나 손을 얹은 채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미츠는 소매를 입에 문 채로 식탁을 행주로 닦고 있었다. 전화를 알린 건 마츠라는 연상 여종이었다. 마츠는 타스키를 걸치고 젖은 손을 내린 채로 항아리가 보이는 부엌 입구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전화인데?"
 "누구일까요――"
 "정말이지, 매번 누구녜."
 요이치는 내키지 않는단 중얼거리며 곧장 거실서 나왔다. 얌전한 미츠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츠의 험담을 들려주는 게 어쩐지 유쾌하게도 느껴졌다.
 가게서 전화를 받아 보니 같이 중학교를 나온 타무라라는 약국집 아들이었다.
 "오늘 같이 메이지자 가지 않을래? 이노우에 나온대. 이노우에라면 갈 거지?"
 "나는 안 돼. 엄마가 아프셔――"
 "그래? 갑자기 미안해지네. 그나저나 아깝게 됐네. 어제 들어보니 호리야는 보러 가는 모양이네――"
 그런 대화를 하고 전화를 끊은 요이치는 곧장 사다리를 올라 2층의 공부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도 수험 준비는 고사하고 소설을 읽을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책상 앞에는 격자 창문이 있다――그 창문 밖을 보니 반대편 장난감 가게 앞에서 반텐기 차림의 남자가 자전거 타이어에 펌프로 공기를 넣는 중이었다. 요이치에겐 그게 어쩐지 조마조마하게만 느껴져 불쾌했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역시 내키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책상 아래의 영일하섲능 베개 삼아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올해 봄 이후로 보지 못한 그와 아버지가 다른 형이 떠올랐다. 그와 아버지가 다른――하지만 요이치는 언제나 자신들을 평범한 형제 사이라 여겼다. 아니, 어머니가 형을 데리고 재혼했다는 것마저 비교적 최근에야 알았다. 단지 아버지가 다르다는 건 그에게 이런 추억을 또렷이 남겨주기도 했다――
 그건 둘이 아직 초등학생일 적의 일이었다. 요이치는 어느 날 신타로와 트럼프의 승패를 두고 다투었다. 그때부터 냉정했던 형은 그가 아무리 화를 내도 거의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그를 경멸하듯 뚫어져라 보면서 혼을 낼뿐이었다. 요이치는 기어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트럼프를 잡아서는 대뜸 형의 얼굴에 뿌렸다. 트럼프는 형의 옆얼굴을 스쳐 주위에 흩뿌러졌다――그러더니 형의 손이 그의 뺨을 찰싹하고 때렸다.
 "까불지 마라."
 그런 형의 목소리 아래서 요이치는 형에게 매달렸다. 형은 그에 비해 몸도 훨씬 컸다. 하지만 그는 형보다 성미가 사나운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짐승처럼 서로 주먹을 주고받았다.
 그 소란을 들은 어머니가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너희 지금 뭐 하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요이치는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형은 고개를 숙인 채로 무뚝뚝하게 자리해 있을뿐이었다.
 "신타로, 너는 형이잖니? 동생하고 똑같이 싸워서 재밌어?"
 어머니한테 혼이 나자 형은 목소리가 살짝 떨렸으나 그럼에도 따지듯이 대답했다.
 "요이치가 잘못한 건데. 아까 내 얼굴에 트럼프 던졌단 말야."
 "거짓말쟁이. 형이 먼저 때렸으면서."
 요이치는 우는 목소리로 열심히 반대했다.
 "형이 속임수 썼단 말야."
 "뭐?"
 형은 또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위협했다.
 "그래서 싸웠다는 거야? 애초에 네가 형이면 좀 봐주면서 해야지."
 어머니는 요이치를 감싸며 형을 밀어 떼어냈다. 그러자 형의 눈 색이 갑자기 꺼림칙할 정도로 험악해졌다.
 "뭔데 진짜."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치광이처럼 어머니를 때리려 했다. 하지만 미처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요이치보다 더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그건 요이치도 기억하지 못 했다. 하지만 형의 억울한 눈초리만은 지금도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다. 형은 단지 어머니한테 혼난 게 분한 거였을지 모른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측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형이 지방으로 내려간 후론 그 눈매를 떠올릴 때마다 형이 보는 어머니가 자신이 보는 어머니와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심지어 또 다른 기억 하나도 그런 생각을 거들고 있다――
 삼 년 전 구 월, 형이 지방 고등학교로 떠나기 전날이었다. 요이치는 형을 장을 보러 긴자까지 나와 있었다.
 "당분간은 저 큰 시계하고도 이별이네."
 형은 오와리쵸의 한구석에 이르자 반쯤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이치고 가지 그랬어."
 "이치고 같은 덴 가고 싶지도 않아."
 "고집부리기는. 시골 가면 불편하기만 하지. 아이스크림이 있기를 해, 활동사진이 있기를 해――"
 요이치는 얼굴에 땀을 머금은 채 여전히 농담처럼 말을 이었다.
 "게다가 누가 병이라도 걸리면 서둘러 못 오잖아――"
 "그야 당연하지."
 "그럼 엄마라도 죽으면 어쩌려고."
 길거리 구석을 걷던 형은 그의 말에 답하기 전에 손을 뻗어 버드나무 잎을 뜯었다.
 "나는 엄마가 죽어도 안 슬퍼."
 "거짓말쟁이."
 요이치는 조금 흥분하여 말했다.
 "슬프지 않으면 이상하지."
 "거짓말 아냐."
 형의 목소리는 의외일 정도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맨날 소설만 붙들고 있으면서 왜 그래? 소설 읽다 보면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거 아냐――웃긴 녀석이네."
 요이치는 내심 움찔했다. 동시에 그 눈초리가――어머니를 때리려 한 형의 눈초리가 또렷이 기억에 떠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가만히 형의 모승을 보려 하자 형은 먼곳을 바라보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걷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형이 금세 올지 걱정이었다. 특히 시험이라도 시작되면 이틀이나 사흘 늦어지는 건 조금도 거리끼지 않을지 모른다. 늦더라도 일단 오면 다행이나――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사다리를 오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요이치는 곧장 벌떡 일어났다.
 사다리 입구에는 눈이 안 좋은 아사카와 숙모가 몸을 앞으로 숙인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라, 낮잠 자니?"
 요이치는 그런 숙모의 말속에서 작은 비꼼을 느끼며 자신의 방석을 빼 앞에 내놓았다. 하지만 숙모는 그에 앉지 않고 책상 옆에 앉아서는 자못 큰 사건이라도 생긴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요한테 좀 상담할 게 있는데."
 요이치는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아니, 너희 엄마 말고. 실은 그 간호사 말야. 좀 거슬려서――"
 숙모는 그로부터 지긋지긋하단 투로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다――어제 토자와 씨가 진찰하러 왔을 때 그 간호사가 의사를 거실로 부르더니 "선생님, 이 환자 얼마나 갈까요? 만약 오래갈 거 같으면 저 좀 쉬고 싶은데요"하고 물었다. 간호사야 물론 아무도 듣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테지. 하지만 아쉽게도 부엌에 있던 마츠가 그걸 듣고 만 것이다. 때문에 화를 펄펄 내며 아사카와 숙모에게 이를 이야기했다. 그뿐 아니라 숙모가 잘 보니 간호사의 행동에 불친절한 구석이 꽤 많았다. 실제로 오늘 아침도 환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 시간이나 화장하지 않았나………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지만 정말 너무하지 않니? 그래서 작은엄마가 생각하기엔 바꾸는 게 좋겠다 싶어서."
 "네, 그게 맞네요.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해서――"
 요이치는 그런 간호사 따위가 어머니의 죽음을 세고 있다 생각하니 화가 나기보다도 되려 우울할 지경이었다.
 "그게 너희 아빠는 막 공장에 간 참이라서 말야.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말 못한 사이에 가버렸네."
 숙모는 살짝 성가시다는 양 좋지 않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나는 기왕 바꾸는 거 빨리하는 게 좋겠지 싶은데――"
 "그럼 카미야마 씨한테 그렇게 말해서 지금 당장 간호사회에 전화를 하죠――아버지껜 돌아오시면 말해드리면 되고요――"
 "그럼 그렇게 할까."
 요이치는 숙모에 앞서 기세 좋게 사다리를 내려갔다.
 "카미야마 씨, 간호사회에 전화 좀 해주세요."
 그의 목소리를 들은 대여섯 명의 점원은 가게 앞에 놓인 상품 안에서 놀란 표정으로 요이치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카미야마는 화려한 앞치마에 털뭉치를 단 채로 곧장 카운터로 뛰어 들었다. 
 "간호사회가 몇 번이었죠?"
 "저는 카미야마 씨가 알 줄 알았는데."
 다리 아래에 선 요이치는 카미야마와 함께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그나 숙모와 달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가게 분위기에 가벼운 반감 같은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셋

 오후가 지나 요이치는 별생각 없이 거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침 돌아온 듯한 여름 하오리 차림의 아버지 켄조가 화로 앞에 앉아 계셨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나 오키누가 화로 끝에 팔꿈치를 얹은 채로 오늘은 파스를 붙이지 않은 깔끔한 마루마게의 뒷덜미를 요이치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아빠라고 그걸 잊었겠냐."
 "그럼 해줘요."
 오키누는 어제보다 한 층 더 혈색이 안 좋은 얼굴을 들어 요이치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또 그를 조금 신경 쓰는 듯한 얕은 웃음을 머금고서 머뭇머뭇 이야기를 이었다.
 "해주지 않으면 나도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그때 산 주식도 지금은 전부 떨어져 버렸고――"
 "그래그래, 알겠다."
 아버지는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치 농담처럼 그런 말을 던졌다. 누나는 작년 결혼할 때에 아버지에게 받기로 한 물건의 일부를 아직도 받지 못해 사실상 표류 중이라 한다――그런 이야기를 아는 요이치는 일부러 화로와 먼곳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방금 전 타무라가 권한 메이지자의 광고 따위를 바라보면서.
 "이래서 아버지가 싫은 거야."
 "누군 너 마음에 드는 줄 아냐. 엄마는 저렇게 드러누웠지 너는 불평불만만 하지――"
 아버지의 말을 들은 요이치는 저도 모르게 후스마 하나 너머의 병실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따라 괴롭게 앓는 오리츠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도 오늘은 힘들어 보이네."
 혼잣말 같은 요이치의 말은 두 부녀의 대화를 잠시 끊어놓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키누는 곧장 자세를 고치고는 켄조의 얼굴을 힐끔 노려보면서
 "어머니 병은 안 그래요? 내가 저번에 말했을 때 의사만 바꿨어도 이렇게는 안 됐을걸. 아버지가 똑 부러지지 못하니까――" 감상적으로 아버지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 타니무라 박사를 모셔온다고 했잖아?"
 켄조는 기어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던지듯 말했다. 요이치도 누나의 완고함이 조금 꼴불견처럼 느껴졌다.
 "타니무라 씨 언제 오시는데요."
 "세 시쯤 오신대. 아까 공장서도 전화를 해뒀는데――"
 "세 시는 진작 지났는데――네 시 오 분 전이야."
 요이치는 무릎을 안은 채로 일력 위에 걸려 있는 커다란 벽시계를 보았다.
 "한 번 더 전화해봐요?"
 "아까도 숙모가 해본다고 했는데."
 "아까라뇨?"
 "토자와 씨가 와서 바로."
 둘이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 오키누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불쑥 화로 앞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누나한테서 벗어나네."
 켄조는 쓴웃음 지으며 그제야 허리춤의 담배곽을 꺼냈다. 하지만 요이치는 다시 한 번 시계만 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실서는 여전히 오리츠가 앓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어쩐지 아까보다 점점 높아져만 가는 듯했다. 타니무라 박사는 왜 안 오는 걸까? 물론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환자가 어머니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바쁘게 회진 같은 걸 돌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이미 네 시나 되었으니 아무리 늦더라도 병원에서는 나왔을 터이다. 어쩌면 지금도 가게에――
 "좀 어때요?"
 요이치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음엄한 상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어느 틈엔가 살짝 열린 후스마 틈으로 걱정을 품은 아사카와 숙모의 얼굴이 빼꼼 드러나 있었다.
 "어지간히 힘든가 봐요――의사는 아직 안 왔어요?"
 켄조는 입을 열기 전에 갑갑하다는 양 연기를 내뿜었다.
 "곤란하네――다시 한 번 전화해볼까요?"
 "그러네요. 잠깐이라도 막아줄 수 있으면 토자와 씨라도 괜찮은데."
 "제가 해볼게요."
 요이치는 곧장 일어났다.
 "그래? 그럼 선생님께서 출발하셨냐고 물어보렴. 번호는 코이시가와 XXX――"
 켄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이치는 이미 거실서 나와 부엌까지 나와 있었다. 부엌에선 다스키를 걸친 마츠가 카츠오부시 포를 뜨고 있었다――그 옆을 난폭하게 지나며 가게로 훌쩍 들어가니 가게서도 미츠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제대로 부딪힐 뻔한 걸 양쪽 모두 간신히 몸을 돌리는 걸로 피했다.
 "죄송해요."
 이제 맊은 머리서 향을 풍기는 미츠는 겸연쩍은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허둥지둥 거실로 달려갔다.
 요이치는 묘하게 부끄러워하며 수화기를 귀에 얹었다. 그러자 교환수가 미처 전화를 받기도 전에 카운터에 있던 카미야마가 뒤에서 그에게 물었다.
 "요이치 씨, 타니무라 병원에 거세요?"
 "네, 타니무라 병원이요."
 그는 수화기를 들고서 카미야마 쪽을 보았다. 카미야마는 그에겐 눈초리 한 번 부지 않고 금격자로 둘러싸인 책장에 커다란 장부를 돌려놓고 있었다.
 "막 그쪽에서 전화 왔어요. 오미츠 씨가 안쪽에 전하러 갔고요."
 "뭐라고 하던가요?"
 "선생님께서 막 출발했다고 하던가――막이랬지? 료 씨."
 불린 점원은 마침 받침대 위에 올라 높은 선반에 쌓인 상품 상자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막은 아니에요. 이미 도착했을 시간이라던데요."
 "그래? 미츠 녀석, 그렇게 말하지."
 요이치는 전화를 끊고 다시 거실로 가려 했다. 하지만 문득 가게 시계를 보더니 의아해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라, 이 시계론 네 시 이십 분이네."
 "아뇨, 그 시계 십 분 정도 빨라요. 아직 네 시 십 분 정도겠죠."
 카미야마는 몸을 비틀며 오비의 금시계를 보았다.
 "그러네요. 십 분 됐네."
 "그럼 역시 안쪽 시계가 느린 거네. 그렇다 쳐도 타니무라 씨 너무 늦는데――"
 요이치는 조금 주저한 후 큰걸음으로 가게 앞으로 나갔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조용한 거리를 둘러본다.
 "올 기미가 없네. 설마 집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카미야마 씨, 저 잠시 이 주위 좀 둘러보고 올게요."
 그는 어깨 너머로 카미야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점원 중 누군가가 벗어 놓은 이타조리 위에 뛰어 올랐다. 그리고 거의 달리다시피 시가 자동차나 전철이 다니는 대로 쪽으로 걸어갔다.
 대로는 그의 가게에서 채 오십 미터도 되지 않았다. 모퉁이에 자리한 건물은 반은 작은 우체국이고 반은 양품점이었다――그 양품점 쇼윈도에는 밀짚모자나 등나무 지팡이가 기발한 조합을 보이는 사이로 화려한 수영복이 인간처럼 세워져 있었다.
 요이치는 양품점 앞에 이르러 쇼윈도를 뒤로한 채 거리를 지나는 사람이나 차에게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동안 그러고 있어도 상점으로 가득 찬 이 골목에는 인력거 한 대 이르지 않았다. 이따금 자동차가 왔나 싶으면 빈차 푯말을 세운 진흙투성이 택시였다.
 그러는 사이 그의 가게서 이제 열넷인가 열다섯 먹은 점원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점원은 요이치를 보고는 전신주에 한 손을 얹으며 솜씨 좋게 그의 옆에 자전거를 멈추었다. 그리고 페달에 발을 걸친 채로
 "방금 타무라 씨의 전화가 왔어요"하고 말했다.
 "무슨 일 있대?"
 요이치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끝없이 북적이는 대로에 시선을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딱히 무슨 일은 아닌 듯한데――"
 "그거 말하러 온 거야?"
 "아뇨, 공장 가는 길이에요――아, 그리고 나리가 요이치 씨 찾던데요."
 "아빠가?"
 요이치는 그렇게 물었으나 점원은 마치 요이치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쇼윈도 앞에서 뛰쳐나간 지 오래였다. 행인도 찾기 어려워진 거리서는 마침 인력거 한 대가 큰길을 지나 이쪽으로 꺾으려 했다――그 손잡이가 앞을 지나자마자 그는 마치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듯한 기세로 차위의 청년을 불렀다.
 "형!"
 인력거꾼은 몸을 뒤로 빼면서 어렵게 차를 멈추었다. 차 위에선 신타로가 고등학교의 여름 교복에 하얀 줄무늬 교복 모자를 쓴 채로 옆구리에 낀 두툼한 트렁크를 두 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요이치구나."
 형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요이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어떠셔?"
 요이치는 형을 올려다보면서 온몸의 피가 두 뺨에 올라오는 걸 생생히 느꼈다.
 "요 이삼일 동안 안 좋으셨어――십이지장 궤양이라나."
 "그래? 그거――"
 신타로는 역시나 차갑게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은 눈동자 속에선 요이치가 예상치 못한,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요이치는 형의 표정서 유쾌한 당혹감을 느끼며 띄엄띄엄, 그러나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많이 힘들어 하셨는데――그래도 형이 와줘서 마음이 놓이네――어쨌든 어서 가자."
 인력거꾼은 신타로의 신호에 맞춰 다시 기세 좋게 달리기 시작했다. 신타로는 그때, 오늘 아침 상행 삼등객차에 올라 탄 자신이 머리 어딘가에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건 옆에 걸터 앉은 혈색 좋은 시골 소녀의 어깨를 어깨로 느끼며 어머니가 죽는 걸 보느니 되려 죽은 후에 가는 편이 덜 슬플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있는 그였다. 심지어 그 사이에도 눈만은 레크람 문고판 괴테의 시집에 멍하니 떨어져 있는 그였다……
 "형, 시험은 시작 안 했어?"
 신타로는 몸을 비스듬하게 틀어 목소리 방향을 향해 놀란 시선을 보냈다. 시선 끝에선 요이치가 조리로 땅을 걷어차며 인력거와 아슬아슬하게 달리고 있었다.
 "내일부터야. 너는――너는 거기서 뭐 했냐."
 "오늘 타니무라 박사가 오기로 했거든. 오는 게 너무 늦어서 기다리던 건데――"
 요이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작게 숨을 헐떡였다. 신타로는 동생을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입밖으로 나오니 어느 틈엔가 평범한 말로 바뀌어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어?"
 "십 분 기다렸나?"
 "가게에 사람은 없었고?――아, 저기에요."
 인력거꾼은 대여섯 걸음을 지나쳤다 크게 돌아 봉을 가게 앞에 내려놓았다. 신타로도 그리울 수밖에 없는 두터운 유리문을 세운 가게 앞에.

        넷

 한 시간 후, 가게 2층에는 타니무라 박사를 중심으로 켄조, 신타로, 오키누의 남편 셋이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모여 있었다. 오리츠의 진찰이 끝나고 그 결과를 듣기 위해 박사를 이 2층으로 불렀다. 체격이 좋은 타니무라 박사는 권유 받은 차를 홀짝인 후 한동안 조끼의 금사슬을 두터운 손가락으로 잘그락거렸으나 이윽고 전등 빛을 받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토자와 씨라는――자주 오신다는 의사분은 부르셨지요?"
 "막 전화 했어요――곧장 온다 했습니다."
 켄조는 확인하 듯이 신타로를 보았다. 신타로는 아직도 교복을 입은 채로 박사와 마주 앉은 아버지 옆에 갑갑하다는 양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네, 금방 오신대요."
 "그럼 그분이 오면 이야기하지요――영 날씨가 곱지 않군요."
 타니무라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가죽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올해는 장마가 긴 거 같습니다."
 "구름의 향방이 안 좋아서 곤란하네요. 날씨도 경제도 이래서야――"
 오키누의 남편 또한 옆에서 거리낌 없이 끼어들었다. 마침 병문안 온 이 젊은 옷가게 주인은 짧은 콧수염에 테가 없는 안경이라는 되려 변호사나 회사원이 어울릴 법한 복장의 소유주였다. 신타로는 그들의 이런 대화에 묘한 낯간지러움을 느끼며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토자와란 의사가 그들 사이에 섞인 건 그로부터 머지않은 시간의 일이었다. 검은 명주 하오리를 걸친 조금 술냄새도 느껴지는 그는 타니무라 박사와 은근한 첫인사를 나누며 비스듬하게 앉은 켄조에게
 "결과는 다 들으셨나요?""하고 도호쿠 발음이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선생님께서 오시면 이야기하려 했는데――"
 타니무라 박사는 손가락 사이에 짧은 담배를 둔 채로 켄조 대신에 대답했다.
 "선생님 이야기도 들어야 하니까요――"
 토자와는 박사가 묻는 대로 리츠가 요 일주일 동안 어떤 상태였는지 꽤나 자세히 설명했다. 신타로는 토자와의 처방을 들었을 때, 젊은 박사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인 게 마음에 걸렸다.
 이야기가 끝나자 타니무라 박사는 거창하게 두세 번 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십이지장 궤양 맞군요. 하지만 지금 들은 바로는 복막염이 생긴 듯합니다. 아랫배서 밀어 올리 듯이 아프다고 하니까――"
 "하하, 아랫배서 밀어 올리 듯이 아파요?"
 토자와는 하카마 위에서 위세 좋게 팔꿈치를 펼치며 작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동안 모두가 숨을 삼킨 것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열은 어제보다 많이 낮은 거 같은데――"
 그러는 사이 켄조가 겨우 힘 없는 반문을 했다. 하지만 박사는 담배를 버리고는 적당히 그 말을 잘랐다.
 "그게 문제에요. 열은 점점 떨어지는데 맥박은 되려 더 뛰고 있죠――그게 이 병의 특징이에요."
 "그런가요? 저희 같은 젊은 사람도 알아둬야겠는걸요."
 오키누의 남편은 팔짱을 낀 손으로 이따금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신타로는 매형의 말속에서 타인만 같은 무관심의 차가움을 느꼈다.
 "하지만 제가 진찰했을 때엔 복막염의 징후는 보이지 않은 듯했는데요――"
 토자와가 그렇게 물으니 타니무라 박사는 직업적으로 붙임성 좋게 대답했다.
 "맞아요. 아마 선생님께서 보신 뒤에 발병했으리라 봅니다. 아직 병상이 그리 진행되지 않은 듯하니――어찌 되었든 지금은 복막염이 분명합니다."
 "그럼 당장 입원이라도 해야 할까요?"
 신타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처음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박사는 그게 의외였는지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힐끔 신타로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은 움직일 상황이 아니에요. 일단은 되는 대로 배를 따듯하게 할 수밖에 없네요. 그래도 아픔이 강해지면 토자와 씨께 부탁해 주사를 놓고――오늘 밤에는 꽤나 고통스러울 듯합니다. 세상에 쉬운 병이란 건 없지만 이 병은 특히 괴로워요."
 타니무라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을 본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것처럼 조끼 시계를 꺼내 보이더니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하고 곧장 정장 차림의 허리를 폈다.
 신타로는 아버지나 매형과 함께 내진와 고맙다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자신의 얼굴에 실망의 색이 고스란히 드러난 걸 의식하고 있었다.
 "박사님, 또 이삼일 이내에 한 번 더 와주셨으면 하는데――"
 토자와는 인사를 마치고 그렇게 말하며 또 고개를 숙였다.
 "네, 못 올 건 없지만――"
 그게 박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신타로는 가장 마지막으로 어두운 사다리를 내리면서 이제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다섯

 토자와나 오키누의 남편이 돌아간 후 옷을 갈아입은 신타로는 아사카와의 숙모나 요이치와 함께 거실 화로를 둘러싸고 있었다. 후스마 너머서는 여전히 오리츠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전등 아래서 시원찮은 대화를 이어가며 마치 서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문 너머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곤란하네. 저렇게 종일 힘들어 해서야――"
 숙모는 부젓가락을 쥔 채로 멍하니 엉뚱한 곳을 보았다.
 "토자와 씨는 괜찮다고 했어?"
 요이치는 숙모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E・C・C를 물고 있는 형에게 물었다.
 "이삼 일은 괜찮을 거래."
 "토자와 씨 말로는 마음이 안 놓여――"
 이번에는 신타로가 대답하지 않고 담뱃재를 화로에 떨구었다.
 "신, 아까 네가 왔을 때 너희 엄마가 뭐라 하셨니?"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요."
 "그래도 웃었잖아."
 요이치는 옆에서 조용한 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응――그보다 어머니 옆에 가니 괜히 좋은 냄새가 나던데요."
 숙모는 답을 재촉하듯이 웃는 눈으로 요이치를 보았다.
 "그건 아까 너희 누나가 향수를 뿌려서 그래. 요, 그 향수가 뭐라고 했지?"
 "뭐였더라――아마 토코마키 향수 같은 거겠죠."
 그때 오키누가 후스마 뒤쪽에서 환자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
 "아버지 계셔?"
 "가게 보시는데. 왜 그러니?"
 "그게 엄마가 잠시――"
 요이치는 오키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로 앞에서 일어났다.
 "전하고 올게."
 그가 거실서 나가니 관자놀이에 부착형 두통 파스를 붙인 오키누가 팔짱을 낀 채로 발소리를 죽이며 건너왔다. 그리고 요이치가 앉아 있던 자리에 살짝 쌀쌀하다는 양 엉덩이를 붙였다.
 "좀 어떠셔?"
 "역시 약이 안 통해요――그래도 이번 간호사는 나이 많은 만큼 마음은 좀 놓이네요."
 "열은?"
 신타로는 끼어들며 맥없이 연기를 내뿜었다.
 "지금 재기론 37.2도――"
 오키누는 팔에 턱을 묻고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신타로를 보았다.
 "토자와 씨 있을 때보다 1도 정도 내리긴 했네."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조용함 속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요이치를 앞에 둔 켄조가 조마조마하여 가게에서 돌아왔다.
 "너희 집에서 전화 왔더라. 나중에 전화 달라고."
 켄조는 오키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옆방으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집에 여종이 둘 있는데 통 도움이 안 돼요."
 오키누는 혀를 차면서 아사카와의 숙모와 얼굴을 마주했다.
 "요즘 여종은――우리집도 여종이 있는데 되려 우리가 손이 갈 정도라니까."
 둘이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신타로는 담배를 문 채로 쓸쓸해 보이는 요이치를 상대하였다.
 "수험 준비는 하고 있어?"
 "하고는 있지――근데 올해는 포기했어."
 "또 우타만 짓고 있지?"
 요이치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 또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형처럼 수험에 맞는 사람이 아니니까. 수학도 싫고――"
 "싫다고 안 하면――"
 신타로가 그렇게 운을 떼자 어느 틈엔가 후스마 옆에 나온 간호사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던 숙모가
 "신, 엄마가 부르신대."하고 화로 너머로 그에게 말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는 말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간호사를 밀어내듯이 큰 걸음으로 옆방으로 향했다.
 "이리 오렴. 엄마가 하실 말씀 있으신가 봐."
 머리맡에 홀로 앉아 있던 아버지가 턱으로 가리켰다. 그는 그걸 따라 어머니의 바로 옆에 앉았다.
 "부르셨어요?"
 어머니는 베개 위에 머리를 눕히고 있었다. 그 얼굴이 천을 덮은 전등 빛을 받아 아까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요이치가 말야, 도무지 공부를 안 하네――네가 말 좀 잘 해보렴――네 말은 듣는 애잖아――"
 "네, 잘 말해둘게요. 실은 지금도 그 이야기하던 참이에요."
 신타로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 그럼 잊지 말고――나도 어제까지는 죽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복통을 참으며 잇몸이 보이게 웃어 보였다.
 "부처님 부적을 받아서 그런지 오늘은 열도 내려갔더라. 이대로 가면 나을 거 같으니까――미츠의 숙부도 십이지장 궤양이었다는데 보름 만에 나았다나 봐. 그리 어려운 병도 아닐 거 같으니까――"
 신타로는 지금도 그런 걸 의지하는 어머니가 딱하게만 느껴졌다.
 "나을 거예요. 낫죠. 약 잘 드세요."
 어머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하나 드세요."
 머리맡에 와있던 간호사가 솜씨 좋게 오리츠의 입술에 시럽약이 담긴 유리관을 얹었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는 두 호흡 정도로 관의 약을 마셨다. 그 찰나의 순간이 신타로의 마음을 밝게 만들었다.
 "좋은 염매네요."
 "이번엔 넘기신 모양이네요."
 간호사와 신타로는 친근감 섞인 시선을 나누었다.
 "약이 넘어갔다니 다행이네. 하지만 좀 오래갈 거고 누워 있는 동안 더울 테니까 아예 밥 대신에 빙수라도 사와야겠다."
 신타로는 켄조의 농담을 계기 삼아 어머니 옆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연설? 오늘 밤에 어디서 연설 있니?"하고 물었다.
 그는 황당하여 도움을 청하듯이 아버지를 보았다.
 "연설은 무슨 연설. 그런 거 없어. 오늘은 푹 자 둬."
 켄조는 오리츠를 달래는 동시에 힐끔 신타로를 보았다. 신타로는 곧장 자리서 일어나 밝은 전등빛을 받는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에선 역시나 누나나 요이치가 숙모와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나오자 다 같이 고개를 들어 무언가 병실의 소식을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신타로는 입을 다문 채로 여전히 차가운 눈초리를 하며 앉아 있던 방석 위에 앉았다.
 "뭐라셔?"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지금도 팔짱 안에 턱을 묻은 채 안 좋은 얼굴색을 한 오키누였다.
 "별 말 안 하셔."
 "그럼 엄마가 네 얼굴 보고 싶었나 보다."
 신타로는 누나의 말속에서 짓궂음을 느꼈다. 하지만 조금 쓴웃음만 짓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 오늘 밤 네가 밤 시중들 거니?"
 한동안 무언이 이어진 후, 아사카와 숙모가 하품을 내쉬며 요이치에게 물었다.
 "네――누나도 오늘 밤 한다고 했으니까――"
 "신은?"
 오키누는 얇은 눈꺼풀을 들며 신타로의 얼굴을 보았다.
 "난 아무래도 좋아."
 "여전히 시원찮구나, 신은. 고등학교도 들어갔으니 좀 빠릿빠릿해졌나 싶었는데――"
 "얘는, 신은 오늘 와서 피곤할 거 아냐."
 숙모는 반쯤 꾸짖 듯이 신경질 섞인 오키누의 말을 막았다.
 "오늘 밤은 가장 먼저 자렴. 밤 시중이라고 해서 오늘만 할 것도 아니고――"
 "그럼 가장 먼저 자볼까."
 신타로는 또 동생의 E・C・C에 불을 붙였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보고 온 주제에 내심 들떠 있는 자신의 경박함을 미워하면서………

        여섯
 
 그럼에도 신타로는 밤 열두 시 가까이가 되어서야 가게 2층의 이불에 몸을 눕힐 수 있었다. 그는 숙모의 말처럼 이동에 따른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등을 끄고 나니 몇 번인가 몸을 뒤척여도 간단히 잠에 들지 못 했다.
 그의 옆에선 아버지 켄조가 조용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자는 건 적어도 요 삼사 년 동안은 오늘 밤이 처음이었다. 아빠는 코 안 골던가――신타로는 이따금 눈을 뜨고는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꺼풀 뒤에선 역시나 어머니에 대한 갖은 기억이 난잡하게 떠올렸다 가시곤 했다. 개중에는 기쁜 기억도 있는가 하면 되려 원망스러운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억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쓸쓸할 따름이었다. "다들 지난 일이야. 좋든 나쁘든 방법이 없어"――신타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풀 냄새가 나는 베개에 멍하니 짧게 깍힌 머리를 얹혀두고 있었다.
 ――그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신타로를 위해 새로운 모자를 사온 일이 있었다. 신타로가 내내 가지고 싶어 했던 챙이 긴 다이코쿠 모자였다. 그러자 그걸 본 누나 오키누가 다음 달에 나가우타 공연이 있으니 자신도 옷을 한 벌 맞춰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싱글싱글 웃기만 하며 그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누나는 곧장 화를 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채로 억울하다는 양 독설을 뱉었다.
 "맨날 신만 귀여워하고."
 아버지는 조금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역시나 곁은 웃음을 거두진 않았다.
 "옷하고 모자가 같니."
 "그럼 엄마는? 엄마도 요전 번에 새로 하이로 샀잖아."
 누나는 아버지를 보더니 대뜸 험악한 눈초리를 보였다.
 "그때 너한테도 비녀하고 빗하고 사줬잖아?"
 "그래, 사줬지. 사줘서 아까워?"
 누나는 머리에 손을 뻗더니 하얀 국화가 담긴 꽃비녀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깟 비녀 따위."
 아버지도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렴."
 "나 바보 맞아. 신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우리 엄마도 바보였으니까――"
 신타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 다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나가 울음을 터트리자 그는 조용히 바닥 위의 꽃비녀를 줍고는 꽃잎을 찢기 시작했다.
 "신 너 뭐 하는 거야?"
 누나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그의 손에 달려들었다.
 "비녀 필요 없다며. 필요 없으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뭐야, 여자 주제에――싸울 거면 싸워보든가――"
 어느 틈엔가 울기 시작한 신타로는 국화 꽃잎이 다 떨어질 때가지 누나와 꽃비녀 하나를 두고 다투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 한 구석에는 친엄마가 없는 누나의 심정이 신기하리만치 선명히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신타로는 문득 귀를 세웠다. 누군가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어두운 사다리를 오른다――그런가 하니 미츠가 위에서 속삭이 듯 말했다.
 "사장님."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켄조는 곧장 머리를 들어 올렸다.
 "왜 그래?"
 "사모님께서 찾으시네요."
 미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래, 지금 갈게."
 아버지가 2층서 내려간 후, 신타로는 커다란 눈을 뜬 채로 집안의 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왜인지 그 사이에 지금의 심정과 거리가 먼 평화로운 추억 하나가 또렷이 떠올랐다.
 ――이 또한 아직 초등학생일 때 그는 홀로 어머니를 따라 야나카에 성묘를 갔다. 묘지의 소나무나 나무 울타리 안에 하얀 개나리꽃이 피어 있는 날이 좋은 일요일 오후였다. 어머니는 자그마한 묘 앞에 와서는 이게 아버지의 묘란 걸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앞에 서서 가볍게 인사만 할 뿐이었다.
 "그거면 됐니?"
 어머니는 물을 올리며 그를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응."
 그는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에게 막연한 친근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애처로운 돌탑에는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잠시간 묘 앞에서 손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자 근처서 공기총의 발포 소리가 들렸다. 신타로는 어머니를 혼자 둔 채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나무 울타리 하나를 크게 돌자 폭이 좁은 거리가 나온다――그곳에선 그보다 큰 아이가 동생으로 보이는 둘과 함께 한 손에 공기총을 든 채로 모종의 나무와 나뭇가지를 아쉽다는 양 올려다 보고 있었다――
 또 그때 그의 귀에 누군가가 사다리를 오르는 듯한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불쑥 불안해진 그는 몸을 반쯤 일으켜
 "누구야?"하고 사다리를 향해 물었다.
 "안 자고 있었니?"
 목소리의 주인은 켄조였다.
 "무슨 일 있어요?"
 "엄마가 찾아서 잠깐 내려보고 온 거야."
 아버지는 가라 앉은 목소리를 내면서 본래의 이불 위에 누웠다.
 "왜 찾으셨는데요? 어디 안 좋으시대요?"
 "아니, 별 일은 아니고 내일 공장 갈 거면 장롱 위 서랍에서 옷 꺼내 입고 가래."
 신타로는 어머니가 애처로워졌다. 어머니보다도 어머니 안의 아내가 애처로웠다.
 "그나저나 곤란한걸. 지금 가보니 역시 많이 아픈가 봐. 더군다나 두통도 있나 보고. 계속 목을 움직이더라."
 "또 토자와 씨께 주사라도 부탁하지 그래요?"
 "그게 그렇게 계속 놓을 수 있는 게 아닌가봐――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고통만이라도 좀 줄여주고 싶은데."
 켄조는 어둠 속에서 신타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너희 엄마만큼 착하게 사는 사람도 없는데――왜 저리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들 일어나 있어요?"
 신타로는 아버지와 마주한 채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괴로워졌다.
 "숙모는 주무셔. 하지만 잘 수 있을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다 불쑥 몸을 일으키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찾으시는데――"
 이번에는 사다리 중간 쯤에서 오키누가 작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간다."
 "저도 갈게요."
 신타로는 이불을 밀어냈다.
 "넌 여기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를게."
 아버지는 오키누의 뒤를 따라 다시 한 번 사다리를 내려갔다.
 신타로는 한동안 앉아 있었으나 이윽고 일어나 전등불을 켰다. 그리고 다시 앉은 채로 전등의 눈부신 빛 속에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부르는 건 진짜 볼일이 있다기보단 단지 아버지가 자기 옆에 와주길 바라는 걸지 모른다――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이 책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게 우연히 보였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들어 올려 보았다.
 "M코에게 바친다……"
 그 뒤는 요이치의 우타였다.
 신타로는 그 종이를 던지고는 두 손을 머리 뒤에 돌리며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한순간, 눈이 맑은 미츠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일곱

 신타로가 눈을 뜨자 창문 틈새로 하얀 빛이 들어오는 2층에선 누나 오키누와 켄조가 무어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곧장 일어났다.
 "그래그래, 그럼 넌 자고 있어라."
 켄조는 오키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바삐 사다리를 내려갔다.
 창밖에선 벽돌 지붕에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도 내리네――신타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곧장 잠옷을 갈아 입었다. 그러자 오비를 풀고 있던 오키누가 살짝 비꼬듯이 인사했다.
 "잘 잤어?"
 "잘 잤어, 엄마는 좀 어떠셔?"
 "밤새 힘들어하셨어――"
 "못 주무셔?"
 "당신 입으로야 잘 잤다 하는데 옆에서 보기론 오 분도 제대로 못 주무신 거 같더라. 그랬더니 묘한 소리를 해서――나까지 밤중에 꺼림칙해졌잖아."
 옷을 다 갈아입은 신타로는 사다리 위에 서있었다. 그곳에서 보이는 부얶에선 미츠가 소매 끝자락을 접은 채로 행주인지를 들고 있다――그러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접어뒀던 소매를 내렸다. 그는 손잡이를 붙든 채로 내려가는 게 살짝 꺼려졌다.
 "묘한 소리라니?"
 "반 다스? 반 다스는 여섯 장 아니냐더라."
 "좀 혼란스러우신가 보네――지금은 어쩌고 계셔?"
 "지금은 토자와 씨가 와계셔."
 "빠르시네."
 신타로는 미츠가 사라진 걸 보고 천천히 사다리를 내려갔다.
 오 분 후, 그가 병실로 오자 토자와는 마침 디기타민의 주사를 놓은 참이었다. 어머니는 머리맡의 간호사에게 주사 후 조치를 받으며 어젯밤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하얀 베개 위에서 끝없이 머리를 움직였다.
 "신타로 왔어."
 토자와의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여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와 반대로 토자와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곳에선 요이치가 팔짱을 낀 채로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 잡아 드리거라."
 신타로는 아버지의 말을 딸아 양손 손바닥 안에 어머니의 손을 두었다. 어머니의 손은 식은 땀으로 꺼림칙하게 질척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끄덕이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으나 곧장 그 눈을 토자와에게 주면서
 "선생님, 더는 안 될 거 같아요. 손이 저려요"하고 말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이제 이삼일만 참으세요."
 토자와는 손을 씻어주었다.
 "곧 편해지실 거예요――오오, 많은 게 있네요."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인 그릇 위에는 다이진구의 우지가미의 부적이나 시바마타 석가의 부적 같은 게 흘러 넘칠 정도로 놓여 있었다――어머니는 눈을 굴려 그 그릇을 보면서 신음하는 듯이 짧게 짧게 말을 이어갔다.
 "어젯밤에, 너무, 힘들어서――그래도 오늘 아침은, 배 통증은, 많이 좋아졌어요――"
 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말했다.
 "말하기 힘든가 보네요."
 "입에 침이 많으신 거예요――이걸로 물을 주세요."
 신타로는 간호수에게 물에 적신 붓을 받아 두세 번 어머니의 입을 매만졌다. 어머니는 붓을 혀로 핥아서 얼마 안 되는 물을 흡수하려 했다.
 "그럼 또 올게요. 걱정하실 건 없으세요."
 토자와는 가방 정리를 하고는 어머니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를 돌아보며
 "그럼 열한 시쯤에 다시 한 번 남은 주사를 놓으러 올게요."하고 말했다.
 간호사는 입안으로 대답을 하더니 무언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신타로는 아버지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와 토자와 씨를 배웅했다. 작은방에서는 오늘 아침도 여전히 혼이 빠진 듯한 숙모가 홀로 앉아 있다――토자와는 그 앞을 지날 때 정중한 숙모의 인사에 적당한 목례를 돌려주며 뒤를 따라온 신타로에게
 "수험 준비는 잘 돼가시나요?"하고 물었다. 하지만 곧 실수한 걸 깨닫고는 불쾌할 정도로 쾌할하게 웃었다.
 "이거 제쇵하네요――동생분만 봐서――"
 신타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엔 동생분만 보면 시험 이야기만 하게 되네요. 실은 저희 집 아들놈도 수험 준비 중이라서요――"
 토자와는 부엌을 지날 때도 역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의사가 빗속으로 돌아간 후, 신타로는 아버지를 가게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서는 숙모 옆에서 요이치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졸리지?"
 신타로는 주저앉듯이 화로 구석에 무릎을 얹었다.
 "누나는 벌써 자고 있어. 너도 이틈에 2층 가서 어서 한숨 돌리고 와."
 "음――어젯밤 내내 담배만 피워서. 혀가 좀 텁텁하네."
 요이치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아직 긴 담배를 화로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엄마가 덜 앓는 거 같으니 다행이야."
 "좀 편해진 거 같긴 하지."
 숙모는 어머니의 손난로에 넣을 재를 태우고 있었다.
 "네 시까지는 힘들어했으니까요."
 그때 마츠가 부엌에서 머릿결이 흐트러진 고개를 내밀었다.
 "숙모님, 사장님께서 잠시 가게로 부르십니다."
 "네네, 지금 갑니다."
 숙모는 손난로를 신타로에게 건넸다.
 "그럼 신, 엄마 좀 잘 봐드리렴."
 숙모가 그렇게 말하며 나가자 요이치도 하품을 눌러 죽이며 겨우 무거운 허리를 들어 올렸다.
 "나도 눈 좀 붙이고 와야겠다."
 신타로는 혼자 남아 손난로를 무릎에 얹은 채로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무얼 생각하는지는 스스로도 또렷이 알 수 없었다. 단지 거센 빗소리만이 보이지 않는 지붕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그런 생각만이 머리에 퍼져 있었다.
 그러자 대뜸 병실에서 간호수가 황급히 달려 왔다.
 "누가 좀 와주세요, 누가――"
 신타로가 곧장 몸을 일으키고는 곧장 병실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듬직한 두 팔에 오리츠를 꼭 안아 올렸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그에게 안긴 채로 몸을 두세 번 떨었다. 그러고는 검푸른 색의 액체를 토했다.
 "엄마."
 누구도 찾아 오지 않는 몇 초 동안 신타로는 큰 목소리로 어머니를 찾으며 이미 숨이 끊어진 얼굴을 빨려 들 것처럼만 바라보았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