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당은 정치이다. 그리고 정치는 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당도 힘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발명된 기계인 걸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힘이 의지하는 건 역시 '다수'란 점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치의 경우엔 이백 표보다도 삼백 표가 절대적인, 그야말로 신의 심판이라도 받은 듯한 승리가 될지라도 문학의 경우엔 조금 다른 듯하다.
고고孤高. 그건 과거부터 아첨의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 아첨을 받는 사람을 보면 단순히 불쾌한 사람으로 누구도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하는 기질의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리고 소위 '고고'한 사람은 괜히 말을 꼬아서 '무리'를 매도한다. 왜 무리 짓는지 이해하지 못 한다. 단지 '무리'를 매도하여 자신의 소위 '고고'함을 자랑하는 게 외국서도 일본서도 과거의 위대한 사람들이 '고고'했다는 전승에 편승하여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도 보인다.
'고고'라 자칭하는 사람은 주의해야 한다. 애당초 그건 아니꼬운 것이다. 거의 예외 없이 "폭로 당한 타르튀프"이다. 이 세상에선 도저히 '고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독하다는 건 있을 수 있다. 아니 되려 '고저孤低'한 사람이 많은 듯하다.
내 현재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좋은 친구는 바라지 않지만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는다면 '고저'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도 거짓말로 나는 내 나름대로 '도당'의 괴로움이 예감되어 있어 되려 '고저'를 고르는 게 그야 결코 좋지는 않아도 되려 그 편이 사는 게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구태여 교우 관계를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또 '도당'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내게(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가장 괴로운 건 '도당'의 일원에게 바보 같은 걸 바보 같다고 못 하고 되려 절찬해야 한다는 의무의 부담 때문이다. '도당'이란 옆에서 보면 소위 '우정'으로 이어져 똘똘 뭉쳐, 같은 식으로 표현하면 미안하지만 응원단 박수처럼 걸음이나 입을 맞추지만 실제로 가장 증오하는 건 같은 '도당' 속에 있는 인간이다. 되려 내심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당'의 적 중에 있는 법이다.
자신의 '도당' 안에서 내키지 않는 녀석만큼 어쩌기 곤란한 것도 없다. 그건 평생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씨앗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새로운 도당의 형식, 그건 동료끼리 태연히 배신하는 걸로 시작될지 모른다.
우정, 신뢰. 나는 그런 걸 '도당' 안에서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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