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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예술과 그 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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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란 무엇보다도 작품의 완성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에 봉사하는 게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를테면 인도적 감격일지라도, 그것만 추구한다면 단순히 설교를 듣는 정도로도 얻을 수 있을 터이다.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의 작품에 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적 감격이어야 한다. 그건 오로지 우리가 작품을 완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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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을 위한 예술은 자칫 엇나가면 예술 유희설로 추락한다.
 인생을 위한 예술은 자칫 엇나가면 예술 공리설로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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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이란 읽는데 문제가 없는 작품을 갖추는 게 전부가 아니다. 분화발달한 예술상 이상을 제각기 완벽히 실현시키는 일이다. 그런 게 항상 불가능해서야 그 예술가는 부끄러움을 느껴 마땅하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란 그 완성의 영역이 가장 대규모인 예술가이다. 예를 들자면 괴테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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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인간은 자연이 쥐여준 능력상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나태해지면 그 한계의 위치마저 알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모두가 괴테가 될 생각으로 정진할 필요가 있다. 그런 걸 겸연쩍어 해서야 몇 년이 지나도 괴테 가문의 마부조차 될 수 없다. 물론 앞으로 괴테처럼 되겠다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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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예술적 완성을 향해가려 할 때, 무언가 우리의 정진을 방해하려는 게 있다. 근시안적인 안일함일까.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건 좀 더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이다. 마치 산에 오르는 사람이 높은 곳에 이름에 따라 묘하게 구름 아래에 자리한 기슭이 그리워지는 것과 같다. 그런 말로도 통하지 않는다면――그 사람은 이미 내게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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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뭇가지 위 한 마리 모충은 기온, 날씨, 조류 등의 수많은 적 탓에 끊임없이 생명의 위기에 처한다. 예술가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모충과 같은 위험을 넘겨야 한다. 개중에서 특히 두려워할 것이 정체다. 아니, 예술의 경지에 정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한다. 예술가가 퇴보할 때, 항상 일종의 자동 작용이 시작된다. 그 뜻이란 같은 작품만 쓰게 되는 것이다. 자동 작용이 시작되면 예술가로서 죽음에 이르렀다 생각해야만 한다. 나 자신 또한 '용'을 쓸 때에는 명백히 이런 종류의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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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올바른 예술관을 가졌다 하여 필시 좋은 작품을 쓴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씁쓸함을 느끼는 건 오로지 나 하나뿐일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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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 시작이고 형식은 끝이다.――그런 이야기가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작품의 내용이란 필연적으로 형식과 하나가 된다. 먼저 내용이 존재하고 형식은 뒤늦게 따라온다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창작의 진제眞諦[각주:1]에 맹목적인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면 알 수 있다. 입센의 '유령' 속에서 오스왈드가 '태양을 달라'고 말한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태양을 달라'는 말은 무엇이랴. 과거에 츠보우치 박사가 '유령'을 해석할 적에 그 대사를 '어둡다'고 번역한 적이 있다. 물론 '태양을 달라'와 '어둡다'는 이론상으론 동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상으로는 맞물리지 않는다 그 '태양을 달라'는 장엄한 말의 내용은 전적으로 '태양을 달라'는 형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어 전체를 정확히 포착하는 점이 입센의 위대한 점이다. 호세 에체가라이가 '돈 후안의 아들' 서문에서 격찬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 말의 내용과 말 안에 담긴 추상적인 의미를 혼동해서는 곳곳에서 잘못된 내용 편중론이 나오고 만다. 내용을 솜씨 좋게 꾸민 게 형식이 아니다. 형식은 내용 안에 담겨 있다. 혹은 그 반대이다. 이 미묘한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사람에게 예술이란 영원히 닫힌 책에 지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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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표현으로 시작되어 표현으로 끝난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 시를 짓지 않는 시인 같은 말은 비유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 하는 말이다. 하얗지 않은 백묵보다도 더 어리석은 말이라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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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잘못된 형식 편중론을 추종하는 건 재해이다. 아마 잘못된 내용 편중론을 추종하는 것보다 실제적으론 더 큰 해가 되리라. 후자는 적어도 별이 아닌 운석을 부여할 따름. 전자는 반딧불을 보고도 별로 여기리라. 실질, 교육, 그리고 다른 점에서 내가 항상 경계하는 건 이런 잘못된 형식 편중론자의 갈채 따위에 들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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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심독할 때에 우리는 흔히 그 위대한 압도되어 다른 작가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마치 태양을 보던 사람이 눈을 돌리니 주위가 어둡게 보이 듯이. 나는 처음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었을 때 다른 러시아 작가를 얼마나 경멸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옳지 못 한 일이다. 우리는 태양 이외에 달도 별도 존재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괴테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탄복할 적에도 바티칸의 라파엘을 경멸하는데 주저할만한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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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는 비범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악마에게 혼을 팔 필요도 존재한다. 이건 물론 나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보다 어렵지 않게 할 법한 사람도 있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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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 온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다. "흠집 잡을 수 없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명한 비판가가 그 흠집이 일반에 승인될 법한 기회를 잡는 일이다. 그렇게 그 기회를 이용해 그 작가의 장래까지 교묘히 저주하는 일이다. 그런 저주에는 이중의 이익이 있다. 세간에도, 그 작가 스스로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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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앎과 모름은 언전言詮[각주:2]과 분리되어 있다. 수온은 직접 마셔 알 수밖에 없다고 한다. 예술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미학의 혼을 읽어 비평가가 될 수 있다 여기는 건 여행안내서만 읽으면 일본 어디를 가도 헤매지 않는다 여기는 꼴이다. 그럼에도 세간은 속아 넘어갈지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는――아니 분명 세간도 산타아냐만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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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예술상의 갖은 반항 정신에 동정한다. 설령 그것이 때로는 나 스스로를 향한 것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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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활동은 어떤 천재라도 의식적인 법이다. 그 뜻이란 여운림이 석상의 소나무를 스릴 적에 소나무 가지를 끝도 없이 한 방향으로 뻗는다 치자. 그때, 그렇게 뻗은 소나무 가지가 화면에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여운림 본인도 알지 못 한다. 하지만 뻗기에 어떤 효과가 생긴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만약 알지 못 한다면 여운림은 천재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자동인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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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적인 예술 활동이란 제비의 자장가를 다르게 부를 뿐이다. 때문에 로댕은 영감을 경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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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 세잔은 들라크루아가 적당한 곳에 꽃을 그렸단 비평을 듣고 화가 나서 반대한 적이 있다. 세잔은 단지 들라크루아를 말할 셈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반대 중에는 세잔 본인의 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예술적 감각을 줘야할 어떤 필연의 법칙을 얻기 위해서는 백한백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세잔의 면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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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필연적인 법칙을 활용하는 게 소위 기교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기교를 경멸하는 건 애초에 예술을 알지 못 하거나, 기교란 말을 나쁜 의미로 쓰거나 둘 중 하나이다. 나쁜 의미로 쓸 때에 안 된다 안 된다 고집을 부리는 건 채식을 인색의 별명이라 여기며 세상 모든 채식주의자를 인색한이라 부르는 꼴이다. 그런 경멸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모든 예술가는 싫어도 기교를 갈고닦기 마련이다. 여운림을 다시 예로 들어 보자면 어떤 효과를 내기 위해 소나무 가지를 한 쪽으로 뻗는 걸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영혼으로 쓴다. 생명으로 쓴다. ――그렇게 치장한 말은 중학생에게만 설교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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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함은 위대하다. 하지만 예술의 단순함이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단순함이다. 쥐어짜고 또 쥐어짜 내 얻은 단순함이다. 그 단순함을 얻을 때까지 어느 정도의 창작적 고생을 거듭해야 하는가. 이런 걸 깨닫지 못 하는 자는 육십겁의 변천을 지나 보내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떠들어대며 데모스테네스 이상의 웅변이라 자아도취하리라. 그런 가벼운 단순함보다는 차라리 복잡한 쪽이 더 단순함에 가까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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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건 기교가 아니다. 기교를 구사하는 잔재주이다. 잔재주는 부족한 진지함을 얼버무리기 쉽다. 부끄럽지만 내 나쁜 작품 중에는 그런 재주만으로 이루어진 작품도 섞여 있다. 이건 아마 나의 어떠한 적이라도 기꺼이 인정할 진리리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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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안주하려는 성질은 그럴싸하게 돌아보고 있다며 고집을 풍류의 일종으로 추락시킬 우려가 있다. 이 성질을 떨쳐내지 않는 한, 나는 남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내가 믿는 걸 확실히 해 자타에 대한 고집에도 껍질이 생기는 걸 막아가야만 한다. 내가 이렇게 떠들 생각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나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가라앉을 때가 다가온 듯하다.

 

 

  1. 진실(眞實)하여 잘못이 없음. 평등(平等) 무차별(無差別)의 이치(理致). 출세간(出世間)의 법(法 [본문으로]
  2. 언어로 표현함. 언어로 설명함. 분별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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