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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발타자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역

by noh0058 2022.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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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당시엔 그리스 사람에게 사라신이라 불린 발타자르가 에티오피아를 다스리고 있었다. 발타자르는 색은 검어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남자였다. 또 솔직하고 넓은 마음을 지닌 남자였다.
 즉위 제3년이자 스물두 살일 적에 왕은 나라를 나와 시바의 여왕 발키스를 만나기 위한 길에 올랐다.
 추종하는 건 마법사 셈보비티스와 환관 멘케라였다. 일흔다섯 마리의 낙타가 행렬을 이루고 하나같이 계피, 몰약, 사금, 상아 따위를 짊어지고 있었다. 
 길을 가는 동안 셈보비티스가 왕에게 유성의 힘이나 보석의 덕을 가르치거나 멘케라가 존귀한 비문의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왕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대신 사막 끝에 앉아서 귀를 세우고 있는 자칼이란 동물을 보고 재밌어 할 뿐이다.
 십이 일의 여행이 끝나자 장미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또 곧장 시바를 둘러싼 정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행은 지나가는 길에 꽃이 핀 석류 나무 아래서 젊은 여자가 춤을 추는 걸 보았다.
『춤은 기도이지.』 마법사인 셈보비티스가 말했다.
『저 여자아이는 좋은 값에 팔리겠어.』환관 멘케라가 말했다.
 시바 안으로 들어가자 창고나 공방 따위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또 무수한 상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게 먼저 일행의 눈을 놀래켰다.
 그렇게 잠시간 시바 안을 걸었다. 시바는 수레나 짐꾼, 당나귀와 나귀꾼으로 가득했다. 그러자 시야가 불쑥 열리더니 발키스 왕궁의 대리석 벽과 보라색 커튼, 금색 원형 천장이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바 여왕은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분수에선 향수가 뿜어져 나와 시원함을 조성했다. 분수는 진주비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내렸다.
 여왕은 웃으며 일행의 앞에 섰다. 보석을 두른 긴 로브를 입고 있었다.
 여왕을 본 발타자르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왕이 '꿈'보다도 사랑스럽고 '바람'보다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폐하, 여왕과 좋은 무역 조약을 맺는 걸 잊지 마시옵소서.』셈보비티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조심하시지요. 여왕은 마법으로 남자의 사랑을 얻는다 들었습니다.』멘케라가 덧붙였다.
 그렇게 마법사와 환관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물러났다.
 발자타르는 발키스와 마주하여 무어라 말해야겠지 싶었다. 그렇게 입을 벌려 보았으나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왕은 '가만히 있으면 여왕이 화를 낼 거다'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왕은 아직도 웃고만 있다. 화내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먼저 입을 연 건 여왕이었다. 목소리는 어떤 미묘한 음악보다 더 미묘했다.
『잘 오셨습니다. 제 옆에 앉으시지요.』 여왕은 하얀 빛만 같은 우아한 손가락으로 바닥에 깔려 있는 보라색 방석을 가리켰다. 발타자르는 그곳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두 손으로 방석을 잡으며 황급히 이렇게 말했다.
『폐하, 과인은 이 두 방석이 당신의 원수인 두 거인이었으면 합니다. 또 곧장 그 목을 잘라 보여드리고 싶군요.
 왕은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어 두 손으로 방석을 쥐었다. 부드러운 천이 거친 소리와 함께 찢어지자 눈처럼 하얀 깃털이 흩날렸다. 자그마한 깃털 하나가 한동안 하늘에서 살랑이며 여왕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발타자르 폐하. 폐하는 왜 거인을 죽이겠다 하시나요.』발키스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과인이 폐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폐하 나라의 우물에선 좋은 물이 나오나요? 가르쳐주시지요.』
『나오지요.』발타자르는 조금 놀랐다.
『또 저는 에티오피아가 왜 과일 설탕절임을 갖추는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왕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가르쳐주시지요.』 여왕은 그렇게 재촉한다.
 때문에 왕은 모든 기억력을 짜내어 에티오피아의 요리사가 마르멜로를 꿀 안에 담아 저장하는 방법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여왕은 마땅히 듣지도 않고 불쑥 화제를 바꾸었다.
『폐하, 폐하는 인접한 간다게의 여왕을 사랑한다 들었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아름다운가요. 거짓말 하기 없기에요.
『당신보다 아름답다니요?』왕은 발키스의 발밑에 몸을 숙이고 외쳤다.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그분의 눈은? 그분의 입은? 그분의 피부는? 그분의 목은?』여왕은 끝없이 말을 이어간다.
 때문에 발타자르는 두 팔을 여왕을 향해 뻗으며『과인에게 폐하의 목에 떨어진 자그마한 날개를 주신다면 과인의 나라의 절반을 드리지요. 그 현명한 셈보비티스와 환관 멘켈라도 바치겠습니다』하고 외쳤다.
 하지만 여왕은 자리서 일어나 차가운 웃음 소리와 함께 물러나고 말았다. 마법사와 환관이 돌아왔을 때에 왕은 여느 때 이상으로 깊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폐하, 무역 조약은 맺으셨습니까.』셈보비티스가 물었다.
 어느 날, 발타자르는 시바 여왕과 저녁을 함께하며 야자주를 마셨다. 같이 밥을 먹고 있자니 발키스가『그럼 간다게 여왕이 저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건 사실인가요?』하고 물었다.
『간다게 여왕은 새까맣습니다.』발타자르는 그렇게 대답했다.
 발키스는 의미심장히 발타자르를 보았다.
『새까매도 아름다울 순 있지요.』
『발키스!』
 왕은 그렇게 외치며 두 말 하지 않고 여왕을 껴안았다. 왕의 입술에 밀려 여왕의 머리는 힘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왕은 여왕이 우는 걸 보고 달달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유모가 젖먹이 아이를 대할 때와 같은 말투였다. 왕은 여왕을 『내 작은 꽃』이라 부르거나『내 작은 별』이라 불렀다.
『왜 우시는 거죠? 어떻게 해야 울음을 그칠까요?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주시죠.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여왕은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아직 생각에 잠겨 있다. 왕은 오랫동안 여왕에게 바람을 밝혀달라 바랐다. 그 끝에 여왕은 겨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무섭다는 걸 알고 싶어요.』
 발타자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여왕은 이제까지 무언가 알지 못하는 위험을 만나고 싶어도 시바의 시민과 신이 지켜보는 통에 만나지 못했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래도』여왕은 말했다.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밤 내내 무서움의 기쁨이 온몸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무서워 머리가 곤두서는 걸 기다리고 있답니다. '두려워한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여왕은 두 손을 검은 왕의 목덜미에 두르고는 아이가 조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 찾아와요. 모습을 꾸미고 같이 거리를 걷지요. 어떤가요?』
 왕은 동의했다. 여왕은 곧장 창문으로 달려가 격자 사이로 아래의 십자로를 내려다보았다.
『거지 하나가 왕궁 벽에 기대어 누워 있네요. 저 거지에게 폐하의 침실을 쓰게 하고 대신 낙타털 두건과 남자가 두른 옷을 빌리지요. 어서 움직이세요. 저도 준비를 할 테니까요.
 여왕은 기쁘게 손뼉을 치며 향연의 방을 나섰다. 발자타르는 금색 자수가 된 리넨 속옷을 벗고 거지의 옷을 입었다. 아무리 보아도 노예만 같다. 여왕 또한 곧장 푸른 통옷을 입고 나타났다.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입는 옷이다.
『그럼 가지요.』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좁은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을 향해 발타자르를 끌었다.

       둘

 밤은 어두웠다. 그리고 밤의 어둠을 두른 발키스는 굉장히 작게 보였다.
 여왕은 발타자르를 어떤 술집으로 데려갔다. 노숙자나 노동자가 사창부를 끌고 오는 곳이다.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불쾌한 냄새가 나는 램프 빛으로 불결한 공시 속에 떠오른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더러운 짐승들을 보았다. 여자 하나, 술 한 잔의 싸움으로 주먹과 나이프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다른 녀석들은 또 코를 골면서 주먹을 쥔 채 식탁 아래서 잠들어 있다. 술집 주인은 마사 직물 위에 누워 눈을 빛내며 으르렁거리는 주정뱅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발키스는 소금에 절인 생선이 천장의 서까래에 걸린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저 생선에 양파 가루를 뿌려 먹어보고 싶어요.
 발자타르는 그렇게 주문했다. 하지만 막상 먹고 보니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산하지 않고 둘이서 빠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차 그렇게 하니 가게 주인이 『도둑 놈의 자식들』하고 성을 내며 둘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발타자르는 주먹을 들어 주인을 때렸다. 이를 본 주정뱅이 대여섯 명이 나이프를 뽑고서 둘을 향해 왔다. 하지만 발자타르가 이집트 양파를 다지는데 쓰는 공이를 들고 다가오는 두 사람을 때려눕혔기에 나머지는 꼬리를 말고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여왕은 발타자르의 뒤에 붙어 몸을 작게 움츠리고 있다. 때문에 왕은 시종 발키스의 피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왕을 용맹하고 과감하게 만들었다.
 가게 주인의 동료는 옆으로 다가오지 않고 가게 구석에서 기름병이니 백랍 접시니 불이 붙은 램프니 하는 걸 집어 던졌다. 끝내는 양을 통으로 삶고 있던 커다란 청자 냄비마저 던졌다. 냄비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발타자르의 머리 위에 떨어져 정수리에 상처를 입혔다. 아무리 발타자르라도 잠시간 눈이 부신 듯 서있었으나 이윽고 혼신의 힘을 모아 그 냄비를 되던졌다. 냄비의 무게가 열 배는 될 법한 기세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냄비가 부딪히는 동시에 형용하기 어려운 노성과 단말마가 들렸다. 발키스에게 상처가 나서는 안 된다며, 왕은 살아남은 녀석이 겁먹은 틈을 타 여왕을 품은 채로 인기척 없는 옆길로 도망쳤다. 길은 어둡고 조용했다. 밤의 적막이 땅을 감싸고 있었다. 도망친 두 사람은 우연히 그 뒤를 쫓아 온 여자나 주정뱅이의 매도 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들렸다. 얼마 되지 않아 들리는 건 단지 피가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피는 발타자르의 이마서 발키스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여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왕은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달빛 덕에 여왕의 반쯤 감긴 눈이 생생하고 하얗게 빛나는 걸 보았다. 두 사람은 물이 없는 작은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불쑥 발타자르가 이끼에 발이 미끄러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껴안으며 땅에 이르렀다. 영원 환락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두 연인에겐 어떤 세계나 매한가지였다. 밤이 지나고 돌사이에 옴폭 패인 곳에 영양이 물을 마시러 왔을 때에도 두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잊고 제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난 걸 잊은 채 따스한 꿈에 잠겨 있었다.
 그때 지나간 도적 무리가 이끼 위에서 잠든 연인을 보았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돈은 없어도 좋은 값에 팔릴 거야. 젊고 예쁘니까.』하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을 둘둘 감쌌다. 또 나귀 꼬리에 묶어 길을 서둘렀다.
 에티오피아왕은 묶이면서도 "죽여버리겠다"고 도둑을 위협했으나 발키스는 차가운 아침바람에 몸을 떨면서 여전히 구경거리를 보듯이 단지 작게 웃고만 있었다.
 무서운 적막 속에서 나귀는 발굽을 울리며 달렸다. 그렇게 슬슬 한낮의 더위를 느끼게 되었다. 해가 높아지니 도둑들은 둘의 밧줄을 풀고 바위 그림자에 앉혔다. 그리고 곰팡이 핀 빵을 던져주었다. 발키스는 배가 고픈 듯 먹었으나 발자타르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여왕이 작게 웃었다. 도적 두목이 왜 웃냐고 물었다.
『지금 당신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하려 생각했어요.』
『흥, 신분도 낮은 년이 거창한 소리를 하는군. 지금 저 검은 자식보고 우리 목을 조이라 이거지?』도적 두목은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발자타르는 그 말에 불처럼 화가 났다. 그리고 똑바로 달려 들어 도둑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목을 졸라 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상대는 나이프를 뽑아 왕의 몸에 자루를 꽂았다. 왕은 불상하게 땅을 굴러 마지막으로 발키스를 보고는 그대로 시력을 잃고 말았다.

       셋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발키스에겐 가신인 아브넬이 호위병의 선두에 서 여왕을 구하러 온 게 보였다. 가신은 여왕이 행방불명이 된 걸 밤중에 들은 것이다.
 아브넬은 발키스의 발밑에 세 번 몸을 낮추고 또 여왕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가마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러는 사이 호위병들이 도적의 손을 모조리 묶어버렸다.

『제가 여러분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했지요? 약속은 지켜야겠네요.』 여왕은 도적 두목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아브넬 옆에 서있던 마법사 셈보비티스와 환관 멘켈라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렀다. 왕의 배에 나이프가 꽂혀 미동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가만히 왕을 안아 일으켰다. 약물학에 정통한 셈보비티스는 왕이 아직 호흡하는 걸 알았다. 때문에 멘켈라가 왕의 입술서 거품을 닦는 사이 상처에 붕대를 둘렀다. 그렇게 둘은 왕을 말에 묶고 조용히 여왕의 궁전으로 데려갔다.
 발타자르는 보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 누워 있었다. 왕은 정신을 잃은 채로 몇 번이나 끓는 냄비와 강의 이끼 이야기를 잠꼬대처럼 늘어 놓았다. 큰 목소리로 끝없이 발키스, 발키스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왕은 열여섯 일째에 겨우 눈을 뜨고 침상 옆에 자리한 셈보비티스와 멘켈라를 보았다. 하지만 여왕은 보이지 않았다.
『여왕은 어디 있지? 무얼 하고 있느냐?』
『폐하, 여왕은 코마게나의 왕과 밀실서 알현 중입니다.』 멘켈라가 그렇게 답했다.
『분명 상품 교역 계약을 맺고 있을 테지요.』현인 셈보비티스가 덧붙였다.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폐하. 열이 또 올라서는 안 됩니다.』
『여왕과 만나에걌다.』발타자르는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왕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현인도 환관도 막을 수 없었다. 여왕의 침실에 이른 왕은 코마게나의 왕이 오는 걸 보았다. 왕은 금을 둘러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발키스는 작게 웃으며 눈을 감고 보라색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발키스! 발키스!』발타자르가 불렀다. 하지만 여왕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꿈을 꾸고 싶은 듯했다. 발타자르는 옆으로 다가가 여왕의 손을 잡았다. 여왕은 차갑게 그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무슨 일이죠?』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흑인 왕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여왕은 왕 위로 눈동자를 두었다. 차갑고 조용한 눈초리였다. 왕은 여왕이 모든 걸 잊은 줄 알았다. 때문에 그 좁은 강의 밤을 떠올리게 하려 했다. 하지만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 저는 폐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폐하께선 야자주가 몸에 맞지 않았던 걸 테지요. 분명 꿈을 꾸신 거예요.』
『꿈이라고?』왕은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네 키스가, 내 몸에 상처를 남긴 나이프가 꿈이라는 건가? 꿈이라고?』
 여왕은 몸을 일으켰다. 로브에 달린 보석이 눈발과 같은 소리와 함께 반짝반짝 빛났다.
『폐하, 마침 의회가 시작될 참입니다. 저는 폐하가 취해 꾸신 꿈을 풀어 줄 새가 없지요. 조금 쉬시는 건 어떨까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발타자르는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 요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모든 힘을 짜내어 자기 방으로 달려 돌아왔다. 돌아와 졸도했다. 그렇게 또 상처가 벌어지고 말았다.

       넷

 왕은 삼 주 동안 누워만 있었으나 이십이 일 째에 정신이 들어 멘켈라와 함께 간병하던 셈보비티스의 손을 잡았다. 왕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더냐. 하나는 나이를 먹었고 하나는 나이 먹은 것이나 다름 없지. 허나 이 세상에 행복이란 건 없다. 모두 악독한 자들 뿐이야. 사랑도 죄라면 발키스 또한 사악한 자지 않으냐.』
『지혜는 행복을 주지요.』 셈보비티스는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해보려 한다. 어서 에티오피아로 돌아가자꾸나.』발타자르는 그렇게 말했다.
 왕은 사랑하는 모든 걸 잃었기에 온몸을 지혜에 바쳐 마법사가 되려 결심했다. 이 결심은 결코 왕에게 쾌락은 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평정의 마음만은 회복시켜주었다. 왕은 매일 밤 마법사 셈보비티스와 환관 멘켈라와 함께 왕궁 발코니에 앉아 지평선을 따라 똑바로 선 야자나무를 바라보거나 뗏목처럼 나일강을 내려오는 악어 무니를 달빛 속에서 지켜보고는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찬사해도 끝이 없지요.』셈보비티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자연에는 의외로 야자나무나 악어보다 아름다운 게 있어.』왕은 발키스를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은 셈보비티스가 대답하기를
『물론 나일강의 범람 같은 현상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제가 이미 해석이 끝났습니다. 인간은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네. 세상에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잔뜩 있어.』
 발타자르가 탄식을 내쉬며 말했다.
『어떤 게 그렇습니까.』셈보비티스가 물으니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심이 그렇지.』
 하지만 발타자르는 마법사가 되자 결심한 후 탑 하나를 세웠다. 그 꼭대기서는 많은 왕국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탑은 벽돌로 만들어져 모든 탑 위에서 높게 자리해 있다. 완성되는데 이 년이 필요로 했다.
 발타자르는 그 탑 건축에 부왕의 전재산을 들였다. 왕은 매일 밤마다 탑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현인 셈보비티스의 지도 하에 천문 연구를 하였다.
『하늘의 별은 인간의 운명을 보여줍니다.』셈보비티스가 말했다.
『하지만 어떤 걸 보여주는지는 알 수 없지. 단지 연구를 하는 동안은 발키스를 잊을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선물이야.』왕은 답했다.
 마법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 중 하나로서 별은 못처럼 하늘에 고정되어 있단 걸 가르쳐주었다. 또 하늘에는 다섯 개의 유성이 있다. 벨, 메로닥, 네보는 양이요 신과 밀리타는 음이라 가르쳐주었다. 마법사는 설명을 이어가며
『은은 신에 해당합니다. 신이란 달을 말하지요. 또 철은 메로닥과 구리는 벨과 해당하지요.』
 발타자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지식이란 그것이다. 천문을 연구하는 동안은 발키스도 떠올리지 않을 뿐더러 이 땅의 속세를 잊을 수 있지. 학문이란 좋아. 학문은 인간에게 생각할 새를 주지 않아. 셈보비티스, 너는 내게 지식을 가르치거라. 지식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을 파괴한다. 지식을 가르쳐준다면 나는 네게 만민이 우러러 보는 명성을 주마.
 이가 세봄비티스가 왕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이유였다.
 마법사는 왕에게 아스트람사이코스나 파자타스의 길을 따라 마법의 힘을 가르쳐주었다. 발타자르는 태양의 십이 궁을 연구할 수록 발키스를 잊어 갔다. 멘켈라는 이를 보고 환희에 젖었다.
『폐하, 발키스 여왕의 금색 로브 아래에는 산양과 같이 발가락이 갈라진 발이 있다고 합니다. 』
『누가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더냐.』
『폐하, 시바와 에티오파에선 누구나 하는 말이옵니다. 발키스 여왕의 한쪽 정강이는 털 투성이에 한쪽 발은 둘로 갈라진 검은 발톱이 있다고 모두가 말합니다.』환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발타자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발키스가 발도 정강이도 다른 여자와 다를 바 없으며 또 흠잡을 구석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은 발키스의 아름다움이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의 상상으로 그런 흠집을 잡는다 생각을 하니 새삼스레 여왕이 싫어졌다. 실제론 옥처럼 아름답다 한들 이물로 통하는 여자와 관계했다 생각하니 왕은 심한 혐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다시 발키스와 만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발타자르는 단순한 심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복잡한 정서였다.
 그날부터 왕은 마법으로도 점성술로도 장족의 진보를 이루었다. 세밀한 주의를 들이며 별의 만남을 연구하거나 셈보비티스와 조금도 엇나가지 않은 정확한 점성도를 그리곤 했다.
『셈보비티스, 너는 내 점성도가 진실되었다고 목을 걸을 수 있느냐.』왕이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폐하, 학문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자는 번번이 틀리지요.』 현인 셈보비티스는 대답했다.
 발자타르는 우수한 관능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진정한 것이 성스러운 것이지. 성스러움이란 인간의 인지를 뛰어 넘어 있다. 인간은 헛되게도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나는 하늘서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별이야. 살아 있는 것처럼도 느껴지지. 빛날 때엔 부드러운 하늘의 눈처럼만 보이는군. 그게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이 별 아래에 태어난 건 말로 못할 행복일 테지. 셈보비티스, 저 아름다운 별이 얼마나 우리를 밝게 비추는지 보거라』하고 말했다.
 하지만 셈보비티스는 별을 보지 않았다. 보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명하고 나이 먹은 마법사는 신기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밤의 침묵 속에서 발타자르는 홀로 다시 말했다.『이 별 아래에 태어난 건 말로 못할 행복일 테지.

       다섯

 발타자르 왕이 더는 발키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에티오피아와 옆나라에 퍼졌다.
 그 소식이 시바에 알려지니 발키스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가 났다. 하지만 시바서 자신의 나라마저 잊은 것처럼 시간을 보내던 코마게나왕을 찾았다.
『제가 뭘 들었는지 아나요? 발타자르가 더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네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잖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코마게나왕은 그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 검은 사람이 저를 굴욕했다 생각하지 않나요?つ』
『잘 모르겠군.』
 그러자 여왕은 왕을 한참 욕하더니 눈앞에서 물렸다. 또 재상에게 명해 에티오파아로 향할 여행 준비를 했다.
『우리는 오늘 밤 떠날 거다. 해가 질 때까지 준비가 끝나지 않으면 네 목을 자를 테니 그리 알거라.』
 하지만 혼자 남은 여왕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이제 나를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렇건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여왕은 그렇게 말하고 진심으로 탄식을 내쉬었다.
 어느 밤, 발타자르가 탑 위에서 그 신비한 별을 보았을 때, 문득 지상을 보자 마치 개미와 같은 검고 긴 선이 사막 저 멀리서 꾸물꾸물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개미로 보인 게 조금씩 커져 이윽고 왕이 수많은 말, 수많은 나귀, 수많은 코끼리를 분별할 수 있었다.
 여행자 무리가 가까워졌을 때, 발타자르는 시바 여왕의 호위병이 다루는 검은 말과 밤에도 빛나는 언월도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여왕마저도 볼 수 있었다. 왕은 큰 후회와 번뇌를 느꼈다. 또 여왕에게 사랑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은 신비한 빛을 내뿜으며 하늘 위에서 빛나고 있다. 아래에는 보라색과 금색 가마 위에 발키스가 별처럼 작게 반짝이고 있다.
 발타자르는 무서운 힘으로 여왕에게 끌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왕은 필사적인 용기를 고무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별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신에게 영광 있으리. 땅의 올바른 자에게 평화 있으리. 국왕 발타자르여. 몰약을 가지고 나를 따르라. 내가 그대를 이끄러 곧 마구간의 나귀와 목우 사이서 태어나는 어린아이의 발밑에 이르게 하리라.
 그 어린아이는 왕중의 왕일지니. 위로를 필요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는 자일지니.
 나는 그대를 나의 밑으로 부른다. 발타자르여. 그대의 혼은 그대의 얼굴처럼 검으나 그대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더러움이 없도다.
 나는 그대를 택하였다. 이는 그대가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부와 행복과 사랑을 주리라.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빈곤함을 기뻐하라. 이는 진정한 부일지니".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행복을 버리는데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이외의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 그저 자신만 사랑하면 된다.'"』
 그 말과 함께 신성한 평화가 빛의 홍수처럼 발타자르의 검은 얼굴에 떨어졌다.
 발타자르는 황홀한 마음으로 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왕은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걸 느꼈다.
 왕의 옆에서는 셈보비티스와 멘켈라가 몸을 낮춘 채 머리를 땅에 두고 예배를 올리고 있다.
 발키스는 가만히 발타자르를 보았다. 여왕은 신의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에 자신의 사랑이 들어갈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얼굴색을 바꾸어 화를 내는 여왕은 일행에게 곧장 시바로 돌아가라 명을 내렸다.
 별이 이야기를 마치자 발타자르와 종자는 탑을 내려갔다. 그리고 몰약을 찾아 여행대를 꾸리고 별이 이끄는 방향으로 출발했다.
 일행은 오랫동안 처음 보는 나라서 나라로 여행을 거듭했다. 그동안에도 별은 항상 앞에서 일행을 인도해주었다.
 어느 날, 세 길이 한 곳으로 모이는 곳에 이르자 일행은 두 왕이 무수한 행렬을 끌고 오는 걸 보았다. 그 중 한 명은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자가 발타자르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과인은 카스파르라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어린아이에게 드릴 황금을 가지고 가는 참이지요.
 두 번째 왕이 앞으로 나왔다. 노인이며 하연 수염이 가슴을 가리고 있다.
『과인은 멜키오르라 하오.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려 한다는 위대한 어린아에에게 향유를 가지고 가는 참이오.。』
『과인도 경들과 같은 곳에 가오. 과인은 향락의 욕심을 극복하였기에 별이 과인에게 말을 걸어주었지.』발타자르가 말했다.
『과인은 교만을 극복했소. 과인이 부름을 받은 건 그 때문이야.』멜키오르가 그렇게 말했다.
『과인은 잔학함을 극복했습니다. 때문에 과인이 경들과 함께 가지요. 』카스파르가 말했다.
 이리하여 세 현인은 함께 모험을 계속했다. 동방서 보이는 별은 그들 앞에 섰고 이윽고 그 아이에게 이르자 그곳에 멈추었다. 별이 멈추는 걸 본 셋은 너나 할 거 없이 기뻐했다.
 집안에 이른 세 사람은 갓난아기가 마리아와 함께 있는 걸 보았다. 그렇게 자세를 낮추어 그들은 갓낭아기에게 예배를 올렸다. 또 가져 온 재보를 펼쳐 금과 향유, 몰약을 바친 건 복음서에도 적혀 있는 바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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