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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사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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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잠자리에 누워도 무언가 책을 읽지 않으면 잠들지 못 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는 아무리 책을 읽어도 잠에 들지 못 하는 경우마저 자주 있다. 그런 내 머리맡에는 항상 독서용 전등이나 아달린[각주:1] 따위가 놓여 있다. 나는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두세 권의 책을 모기장 안으로 들고 가 머리맡의 전등을 밝혔다. 
 "몇 시야?"
 옆에서 먼저 자고 있던 아내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 시."
 "벌써? 난 한 시 밖에 안 된 줄 알았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는 그 말에 어울려주지 않았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조용히 자."
 아내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작은 목소리로 쿡쿡 웃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머리에 코를 묻고는 조용히 잠들었다.
 나는 아내 쪽을 바라보며 설교인연제수초란 책을 읽었다. 이건 교호 시절의 스님이 일본, 중국, 인도의 이야기를 모아 여덟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하지만 재밌는 이야기는 물론이요 보기 드문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나는 군신, 부모, 부부와 오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에 서서히 수면기를 느꼈다. 그렇게 머리맡의 전등을 끄고 바로 잠에 들어 버렸다.
 꿈속의 나는 찌는 듯이 더운 거리를 S와 함께 걷고 있었다. 모래가 깔린 길의 폭은 겨우 한 첩이나 구 척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에 어느 집이나 똑같은 카키색 천막을 치고 있었다.
 "자네가 죽을 줄은 몰랐는데."
 S는 부채질 하면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일단 유감은 느껴도 그런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싫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네는 오래 살 줄 알았어."
 "그런가?"
 "우리는 다들 그렇게 말했지. 으음, 나보다 다섯 살 어렸지?" S는 손가락을 접어 보고는 "서른넷? 서른넷에 죽어버리다니"――그러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딱히 죽음을 아쉽게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S의 앞이라 그런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일도 하다 말았을 거 아냐."
 S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 조금 긴 걸 쓰고 있었지."
 "제수씨는?"
 "잘 지내. 애도 요즘 들어선 잔병치레도 없고."
 "그거 다행이네. 나 같은 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나는 잠시 S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S는 역시 자신은 죽지 않고 내가 죽은 걸 기뻐하고 있다――그런 게 똑독히 느껴졌다. 그러자 S도 순식간에 내 기분을 이해했는지 불쾌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동안 말없이 걸은 후, S는 부채로 햇살을 가린 채로 커다란 통조림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그럼 난 실례하지."
 통조림 가게는 어두컴컴한 가운데 백국이 몇 개인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가게를 힐끔 보았을 때, "그래, S의 집은 아오키도의 지점이었지."하고 생각했다.
 "자네는 지금 아버지와 있나?"
 "그래, 얼마 전부터."
 "그럼 또 보지."
 나는 S와 헤어진 후 곧장 옆길로 빠졌다. 옆길 골목의 창에는 오르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오르건은 내부가 보이도록 측면의 판이 빠져 있었고, 그 내부에는 대나무통으로 빼곡했다. 나는 그걸 보고 "그래, 대나무통이어도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렇게――나는 어느 틈엔가 우리집 앞에 서있었다.
 낡은 문이나 검은 울타리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문 위의 벚나무 가지마저 어제 본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새로운 푯말에는 "쿠시베구"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푯말을 보았을 때, 정말로 자신이 죽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문을 넘는 건 물론이요 현관을 지나 안에 들어가는 것도 조금도 나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아내는 거실의 엔가와에 앉아 대나무 갑옷을 만들고 있었다. 그 탓에 아내의 주변은 마른 대나무 껍질투성이였다. 하지만 무릎 위에 얹은 갑옷은 아직 쿠사즈리[각주:2]와 몸뚱어리 밖에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애는?" 나는 앉자마자 물었다.
 "어제 큰어머니나 할머니랑 같이 쿠게누마에 갔어요."
 "할아버지는?"
 "할어버지는 은행 가셨겠죠."
 "그럼 아무도 없는 건가?"
 "네, 저와 정적뿐이죠."
 아내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나무 가죽에 바늘을 꽂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서 아내의 거짓을 느껴 살짝 언성을 높였다.
 "쿠시베구란 푯말을 봤는데?"
 아내는 놀라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혼이 날 때면 항상 짓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걸었지?"
 "네."
 "그럼 그 사람도 있는 거고?"
 "네."
 아내는 의기소침해져 대나무 갑옷만 만지작거렸다.
 "있는 걸 뭐라 하는 게 아냐. 나는 이미 죽어버렸고――"
 나는 반쯤 나 자신을 설득하듯 말했다.
 "너도 아직 젊으니까 그런 일로 뭐라 하지는 않겠어. 단지 그 사람만 제대로 돼먹었으면……"
 아내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본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됐음을 느꼈다. 동시에 또 자신의 얼굴색 또한 혈기를 잃어가는 걸 느꼈다.
 "제대로 돼먹은 사람이 아닌 거군?"
 "저는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하지만 아내도 쿠시 아무개한테 경의를 지니지 않는다는 걸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그런 것과 결혼한 걸까? 그런 건 용납하더라도 아내는 쿠시 아무개의 추잡한 부분에 되려 편안함 따위를 느끼고 있다――나는 그 사실에 배 안쪽에서 올라오는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아버지라 부를만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해도……"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어."
 아내는 내가 성을 높이기 전부터 소매로 얼굴을 감추고 어깨를 벌벌 떨었다.

 "어떤 바보 자식이야! 이래서야 죽어도 죽을 수 없잖아."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그러자 서재의 상인방 위에 갈고랑이 하나가 걸려 있었다. 갈고랑이의 자루는 흑색과 적색의 옷으로 소용돌이치듯 칠해져 있었다. 누가 이걸 손에 쥔 적이 있다――나는 그런 사실을 떠올리면서 어느 틈엔가 서재도 무엇도 아닌 나무 울타리가 쳐진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길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에 깔린 석탄재는 안개비인지 이슬인지에 젖어 투명하게 비쳤다. 나는 아직 분노가 풀리지 않은 걸 느끼며 되도록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나무 울타리가 내가 걷는 길을 따라 한없이 이어질 따름이었다.
 나는 스스로 눈을 떴다. 아내나 아이는 여전히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밤은 이미 걷혀 가는 듯했으며, 묘하게 스며드는 매미 울음소리가 어딘가 먼 나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일(실은 오늘) 피곤해질 게 겁나 다시 잠에 들려 했다. 하지만 간단히 잠에 들지 못 하는 건 물론이요 방금 꾼 꿈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꿈속의 아내는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S는 실제로도 그럴지 모른다. 나도――나는 아내에게 굉장한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특히 나 자신을 꿈속의 나와 동일 인격이라 생각하면 가장 무서운 이기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꿈속의 나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는다. 나는 잠에 들기 위해서, 또 한 편으로는 병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 피하기 위해서 0.5 그램의 아달린을 먹어 어두운 잠에 들어버렸다.

 

 

 

 

  1. 수면·진정제의 일종(무취의 흰 가루) [본문으로]
  2. 갑옷 허리에 늘어뜨려 대퇴부를 보호하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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