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 나는 어떤 사람을 찾기 위해 요코하마의 산길을 걸었다. 주변은 지진 당시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다면 슬레이트 지붕이나 벽돌벽의 잔해 속에 명아주가 자라고 있단 점뿐이었다. 실제로 어떤 집의 잔해에는 뚜껑 열린 피아노마저 반쯤 벽에 떠밀린 채 맨질히 건반을 적시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크고 작은 악보 또한 살짝 색이 물든 명아주 속에서 복숭아색, 물색, 옅은 노란색 등의 서양 문자가 적힌 표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내가 찾은 사람과 복잡한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나는 밤이 되어서야 겨우 그 사람의 집을 뒤로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는 약속을 잡고 나서야 가능했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더군다나 달도 바람 부는 하늘에서 이따금 빛나고 있었다. 나는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담배를 피울 수 없는 간선 전철은 내게는 금물이었다) 되도록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자 대뜸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쳤다'기보다는 오히려 만졌다 해야 좋을 소리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며 황량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아노는 마침 달빛에 길고 얇은 건반을 살며시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명아주 속 피아노는――하지만 인기척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소리였다. 하지만 피아노임이 분명했다. 나는 살짝 꺼림칙해져 다시 한 번 빠른 발걸음으로 걸었다. 그때 내 뒤에 있던 피아노는 분명 희미하게 소리를 냈다. 나는 물론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나를 배웅하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 피아노 소리에 초자연적 해석을 덧붙이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주의자였다. 그래, 인기척이야 없었지만 무너진 벽 주변에 고양이라도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고양이가 아니라면――나는 그 외에도 족제비나 두꺼비 따위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피아노를 울린 건 신기한 일이었다.
다섯 날이 지난 후, 나는 같은 용건으로 같은 길을 걸었다. 피아노는 여전히 명아주 안에 있었다. 복숭아색, 물색, 옅은 노란색 등의 악보가 흩어져 있는 것도 여전했다. 단지 오늘은 그 둘은 물론이요 무너진 벽돌이나 슬레이트도 가을볕에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악보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 건반의 상아도 광택을 잃고 뚜껑의 칠도 벗겨져 있었다. 특히 다리에는 새우와 비슷한 덩굴마저 감겨 있었다. 나는 그 피아노를 앞에 두고 실망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다.
"애초에 이게 울리기나 하는 걸까."
나는 그런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피아노는 그 박자에 작은 소리를 냈다. 거의 나의 의혹을 타이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작은 웃음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피아노는 지금도 햇빛에 태연히 건반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위에는 어느 틈엔가 밤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길가로 돌아온 후 다시 한 번 폐허를 돌아보았다. 겨우 알아차린 밤나무는 슬레이트 지붕에 떠밀린 채로 비스듬하게 피아노를 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저 명아주 속의 피아노를 보았다. 작년의 지진 이후로 남몰래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피아노를.
'고전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날의 밤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4 |
---|---|
교정 후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4 |
검정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4 |
겨울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사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