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베이징 일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2. 26.
728x90
반응형
SMALL

하나 용화궁


 오늘도 나카노 코칸 군을 따라 오전부터 용화궁을 보러 다녀왔다. 라마사에 별 관심은 없지만 아니, 되려 라마사 따위 아주 싫지만 베이징 명물이라면 기행에 적을 필요상 의리로라도 한 번은 봐야 하리라. 나도 참 고생이 많지 싶다.
 더러운 인력거를 타고 겨우 문 앞에 이르니 확실히 큼지막한 사찰임은 분명하다. 물론 보통 큰 사철이라 하면 큰 당 하나가 있는 걸 떠올릴 텐데 이 라마사는 그 정도가 아니다. 영우전, 유성전, 천왕전, 법륜전 등 수많은 당의 집합체이다. 또 일본의 절과 달리 지붕은 노랗고 벽은 붉으며 계단은 대리석을 썼고 돌로 된 사자니 청동 석자탑이니(중국인은 문자를 존귀히 여겨 문자를 쓴 종이를 주우면 이 탑 안에 넣는다고 나카노 군이 설명해주었다. 즉 다소 예술적인 청동제 종이 쓰레기통이라 생각하면 된다.) 건릉제의 '업' 따위도 서있으니 장엄함 따위가 느껴진다.
 제육소동배전에 나무로 뜬 환희불상이 네 개 있었다. 당수에게 은화 한 장을 주자 막을 치워 보여주었다. 불상은 모두 푸른 얼굴에 붉은 머리, 등에 팔이 몇 개나 달리고 무수한 머리를 목걸이로 찬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환희불상 제1호는 인간의 가죽을 쓴 말에 올라타 염두에 작은 사람을 두고 있다. 제2호는 상아로 만든 머리를 한 여인을 아래로 밟고 있고 제3호는 서서 여자를 희롱하고 있다. 제4호는――가장 탄복한 게 제4호이다. 제4호는 소 등 위에 서있고 또 그 소는 누운 여자를 희롱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환희불상에선 조금도 에로틱한 느낌을 받지 못 했다. 단지 어딘가 잔혹한 호기심의 만족감을 줄 뿐이다. 환희불상 제4호의 옆에는 반쯤 입을 벌린 곰 목상이 있었다. 이 곰도 사정을 들으면 필시 무언가의 상징일 테지. 곰은 앞에 두 무인(얼굴이 푸르고 검은 머리를 했으며 창을 들고 있다) 뒤로는 작은 곰 두 마리를 끼고 있다.
 또 녕아전으로 기억한다. 완탕 가게의 차르멜라 소리와 비슷한 걸 들어 살짝 안을 들여다 보니 라마승 두 명이 괴상 쩍은 나팔을 연주하고 있었다. 라마승이라고는 해도 어떤 이는 노란색, 어떤 이는 붉은 색, 어떤 이는 보라색 등 털 달린 삼각모를 쓰고 있어 다소 그림이 되는 건 분명하나 영 모두 악당으로만 보였다. 얼마나마 호의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이 두 나팔수 뿐이다.
 또 나카노 군과 돌길 위를 걷고 있으니 만복전의 앞에 자리한 망루에서 당수 하나가 고개를 내밀어 위로 올라오라 손짓했다. 좁은 사다리를 올라가니 그곳에도 또 막을 덮어쓴 불상이 있었다. 그러나 당수는 간단히 막을 치워주지 않았다. 이십 전을 내라며 손만 내밀 뿐이다. 겨우 십 전으로 타협을 보아 막을 치우니 푸른 얼굴, 하얀 얼굴, 노란 얼굴, 붉은 얼굴, 말 얼굴 등이 달린 괴물을 보았다. 더군다나 또 팔도 몇 개나 달려 있는 데다가(팔은 도끼나 활 이외에도 사람 목이나 팔을 들고 있곤 했다.) 오른 다리는 새 다리이며 왼 다리는 동물 다리인 게 굉장히 미치광이의 그림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예상했던 환희불은 아니었다.(물론 이 괴물은 다리 아래에 두 인간을 밟고 있었다.) 나카노 군은 바로 눈을 부라리며 "이 자식, 거짓말했구나"하고 말하니 당수가 크게 당황하여 곧장 "이게 있다, 이게 있다"하고 말한다. "이거"란 남색 남근이었다. 울퉁불퉁한 게 아이를 만드는 법 하나 없이 당수의 담배값이나 되고 있다. 슬프기 짝이 없다, 라마불의 남근이란.
 라마절 앞에 라마 화가의 가게가 일곱 채가 있었다. 화가의 총수는 서른여 명. 모두 티베트에서 왔다고 한다. 항풍호란 가게에 들어가 라마불 그림 몇 장을 샀다. 이 그림이 1년에 1만 2, 3천 장 팔린다면 라마 화가의 수입도 무시할 게 못 된다. 

 

둘 구훙밍 선생님


 구훙밍 선생님을 찾았다. 보이에게 안내받은 곳에는 벽에 돌족자가 걸려 있고 마루에 암페라가 깔린 방이었다. 빈대라도 나올 거 같지만 조용하고 쓸쓸함이 사랑스러운 방이라 해야겠지.
 1분이 채 안 되게 기다리니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노인이 나왔다. 문을 넘어 오자마자 영어로 "잘 왔다, 앉아라"하고 말한다. 물론 구훙밍 선생이시다. 변발과 하얀 중국 민족의상, 얼굴은 코가 짧은 게 어딘가 커다란 박쥐와 닮아 있다. 선생님이 내게 이야기할 때는 테이블 위에 몇 장의 갱지를 두고 손으론 연필을 움직여 한자를 쓰면서 입으로는 막힘없이 영어를 쓰셨다. 나처럼 청해가 별 볼 일 없는 녀석에겐 그야말로 편리한 대화법이다.
 선생님은 남쪽으론 푸젠에서 태어나시고 서쪽으로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공부하시고 동쪽으로는 일본 부인을 들이시고 북쪽으로는 베이징에서 사시기에 동서남북의 사람으로 불린다. 영어는 물론이요 독일어나 프랑스어도 할 줄 아신다. 하지만 영 차이니즈와 달리 서양 문명을 너무 높게 사진 않는다. 기독교, 공화정체, 기계 만능을 매도하는 건 물론이요 내가 입은 중국옷을 보고 "양복을 입은 건 잘 한 일이다. 단지 아쉬운 건 변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과 대화하길 30분, 여덟아홉 먹은 소녀가 찾아왔다. 부끄러워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 선생님의 따님이실 테지.(부인은 이미 귀적에 이름을 올리셨다.) 선생님이 어깨에 손을 얹고 중국어로 무어라 속삭이니 따님이 작게 입을 열고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져버리거늘……"하고 말한다. 부인께서 생전에 가르쳐줬다 하신다. 선생님은 만족스럽게 웃으셨지만 나는 조금 감상적이 되어 따님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따님이 떠난 후 선생님은 또 나를 위해 돤치루이를 논하고 우페이푸를 논하고 또 톨스토이를 논하셨다.(톨스토이는 선생님께 편지를 쓴 적이 있다고 한다.) 말이 오가면서 선생님께서 크게 흥분하셨는지 눈은 불처럼 빛났고 얼굴은 더더욱 박쥐와 닮아갔다. 내가 상하이를 떠날 때에 존스가 내 손을 잡고 말하길 "자금성을 보더라도 구훙밍을 본 걸 잊지 말라"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존즈의 말은 나를 속인게 되었다. 또 나는 선생님과 논하면서 왜 선생님께선 시사에 분노하시면서 시사에 얽히려 하지 않으시냐 물었다. 선생님이 무언가 빠른 말로 대답하셨는데 아쉽게도 나는 듣지 못 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하고 다시 말하니 선생님은 자못 분한 것처럼 갱지 위에 큰 글자로 적기를 "노, 노, 노, 노, 노……".

 한 시간 후, 선생님의 집을 뒤로하여 도보로 동단패루란 호텔로 향하니 약한 바람이 자귀나무 가로수 사이로 불고 비스듬한 태양이 내 중국옷을 비추었다. 심지어 박쥐와 닮은 선생님의 얼굴은 내 눈앞을 떠날 줄 몰랐다. 나는 큰길로 나와 선생님의 문을 돌아보아――선생님, 부디 저를 꾸짖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늙음을 한탄하기 앞서 아직 어린 저 자신의 행복을 찬미했습니다.
 

셋 스차하이


 나카노 코칸 군이 내게 안내해준 건 베이하이나 완서우산 혹은 천단처럼 누구나 구경하는 게 아니다. 문천상사도 양초산의 고택도 백운관도 영락대종도(이 대종은 반쯤 땅 안에 파묻혀 사실상 공동변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모두 나카노 군의 안내로 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가장 즐거웠던 건 오늘 나카노 군과 보고 온 스차하이의 공원이었다.
 물론 공원이라 해도 정원처럼 꾸며져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커다란 연못 주변에 가렴을 친 찻집이 있는 게 전부이다. 찻집 이외엔 고슴도치니 박쥐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구경거리를 팔던 가게도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이런 찻집에 들어가 나카노 군은 장미술을 홀짝이고 나는 중국차를 마시며 두 시간가량 앉아 있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었는가 하면 딱히 아무 일도 없었다. 단지 사람을 보는 게 재밌었을 뿐이다.
 연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물가를 두른 회화나무나 버들 주변과 앞뒤 찻집에 있는 사람을 보면 물 담배를 문 노인, 머리를 올려 묶은 소녀, 병졸과 이야기하는 도사, 살구 장수한테 값을 깎는 할머니, 인단을 파는 장사치, 순사, 정장을 입은 신사, 만주 깃발을 든 여인――그렇게 세면 끝이 없지만 어찌 됐든 중국 우키요에서 볼 법한 광경이었다. 특히 깃발을 든 여인은 검은 천으로 된 머리인지 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걸 쓰고 뺨을 붉게 칠하고 있는 게 참 고풍스러웠다. 서로 인사를 할 때는 무릎은 굽히되 허리는 굽히지 않고 오른손을 똑바로 땅을 향해 뻗는 게 기이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확실히 이래서야 관국 연회장서 일본 궁녀를 본 로티도 신비한 매력을 느꼈을 법하다. 나는 실제로 그 여인에게 만주풍 인사를 하며 "안녕하세요"하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이 유혹을 견뎌낸 건 적어도 나카노 군의 행복이었을 테지. 우리가 들어 간 찻집을 보면 한가운데에 통나무 하나를 두어 남녀의 동석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는 아이만 반대편에 두고 자신은 이쪽에 앉아 통나무 너머로 과자 등을 먹여주었다. 이래서야 나도 감복한 나머지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가 곧 풍속괴난죄로 경찰이나 치안 기구에 잡혀갈지 모를 일이다. 정말로 중국인의 형식주의는 철저하기 짝이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나카노 군에게 하니 나카노 군은 장미술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천천히 이야기하길 "그야 놀랄만하죠. 환성 철도란 게 있죠? 네, 성벽 주변을 도는 기차 말이에요. 그 철도를 만들 때에는 선로 일부가 성 내부를 돌면 환성이 안 된다면서 일부러 거기만 성벽 안에 다른 성벽 하나를 쌓았다니까요? 정말 엄청난 형식주의에요."
 

넷 호접몽


 하타노 군이나 마츠모토 군과 함께 츠지 쵸카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곤곡 연극을 보았다. 경조 연극은 이따금 본 적이 있으나 곤곡은 처음이었다. 여느 때처럼 인력거를 빌려 좁은 골목을 몇 개나 지난 후에 겨우 동락다원이란 극장에 이르렀다. 붉은 바탕에 금색 문자를 새겨 넣은 낡은 벽돌 건물 현관으로 들어가니――다니 '현관으로 들어가니'라 해도 티켓 같은 걸 사는 건 아니고 본래 중국 연극이란 단지 터덜터덜 현관으로 들어가 극을 본 몇 분 후 돈을 모으러 온 중국 직원에게 정가 입장료를 내는 게 기본이다. 이는 하타노 군의 설명에 따르면 재밌을지 어떨지 모를 연극을 위해 선금을 내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중국적 논리에 따른 일이라 한다. 정말로 우리 관객에겐 좋은 제도라 할 수 있다. 여하튼 현관으로 들어가니 관람석에 놓인 의자에 난잡히 손님이 앉아 있는 건 이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제 본 메이란팡이나 양 사오루를 본 동안시장의 길상다원은 물론이요 그제 여숙암이나  상소운을 본 첸먼우와이의 삼진락보다도 한 층 더 추레해 보일 정도였다. 이런 인파를 지나 2층의 관람석으로 오르니 취기에 얼굴을 붉힌 노인이 있었다. 별갑 비녀에 변발을 묶고 파초선을 손에 들고 배회하고 있다. 하타노 군이 내 귀에 속삭이기를 "저 영감이 한한잔이에요" 나는 곧장 경의를 느끼고 계단 중간에 멈춘 채로 이 늙은 시인을 바라보았다. 아마 당년의 취한 이백도――그런 생각을 한 걸 보면 내게도 아직 문학청년적 감정이, 적어도 국제적으로는 얼마간이나마 남아 있는 듯했다.
 2층 좌석에는 우리보다 먼저 옅은 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은 츠지 쵸카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이 극통 중 극통인 건 중국 배우 중에서도 선생님을 보고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알 수 있을 테지. 양주의 염무관 타카스 타키치 씨는 외국인으로서 양주에 머무른 게 앞으로는 마르코 폴로이며 후로는 타카스 타키치라고 크게 기염을 토했지만 외국인이자 베이징 극통으로 통하는 건 청화산인 츠지 선생님 한 분뿐이리라. 나는 선생님을 왼쪽에, 하타노 군을 오른쪽으로 두고 앉으니(하타노 군도 '중국 극 오백 번'의 저자이다.) "철백구"를 양쪽에 둘 수 있는 것도 아마 오늘 하루에만 주어진 자격일 테지.(추신. 츠지 쵸카 선생님은 한문 '중국극'의 저자이시다. 쥰텐지보에서 출판되었다. 나는 베이징을 떠날 때에 선생님께서 영문으로 된 '중국 연극'의 저자임을 듣고 선생님께 청해 원고를 받아 조선을 거쳐 도쿄로 돌아간 후 두세 출판사에게 출판을 권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출판계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반성해 이 책은 지금 중국 풍물 연구회가 출판하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알린다.)
 그렇게 담배에 불을 붙여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대 정면에 붉은 막이 걸리고 앞에 난간을 두르는 것도 역시 다른 극장과 다를 게 없었다. 그때 원숭이 분장을 한 배우가 나왔다. 무언가를 노래하면서 봉을 붕붕 돌리고 있다. 극 순서에 '화염산'이 있는 걸 보면 물론 이 원숭이는 단순한 원숭이가 아닐 터이다. 내가 어릴 적부터 존경한 제천대성 손오공이다. 오공 옆에는 또 의상을 입지 않고 분칠을 한 거한이 있었다. 삼 척 가량의 부채를 들고 끝없이 오공에게 바람을 보내고 있다. 나찰녀는 아닐 테고 혹여 우마왕인가 싶어 하타노 군에게 살짝 물어 보니 이는 단지 선풍기를 대신해 배우를 부쳐주는 거뿐이란다. 우마왕은 이미 전투에 져서 무대 뒤로 도망친 참이란다. 오공 또한 몇 분 후에는 한달음에 일만팔천 로――실제로는 큰 걸음으로 귀도로 물러났다. 아쉬운 건 한한잔에게 감복한 나머지 화염산 아래의 대살을 놓쳤다는 점이다.
 "화염산" 다음은 "호접몽"이었다. 도복을 입은 선생이 무대를 어슬렁어슬렁 걷는데 '호접몽' 주인공 장자일 터이다. 그리고 또 눈이 큰 미인이 장자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철학자인 아내일 테지. 여기까지는 일목요연하나 이따금 무대에 오르는 두 아이는 무슨 상징인지 알 수 없었다. '저건 장자의 아이들인가요?'하고 또 하타노 군에게 물으니 하타노 군은 살짝 황당하다는 양 "저건 그, 나비입니다."하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나비로는 보이지 않았다. 또 유월의 하늘이니 불나방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지 이미 연극의 줄거리를 알고 있고 등장인물도 알고 있으니 마냥 까막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이제까지 본 예순 개의 중국 연극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건 사실이다. 애당초 '호접몽'의 줄거리란 장자가 갖은 현자처럼 여자의 진심을 의심하기 때문에 도술로 죽음을 위장하고 아내의 정조를 떠본다. 아내는 장자의 죽음을 한탄하며 상복을 입으나 초의 공자가 오자……
 "하오!"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낸 건 츠지 쵸카 선생님이셨다. 나도 물론 '하오!' 목소리에 익숙해진 참이지만 성생님만큼 특색 있는 '하오!'는 들어보지 못 했다. 고금서 마땅한 예시를 찾아보자면 장판파 앞에 선 장비의 일갈에 가까우리라. 내가 놀라서 선생님을 보니 선생님이 어떤 곳을 가리키며 왈, "저기에 '불준괴성규호'라 적혀 있지요? 괴성은 안 됩니다. 저처럼 '하오!'라고 말하는 건 됩니다." 위대한 아나톨 프랑스여. 그대의 인상비평론은 진리일지니. 괴성과 괴성이지 않은 객관적 표준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한 괴성이란――그런 논의는 훗날로 미루고 다시 한 번 '호접몽'으로 돌아오니 초의 공자가 오자 아내는 곧 공자에게 반해 장자를 잊는다. 잊을 뿐 아니라 공자가 갑자기 병에 걸려 인간의 뇌수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알자 도끼를 들고 관을 깨서 장자의 뇌수를 가져오려 한다. 그러자 공자였던 건 본래 나비라서 하늘로 날아가 아내는 재혼을 이루지 못 한다. 되려 악랄한 장자를 위해 기름만 뿌리게 된다. 정말로 천하의 여자에게는 유감이기 따름 없는 풍자극이다――이렇게 말하면 서평 정도는 쓸 수 있을 듯하지만 사실 나는 혼곡이 혼곡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단지 어딘가 경조극보다 화려하단 느낌만 받을 뿐이다. 하타노 군은 "방자는 진강이라 해서요"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으나 분명 쇠귀에 경 읽기였음은 나 스스로도 슬프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또 내가 본 '호접몽'의 역할을 약식으로 기재하면 장자의 아내――한 시치안, 장자――따오 셴티엔 초의 공자――마 만차이, 나비――첸 룬회 등이라 한다.
 "호접몽"을 다 본 후 츠지 쵸카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다시 하타노 군, 마츠모토 군과 인력거에 오르니 초승달이 베이징 하늘에 걸리고 인파로 붐비는 거리 속에 정장 입은 신사와 팔짱을 낀 신시대 여성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저런 사람도 필요해지면 곧――도끼는 들지 않는다 해도 도끼보다 예리한 웃음으로 주인의 뇌수를 가져가려 할 테지. '호접몽'을 만든 사람을 생각하고 옛사람의 염세적 정조관념을 생각한다. 동락원의 2층서 몇 시간이나 쓴 것도 꼭 낭비라고는 할 수 없다.
 

다섯 명승


 완서우산. 자동차로 달려 완서우산에 이르는 도중의 풍경은 사랑하기에 마땅하다. 하지만 완서우산의 궁전천석은 서태후의 악취미를 보기에 충분하다. 버들이 자리한 연못변에 추악한 대리석 놀잇배가 놓여 있다. 이건 또 평가가 좋다고 한다. 돌로 된 배에 감탄한다면 철로 된 군함을 보면 졸도할지 모를 일이다.
 위치안산. 산 위에 폐탑이 있다. 탑 아래에 앉아 베이징 교외를 바라본다. 좋은 광경이다. 완서우산보다 몇 수는 더 앞서 간다. 물론 이 산의 연못에서 만들어지는 사이다는 풍경보다도 더 좋을지 모른다.
 백운관. 홍대위가 비석을 열어 백팔 마군을 열었다는 것이다. 영관전, 옥황전, 사어전 등 모두 회화나무나 자귀나무 속에서 금벽찬란하고 있었다. 더욱이 포도 울타리 너머 주방을 바라보니 이게 평범한 주방이 아니다. "영주옥정"이란 액자 좌우로 금색 글자가 적힌 깃발이 세워져 있는데 "락수공음봉래객, 입미동찬우토가여기서 봉래서 온 손님과 영수 한 모금을 들자, 그리고 저녁은 그 선인의 집에서 먹자"라 되어 있다. 단지 도사도 시대에는 이길 수 없는지 석탄을 열심히도 옮기고 있었다.
 천녕사. 이 절의 탑은 수문제가 세운 것이라 한다. 물론 지금 있는 건 건릉 20년에 중축한 것이다. 탑은 녹색 기와를 쌓기를 열세 층, 지붕 테두리는 하얗고 탑벽은 붉다――이렇게 말하면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폐허로만 보인다. 절은 이미 쇠락한지 오래라서 제비만 날아다니고 있다.
 송균암. 양초산의 고택이다. 고택이라 말하면 풍류가 있어 보이지만 지금은 우체국의 옆골목에 있는 만큼 입구에 군자자중의 요강이 놓여 있어 풍류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다. 기와를 샇고 돌을 쌓은 정원 앞에 동초정이 있다. 정원에는 개옥잠화 화분이 많다. 초산의 "철견담도의 날수저문장철처럼 단단한 어깨에 정의를 짊어매고 말로 담을 수 없는 언어도단의 문장을 남긴다"라고 적힌 비석을 램프 받침으로 쓰는 건 참 우습기 짝이 없다. 뒷 사람이란 게 참 무섭다. 초산이 이 말 뜻을 알까.
 사문절공사. 이 또한 외우사구 경찰서 제일반일 학교 문안에 있다. 물론 어느 쪽이 가주인지는 모른다. 미향당 안에 첩산의 목상이 있다. 목상 앞에 금이 쳐져 있고 종이가 붙어 있다. 또 유리로된 등롱이 있다. 그 외에는 당을 가득 채운 먼지뿐이다.
 요대. 삼문각 아래서 낮잠을 청하는 중국인이 많다. 갈대와 물억새로 가득하다. 나카노 군의 설명에 따르면 베이징의 쿨리는 더운 여름이면 다른 곳으로 돈을 벌러 가고 쿨리의 아내는 그 동안 이 갈대 안에서 몸을 판다고 한다. 시가는 십오 전 내외라는 듯하다.
 도연정. 고리자비정임이 적힌 현판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도연정은 천장을 대나무로 만들어 창문에 녹색 비단을 치고 빈지문에 만자 장자를 올려놓은 간소한 정취가 사랑스럽다. 명물인 정진 요리를 먹으면 새 울음소리가 천상에서 들려온다. 보이한테 저게 무엇이냐 물으니――실은 조심스레 물어보니 뻐꾸기 울음이라 대답했다.
 문천상사. 경사부립 제18국민 고등 소학교 옆에 자리해 있다. 당내에 목상 및 송재상 신국공 문공의 신위란 걸 안치해두고 있다. 이곳도 먼지로 가득 차 있다. 당 앞에 커다란 느룹(?) 나무가 있다. 두소릉이라면 노유행이라는 시라도 만들었을지 모른다. 물론 나는 홋쿠 하나 짓지 못 했다. 영웅의 죽음도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째 죽음은 너무 유감이란 나머지 도무지 시적 감흥이 떠오르지 않는다.
 영안사. 이 절의 선인전은 소방대의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담배를 물고 선인전 위에 서니 자금성의 노란 기와, 천녕사 탑, 미국의 무선 전신주 등이 훤히 보이고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스차하이, 버들, 제비, 연못, 그와 접한 노란 기와 붉은 벽의 대청황제용 소주택.
 천단, 지단, 선농단. 모두 위대한 대리석 바닥에 잡초만 무성하다. 천단 바깥으로 광장으로 나가자 곧장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뭐냐고 물으니 사형을 집행하는 거란다.
 자금성. 이곳은 몽마일 뿐이다. 밤하늘보다도 방대한 몽마일 뿐이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