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엔에 쿠와테이의 산수화를 사와 서재의 토코노마에 걸어두었더니 놀러 온 남자가 그 앞에 서서 "위작 아닌가."하고 경멸했다. 타키타 쵸인 군도 위아래로 훑고는 "이건 아니죠."하고 한 소리 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본래 수상한 그림을 찾아내는 걸 무명의 천재에게 경의를 다 하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쿠와테이라 걸어둔 게 아냐. 그림의 완성도가 좋아서 걸어둔 거지."하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산수화를 위작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기 싫어서 하는 소리라 맹단했다. 그뿐 아니라 몇몇은 "그래, 무명 천재는 싸게 먹혀서 좋지."하고 말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래서야 아무리 나라도 3엔의 쿠와테이를 위해 조금은 변호를 할 수밖에 없다.
애당초 감정가란 양반들은 흔히 돋보기를 들이밀며 우리 아마추어를 겁주지만, 그들이 진위 여부를 얼마나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도 인간인 이상은 전지전능이 아닐 터인데. 하물며 그들이 판단을 내려야 할 건 그림의 진위이다. 혹은 진위 확인을 거들어 줄 기교이다. 하지만 진위니 기교니 하는 검정이 객관적 표준 규정을 항상 따르고 있을 리가 없다. 이를테면 낙관이니 기법 내지는 종이나 먹 같은 물질적 재료를 교묘히 흉내 내면 그 진위를 검정하는 건 사실상 일종의 직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사실로 귀결되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예민한 직감을 지녀본들, 단지 과거의 아무개 작가나 아무개 화가가 책이나 그림을 만들었단 사실에만 문제를 조명하면 검정가는 점술사라도 겸직하지 않은 이상 도저히 구분해내지 못 할 터이다. 실제로 요전 번에도 작가 본인이 아무개 남자가 만든 위작을 구분해내지 못 했다 하지 않은가. 또 그만큼 교묘함을 갖춘 위작이 아니더라도, 감정가에게 양심이 있는 한 진품인지 가품인지 결정 내릴 수 없는 중간색의 그림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관점에서는 검정가는 어떤 종류의 서적이나 그림에 한해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진위 판단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3엔의 쿠와테이를 보면, 결코 쿠와테이라 단언할 수 없더라도 마찬가지로 쿠와테이가 아니란 단언도 불가능할 터이다. 그런 마당이니 이걸 쿠와테이라 인정하며 벽에 걸어두었다 한들, 내 명예가 실추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나는 단지 무명 천재에게 경이를 표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변명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그래그래, 이제 그 무명 천재 소리는 질린다"하고 말했다. 질린다면 여기서 끊겠지만 세간에는 나처럼 수상쩍은 책이나 그림을 가지고 놀며 무명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새 그림에 거금을 던지는 걸 주저하지 않는 천하의 부호에 비하면 적어도 취미의 독립이란 점에선 존경해 마땅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과 함게 진위의 차별에 휘둘리지 않는 결백한 취미의 존재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니 여기에 더 이상의 말을 활자로 삼는 건 자제하겠다. 단지 질 나쁜 걸 파는 골동품점이 광고로 써먹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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