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이는 3년 전 중국에 놀러 가 장강을 거슬러 올랐을 때의 기행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세상 속에서 3년 전 기행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 여행이라면 필경 갖은 추억은 몇 년 전의 기행이다. 내 문장의 애독자 제군은 '호리카와 야스키치'를 대하듯이 이 '장강'의 한 편에도 힐끔 눈길을 주었으면 한다.
나는 장강을 거슬러 오를 때 끊임없이 일본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에서――찌는 듯한 도쿄서 넓은 장강을 그리워하고 있다? 장강을?――아니, 장강만이 아니다. 우후를, 한커우를, 여산의 소나무를, 동정의 파도를 그리워하고 있다. 내 문장의 애독자 제군은 '호리카와 야스키치'를 대하듯이 나의 이런 추억벽에 힐끔 눈길을 줄 수 없을까.
하나 우후
나는 니시무라 사다키치와 함께 우후의 거리를 걸었다. 이 거리 또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햇살마저 들지 않는 돌길이었다. 양옆에는 은루니 주잔이니 익숙한 간판이 걸려 있지만 한 달 반이나 중국에 머무른 지금 와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일륜차가 지날 때마다 끼릭끼릭 삐걱이는 건 두통마저 느껴지는 듯한 소란스러움이었다. 나는 암담한 표정을 지으며 니시무라가 무어라 말을 걸어도 적당히 대답할 뿐이었다.
니시무라는 나를 불러들이기 위해 몇 번이나 상하이에 편지를 보냈었다. 특히 우후에 도착한 밤에는 일부러 배웅용 소증기선을 보내거나 환영회를 여는 등 이래저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심지어 내가 탄 호요마루는 푸커우에서 출발하는 게 늦어진 탕에 그의 이런 배려를 전부 물거품으로 돌려놓았다.) 그뿐 아니라 그의 사택인 당가화원서 신세를 지게 된 후로도 식사나 옷, 침상 등 모든 방면에서 신경을 써준 건 정말로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손님을 신경 써주는 주인 앞에서는 이틀간의 우후 주재도 유쾌하게 보내야만 했을 터이다. 하지만 내 신사적 예의와 교양도 매미를 닮은 니시무라의 얼굴을 보면 곧장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 이건 니시무라의 죄가 아니다. 예의차리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친한 우리 사이의 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길 한가운데서 오줌을 누는 돼지와 마주했을 때에도 그만큼 불쾌함을 드러내는 일은 자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후는 별 볼 일 없네――아니다一우후만이 아냐. 이제 중국에는 질려버렸어."
"너는 점잔 뜨는 구석이 있으니까. 중국은 성미에 안 맞는 걸지 모르겠다."
니시무라는 영어는 잘 알아도 일본어는 한없이 미숙했다. "점잔 떨다"를 ""점잔 뜨다"로, "닭벼슬"을 "닭볏"으로 "품"을 "풍"으로 "무작정"을 "무작전"으로――그 외에도 틀리는 일본어가 다 꼽으려면 진이 빠질 정도이다. 나라고 니시무라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 온 게 아니니 무뚝뚝한 얼굴을 보인 채로 아무 대답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살짝 폭이 넓은 거리에 여자 사진이 늘어진 집이 있었다. 그 앞에는 한가해 보이는 사람 대여섯 명이 사진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제량소라고 한다. 제량소는 양육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유 폐업한 여자를 보호하는 곳이다.
마을을 한 번 둘러본 후, 니시무라는 나를 의도헌, 일명 대화원이란 가게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이홍장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본 느낌은 홍수 후의 무코지마 주변과 별 차이가 없었다. 꽃과 나무는 적었고 바닥은 황폐했으며 "도당"의 물도 탁했고 건물 안은 휑했다. 음식점하고는 인연이 멀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앵무가 담긴 새장을 바라보면서 맛만은 좋은 중국요리를 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먹고 있을 적부터 중국을 향한 내 혐오감은 되려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날 밤, 당가화원의 발코니에서 니시무라와 등나무 의자에 앉았을 때 나는 바보 같을 정도로 열심히 현대의 중국을 욕했다. 현대의 중국에 무엇이 있는가? 정치, 학문, 경제, 예술 모두 추락하지 않았나? 특히 예술에 이르러서는 가경에서 도광 이후로 하나라도 자랑할만한 작품이 있는가? 심지어 국민은 나이를 불문하고 태평락만 노래하고 있다. 확실히 젊은 국민에게선 조금이나마 활력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도 전국민의 가슴에 울릴만한 위대한 정열이 없는 건 사실이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다. 이 국민적 부패를 목격한 후에도 중국을 사랑할 수 있는 건 퇴폐한 센쥬얼리스트sensualist, 호색가이거나 중국에 얄팍하고 분명하지 못한 취미를 가진 사람뿐이리라. 아니, 중국인 스스로도 마음만 썩어 있지 않다면 우리 같은 일개 여행객보다도 더한 혐오를 느끼고 있을 터이다……
나는 성대히 논했다. 발코니 바깥의 회화나무 가지는 조용히 달빛에 잠겨 있다. 이 회화나무 가지 너머――몇 개의 오래된 연못을 품은 하얀벽의 마을의 끝은 양쯔강의 물이 분명했다. 그 물이 흐른 끝에는 헌이 꿈 꾼 봉래처럼 그리운 일본의 섬과 산이 있다. 아아,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
"너야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잖아."
향수에 감염된 니시무라는 달빛 속에서 멀어지는 커다란 나방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의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온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니시무라를 위한 일이 아니었지 싶다.
둘 소강
나는 소강하는 증기선만 세 척 가량 탔다. 상하이에서 우후까지는 호요마루, 우후에서 주장까지는 난요마루, 주장에서 한커우까지는 타이안마루였다.
호요마루에 탔을 때에는 독특한 덴마크 사람과 같이 가게 되었다. 손님 이름은 로시, 영어로 적으면 Roose였다. 말로는 중국을 종횡하기로 스무 몇 년이라니 당시의 마르코 폴로라 해도 어긋남이 없으리라. 이 호걸은 시간만 나면 나나 같은 배를 탄 다나카 군을 붙들고는 서른몇 피트의 뱀을 퇴치한 이야기나 광동의 도적 랑콰센(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는 루즈 씨도 알지 못했다.) 이야기나 하남 즈리의 기근 이야기, 호랑이와 멧돼지를 잡는 이야기를 하고 또 해주셨다. 그중에서도 재밌었던 건 식탁을 함께 한 미국인 부부와 동서양의 사랑을 논했을 때였다. 이 미국인 부부――특히 아내에 이르러서는 동양을 대하는 서양의 거만함에 굽이 높은 신발을 신겨 놓은 것만 같이 굉장히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말하기론 중국인은 물론이요 일본인도 러브란 걸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의 눈 먼 구석은 애처로워 할 일이라고 한다. 그걸 들은 루즈 씨는 카레 접시를 보며 곧장 이의를 제기했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는 동양인도 알고 있다. 이를테면 사천의 소녀는――그렇게 주특기인 견문을 이야기하자 미국인 여자는 바나나 껍질을 까며 아니, 그건 사랑이 아니다. 단순한 연민pity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루즈 씨는 완고하게 그럼 일본 도쿄의 어느 소녀는――또 그렇게 실제 사례를 내놓기 시작한다. 끝내는 미국인 여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대뜸 식탁에서 벗어나고는 아내와 함께 나가버렸다. 나는 그때 본 루즈 씨의 얼굴을 지금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 노란 동료들에게 사람 나쁜 웃음을 보내며 검지로 이마를 치더니 "Narrow minded!"하고 말했다. 아쉽게도 이 미국인 부부는 난징에서 내렸는데 그대로 계속 소강을 거듭했다면 좀 더 재밌는 파란을 휘몰고 다녔을 게 분명하다.
우후에서 탄 난요마루에선 타케우치 세이호 씨 일행과 함께였다. 세이호 씨도 주강에서 내려 여산을 오를 예정이었으니 나는 자제분――영 우습다. 자제분인 건 분명하나 너무 친근하게 이야기한 탓인지 자제분이라 부르는 게 낯간지럽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 자제분인 이츠 씨와 유쾌하게 소강을 할 수 있었다. 장강이 제아무리 크다지만 결국 바다가 아니니 롤링이나 피칭할 리도 없다. 배는 단지 기계 벨트처럼 흐르는 물을 가르며 유유히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 점만으로도 장강 여행은 배에 약한 내게는 유쾌한 일이었다.
물은 앞서 말한 것처럼 녹슨 금에 가깝게 갈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먼 강기슭은 창공의 반사도 더해지니 칼날색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런 곳을 명성 높은 큰 뗏목이 두 척이고 세 척이고 내려온다. 내가 실제로 본 것 중에도 돼지를 기르던 뗏목이 있었으니 확실히 뗏목이 좀 크면 한 마을을 통채로 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말이야 뗏목이지 지붕도 있고 벽도 있어 사실상 물에 떠있는 집만 같다. 난요마루의 선장인 타케시타 씨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뗏목을 타는 건 원난과 구이저우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런 산속에서 만 리의 탁류에 몸을 맡긴 채로 유유히 강을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저장, 안후이 등의 마을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뗏목에 싣고 온 목재를 돈으로 바꾼다. 그 길은 짧아도 대여섯 개월. 길면 거의 일 년. 집을 나설 때는 아내였던 여자도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되어 있을 법하다. 하지만 장강을 오가는 건 물론 이런 뗏목처럼 원시 시대의 유물뿐이 아니다. 한 번은 미국의 포함 한 척이 소증기선을 표적 삼아 실탄 사격을 하던 때도 있었다.
강이 넓은 건 앞서도 썼다. 하지만 삼각주가 있으니 한 쪽 기슭에는 멀 때에도 반드시 한 쪽에는 풀색이 보인다. 아니 풀색뿐일까. 수전의 벼이삭도 흔들리는 게 보인다. 버들이 물에 자란 게 보인다. 물소가 멍하니 서있는 게 보인다. 푸른 산은 물론 몇 개나 보인다. 나는 중국에 오기 전 코스기 미세이 씨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코세이 씨는 여행지에 가서 주의할 사항으로 이런 말을 해주셨다.
"장강은 물이 낮아서 말야, 양쪽 기슭이 높으니까 배 높은 곳에 올라야 해요. 선장이 있는――뭐라고 해야 하지? 그 높은 곳이 있죠? 거기에 오르지 않으면 전망이 좋지 않아요. 거기엔 평범한 손님은 올려주지 않으니까 선장님께 말을 잘 해서……"
나는 선배가 하는 말이니 호요마루에서도 난요마루에서 강 위의 전망을 보기 위해 시종 선장을 띄어줘야 했다. 하지만 난요마루의 타케시타 선장은 아직 무어라 말을 섞기도 전에 살롱 지붕에 있는 선장실에 친절하게 나를 초대해주었다. 하지만 그곳에 올라 보아도 풍경에 큰 차이는 없었다. 또 갑판에 있어도 육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묘하다 싶어 속셈을 자백하고 선장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선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코즈키 씨가 왔을 때는 정말로 물이 적었던 거지요. 한커우 주변의 수면은 여름과 겨울에 따라 45, 6척가량 차이 난답니다."
셋 여산(상)
어린잎이 자란 나뭇가지에 죽은 돼지 시체가 걸려 있다. 그것도 가죽이 벗겨진 채로 뒷발을 위로 한 채 매달려 있다. 지방에 덮인 돼지의 몸은 꺼림칙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다. 나는 그걸 바라보면서 돼지 한 마리를 거꾸로 매달아 뭐가 재밌는 건지 생각했다. 걸어둔 중국인도 악취미이고 걸려진 돼지도 얼간이가 따로 없다. 중국만큼 하찮은 나라는 달리 찾아 볼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쿨리가 우리의 가마 준비를 해줬는데 성질이 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물론 쿨리 중에 멀쩡한 인상은 없다. 하지만 특히 쿨리의 대장 얼굴이 사납기 짝이 없었다. 과거 Marius the Epicurean는 뱀술사가 쓰는 뱀 얼굴서 인간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다고 한다. 나는 반대로 이 쿨리의 얼굴서 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다. 역시 중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십 분 후, 우리 일행 여덟 명은 등나무 의자의 가마를 타고 돌투성이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행은 타케우치 세이호 일족 및 대원양행의 여주인이다. 가마의 탑승감은 생각보다도 좋았다. 나는 그 가마의 봉에 길게 두 다리를 뻗은 채로 여산의 풍광을 즐겼다. 이렇게 말하면 듣기엔 좋지만 풍광이 절묘할 정도는 아니다. 단지 잡목이 무성한 사이에 병꽃나무가 꽃피어 있을 뿐이다. 여산스러움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이래서야 중국까지 오지 않아도 하코네의 옛길만 올라도 잔뜩 있다.
전날 밤 나는 주강에 머물렀다. 호텔이 바로 대원양행이었다. 그 2층에 누워 강백정 씨의 시를 읽고 있으니 쉰양강에 정박한 중국 배에서 쟈비센 소리가 들렸다. 그건 확실히 풍류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쉰양강에 이어져 허세를 부리고 있어도 역시나 붉게 탁해진 도랑에 지나지 않았다. 풍엽적화추슬슬이란 세련된 정취는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에는 목조 군함 한 척이 세이난 정벌에 사용된 것만 같은 괴이한 대포 포문을 내밀며 비파정 옆에 연결되어 있다. 그럼 서서는 잠시 제쳐두고 낭리백도 장순이나 흑선풍 이규라도 있나 싶었더니 눈앞의 작은 배 안에서는 추악한 엉덩이가 나와 있다. 또 그 엉덩이가 대담히도――굉장히 더러운 이야기다만 유유히 강에 변을 누고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 틈엔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십 분인가 지난 후, 가마가 멈춰 눈을 뜨자 우리의 코앞에는 돌계단을 엉망진창으로 쌓아 올린 험난한 언덕이 자리해 있었다. 대원양행의 여주인은 저기는 가마로 오르지 못하니 걸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는 도리 없이 타케우치 세이호 씨와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풍경은 여전히 평범했다. 단지 언덕의 좌우서 염천의 먼지를 뒤집어 쓴 야생 장미의 꽃이 보이는 게 전부였다.
가마에 타고 또 걷고. 하나같이 뼈가 나갈 듯한 고생을 반복한 후에 겨우 구령의 피서지에 이른 건 이래저래 오후 한 시가량 되었을 적이었다. 또 이 피서지의 일각이란 게 카루이자와의 변두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아니, 벗겨진 산기슭에 중국 램프 가게나 주잔 따위의 가게가 나와 있는 경치는 카루이자와보다도 한 층 더 하등하다. 서양인의 별장도 둘러보지만 그럴싸한 건물은 한 척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두 뜨거운 햇살에 붉은색이나 푸른색 페인트를 바른 추한 아연 지붕을 태우고 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이 구령의 조계를 개척한 목사 에드워드 리틀 선생께서도 평생을 중국서 계셨으니 점점 아름답고 추한 것의 구분이 가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가자 엉겅퀴나 제충국 사이에 병꽃나무가 싱싱한 꽃을 피운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초원이 끝나는 부근 쯔음에 돌 울타리를 두른 작고 붉게 칠한 집 한 척에 바위투성이 산을 뒤로한 채 일장기를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이 깃발을 볼 때마다 조국을 생각했다――좀 더 정확히는 조국의 쌀밥을 생각했다. 왜냐면 그 집이야말로 우리의 공복을 채워줄 대원양행의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넷 여산(하)
밥을 다 먹고 나니 불쑥 찬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괜히 해발 삼천 척이 아닌 걸 테지. 확실히 여산은 재미 없다손 쳐도 이 오 월의 추위만은 보기 드물다고 해야겠지. 나는 창가쪽 긴 의자서 바위산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여산이 가진 피서지적 가치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건 대원양행의 주인이었다. 주인은 이미 쉰이 넘었으리라. 하지만 붉은 기가 감도는 얼굴은 에너지로 가득 찬 듬직한 활동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이 주인을 상대로 여산의 이야기를 했다. 주인은 굉장히 웅변가였다. 혹은 지나치게 웅변가인 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한 번 흥이 오르면 백락천이란 이름을 백락으로 줄여버리니 그것만으로도 호쾌하다 봐야겠다
"향로봉이란 게 둘 있어요. 이쪽은 이백의 향로봉, 이쪽은 백락천의 향로봉――이 백락의 향로봉은 소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인데……"
대강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낫다. 아니 향로봉이 두 개 있다는 건 되려 우리에겐 편리한 일이다. 하나 밖에 없는 걸 둘로 만드는 건 특허권을 무시한 죄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둘 있는 건 설령 세 개로 만든다 해도 불법 행위는 되지 않을 터이다. 그러니 나는 저 너머서 보이는 산을 곧 '내 향로봉'으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주인은 웅변 이외에 여산을 연인처럼 보며 뜨거운 애착을 품고 있었다.
"이 여산이란 곳은 말입니다 삼첩천처럼 오래된 명소가 많은 산이지요. 그러니 한 번 둘러보려면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 못해도 열흘은 있어야 돼요. 아니면 한 달도 반 년도――다만 겨울엔 호랑이가 나오는데……"
이런 '제2의 애향심'은 주인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국에 머무는 일본인은 대개 가지고 있다. 아무리 중국 여행에 유쾌해지지 못하는 사람도 도적을 만나는 위험을 감수할지라도 그들의 "제2의 애향심"만은 존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하이의 대마로는 파리만 같다. 베이징 문화전은 루브르 박물관처럼 위작은 한 장도 없다――그렇게 감탄해야만 한다. 하지만 여산에 일주일이나 있는 건 단순히 감탄하는 것보다도 훨씬 힘든 일이다. 나는 먼저 머뭇머뭇 주인에게 나의 병약함을 호소하여 가능하면 내일 아침에는 내리고 싶단 요지를 전했다.
"내일 가시게요? 그럼 아무것도 못 볼 텐데."
주인은 반쯤 연민하듯 또 반쯤 비웃듯이 내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걸로 포기해줄 거라 생각했더니 이번에는 한 층 더 열심히 "그럼 이틈에 가까운 곳을 보고 오시죠"하고 권하기 시작했다. 이마저 거절하는 건 호랑이 퇴치에 나서는 것보다도 위험하다. 나는 도리 없이 타케우치 씨 일행과 함께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을 구경하러 나섰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구령의 마을은 이곳에서 벗어나 한 달음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한 달음이다 두 달음 정도가 아니었다. 길은 산대나무로 무성한 가운데 굽굽이 굽어진 오르막길을 이루고 있다. 나는 어느 틈엔가 헬멧 아래서 땀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천하의 명산에 대한 분노를 새로 느꼈다. 명산, 명화, 명인, 명문――'명'자가 들어가는 갖은 이름은 자아를 중요시하는 우리를 전통의 노예로 삼는다. 미래파 화가는 대담히도 고전적 작품을 파괴하라고 말했다. 고전적 작품을 파괴하는 김에 여산 또한 다이너마트의 불로 날려버리면 족했다……
하지만 겨우 도착하자 산바람에 우는 소나무 사이서, 바위산을 두른 눈앞의 계곡서 붉은 지붕이나 검은 지붕 같은 게 무수히 연이어진 모습은 생각보다도 좋은 광경이었다. 나는 길바닥에 주저 앉아 소중히 주머니에 비축해둔 일본의 '시키시마'에 불을 붙였다. 레이스를 걸어둔 창문도 보인다. 화분을 둔 발코니도 보인다. 푸른 잔디가 깔린 테니스 코트가 보인다. 백락의 향로봉은 어찌 되었든 피서지인 구령은 여름을 해소하기엔 충분한 모양이었다. 나는 타케우치 씨 일행이 앞으로 척척 나아간 후에도 멍하니 담배를 문 채로 희미하게 그림자갑 ㅗ이는 집들의 창을 내려다 보았다. 언젠가 도쿄에 두고 온 아이의 얼굴 따위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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