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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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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감을 내일로 앞둔 오늘 밤, 단숨에 이 소설을 쓰려고 한다. 아니, 쓰려고 한다가 아니다. 써야만 한다. 그럼 뭘 쓰는가――그건 이어지는 본문을 읽어주셨으면 한다.

       ―――――――――――――――――――――――――

 칸다 신보쵸 부근에 자리한 한 카페에 오키미 씨라는 여직원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인가 열여섯 먹었을까. 외견은 좀 더 어름스럽다. 일단 색이 하얗고 눈이 맑으니 코 끝이 살짝 위를 향해 있더라도 일단 미인으로 쳐줄 수 있다. 그런 오키미 씨가 머리를 한가운데서 갈라 물망초 비녀를 하고 하얀 앞치마를 입은 채 자동 피아노 앞에 서있는 모습은 마치 타케히사 유메지 군의 그림 속 인물이 뛰쳐나온 것만 같다――그런 이유로 이 카페 단골 사이에선 일찍부터 통속소설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물론 별명은 달리도 있었다. 비녀의 꽃에서 따와서 물망초. 활동 사진에 나오는 미국 배우와 닮아서 미스 메리 빅포드. 이 카페에 빠질 수 없으니까 각설탕. ETC, ETC.
 이 가게에는 오키미 씨 이외에도 연상의 여종업원이 하나 있다. 이 사람은 오마츠 씨라고 해서 외모로는 도저히 오키미 씨를 이길 수가 없다. 밀빵과 호밀빵 정도로 차이가 있다. 그러니 같은 카페에 근무하고 있음에도 둘이 받는 팁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오마츠 씨는 물론 이 수입 차이가 불만이었다. 그런 불만이 쌓이다 보니 요즘 들어 부쩍 유치해져 갔다.
 어느 여름의 오후, 오마츠 씨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은 외국어 학교 학생이 담배를 입에 물며 성냥불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옆 테이블에서 선붕기가 기세 좋게 도는 탓에 성냥불은 닿기도 전에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 때문에 그 옆 테이블을 지나던 오키미 씨는 한동안 바람을 막기 위해 손님과 선풍기 사이에 발을 멈추었다. 그 사이에 불을 옮긴 학생은 햇살에 탄 뺨에 웃음을 지으며 "고마워"하고 말했다. 오키미 씨의 친절함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자 카운터 앞에 서있던 오마츠 씨가 그 테이블에 내놓아야 하는 아이스크림 접시를 들고는 오키미 씨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네가 가져 가"하고 짜증을 부렸다――
 이런 갈등이 일주일에 몇 번은 있다. 따라서 오키미 씨는 오마츠 씨와 좀처럼 말을 섞지 않았다. 항상 자동 피아노 앞에 서서는 장소 특성상 많은 학생 손님에게 무언의 애교를 팔고 있다. 혹은 뿔이 단단히 난 오마츠 씨에게 무언의 시샘을 사고 있다.
 하지만 오키미 씨와 오마츠 씨의 사이가 안 좋은 게 비단 오마츠 씨의 질투 때문만은 아니다. 오키미 씨 또한 내심 오마츠 씨를 취향이 볼품없는 여자라며 경멸하였다. 학교를 나온 이후로 나니와부시를 듣거나 미츠마메를 먹거나 남자 뒤꽁무니만 쫓은 탓이 분명하리라. 오키미 씨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그럼 그 오키미 씨의 취향은 어떠한가. 그건 이 북적거리는 카페를 한동안 벗어나 근처 골목 안쪽에 자리한 어느 여자 이발소 2층을 들여다 보면 된다. 왜냐면 오키미 씨는 그 이발소 2층을 빌려 카페에 근무할 때 이외엔 항상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2층은 천장이 낮은 6첩방으로, 서쪽해가 들어오는 창밖을 보아도 벽돌 지붕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창가쪽 벽에는 친즈 천이 덮인 책상이 놓여 있다. 물론 이건 편의상 책상으로 부를 분이지 실재로는 낡은  티 테이블에 지나지 않는다. 그 티 테――책상 위에는 역시나 살짝 낡은 서양식 제본 서적들이 놓여 있다. "불여귀", "토손 시집", "마츠이 스마코의 일생", "신 나팔꽃 일기", "카르멘", "높은 산에서 계곡을 보면"――그 외엔 부인 대상 잡지가 일곱여덟 권 정도 있을 뿐으로 아쉽게도 내 소설집 따위는 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또 그 책상 옆에 자리한 니스칠이 벗겨진 찻장 위에는 목이 얇은 유리 화분이 놓여 있고 꽃잎 하나가 떨어진 조화 백합이 수완 좋게 그 안에 꽂혀 있다. 추측하기로 이 백합은 꽃잎만 아직 무사했다면 지금도 그 카페 테이블에 장식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찻장 위 벽에는 하나 같이 잡지 권두 그림으로 보이는 게 핀으로 서너 장 정도 고정되어 있다. 가장 가운데는 카부라키 키요카타 군의 겐로쿠 여자로, 그 아래에 작게 자리한 건 라파엘로의 마돈나인 듯하다. 또 겐로쿠 여자 위에서는 키타무라 시카이 군이 조각한 여자가 옆에 자리한 베토벤에게 분명한 추파를 보내고 있다. 단 이 베토벤은 단지 오키미 씨가 베토벤인가 싶어할 뿐으로 실제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니 키타무라 시카이 군에게도 참 유감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
 이렇게 말하면 오키미 씨의 취미 생활이 얼마나 예술적 색채로 풍부한지 묻지 않아도 명백하라리라. 또 실제로 오키미 씨는 매일 밤 늦게 카페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이 베토벤 alias 윌슨의 초상 아래에서 "불여귀"를 읽거나 조화 백합을 바라보며 신파비극의 활동사진 속 달밤 장면보다도 더 센티멘탈한 예술적 감격에 잠기고는 했다.
 벚꽃이 필 무렵의 어느 밤, 오키미 씨는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닭의 첫 울음이 들릴 때가지 복숭아색 편지지에 펜을 끄적였다. 하지만 써낸 편지 중 한 장이 책상 아래에 떨어진 건 아침이 되어 카페에 나간 후까지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창문에서 흘러 들어온 봄바람이 이 한 장의 편지지를 나부끼게 해 노란 무명에 덮어 싸인 거울 두 개가 놓인 계단 아래까지 날아가 버렸다. 아래에 있는 이발소는 오키미 씨가 번번이 연심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이 복숭아색 편지지도 아마 그중 하나라 생각해 호기심에 일부러 훑어보았다. 하지만 편지는 의외로 오키미 씨가 직접 쓴 듯했다. 그럼 오키미 씨가 누군가의 연심에 답해준 건가 싶었더니 "아케오 씨와 헤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저는 눈물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하고 적혀 있다. 오키미 씨는 거의 밤을 새가며 불여귀의 여주인공인 나미코 부인에게 줘야 할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오키미 씨의 센티멘탈리즘에 작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웃음 속에는 조금의 악의도 담겨 있지 않다. 오키미 씨가 지내는 2층에는 조화 백합이나 "토손 시집", 라파엘로의 마돈나 사진 말고도 혼자 사는데 필요한 주방 도구도 놓여 있다. 이 주방도구가 상징하는 어려운 도쿄의 실생활은 오늘날까지 몇 번이나 오키미 씨를 괴롭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쓸쓸한 인생도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볼 때는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놓는다. 오키미 씨는 그런 실생활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예술적 감격의 눈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6엔의 월세도 한 되 70전의 쌀값도 없다. 카르멘은 전기값도 걱정 않고 마음 편히 캐스터네츠를 울리고 있다. 나미코 부인도 고생은 하지만 약값을 못 구하는 건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눈물이란 괴로운 인생의 황혼 속에서 인간애의 등불을 밝혀주는 것이다. 아아, 도쿄 거리의 소리도 전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한밤중, 눈물에 젖은 눈을 들며 어두컴컴한 10촉 전등 아래서 나 홀로 즈시의 바닷바람이라는 콜드바의 협죽도를 꿈꾸는 오키미 씨의 모습을 상상――젠장, 악의가 없는 건 고사하고 자칫하면 나마저도 센티멘탈에 젖을 것만 같다. 본래 세간의 비평가에겐 정취가 없다는 말을 듣는 굉장히 이지적인 나마저도.
 그런 오키미 씨가 어느 겨울 밤, 늦게 카페에서 돌아왔다. 당초엔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마츠이 스미코의 일생"을 읽었지만 아직 한 페이지도 가지 않은 사이에 어떻게 된 건지 그 책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처럼 거칠게 바닥 위로 내팽겨치고 말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옆으로 앉아 책상 위에 턱을 괴고서 벽 위의 윌――베토벤의 초상을 냉담이 바라보았다. 물론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그 카페에서 해고 당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오마츠 씨의 괴롭힘이 더 악랄해진 걸까. 또 혹은 충치라도 앓기 시작한 걸까. 아니, 오키미 씨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건 그런 속된 일이 아니다. 오키미 씨는 나미코 부인처럼 혹은 또 마츠이 스미코처럼 연애에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럼 오키미 씨는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가 ――다행히 오키미 씨는 벽 위의 베토벤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그 동안 서둘러 이 영광스러운 연애 상대를 소개하도록 하자.
 오키미 씨의 상대는 다나카 군이라고 해서 무명의――뭐 말하자면 예술가이다. 왜냐면 다나카 군은 시도 쓰고 바이올린도 연주하고 유화 물감도 쓰고 배우도 하고 카루타도 굉장히 잘 하며 사츠마 비와도 할 줄 아는 재능 넘치는 사람이라 어느 게 본직이고 어느 게 오락인지 아무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인물도 보통내기는 아니라서, 얼굴은 배우인 만큼 부드럽고 머릿결은 유화처럼 살랑이며 목소리는 바이올린처럼 상냥하고 말은 시처럼 그럴싸하며 여자를 꼬시는 일은 카루타만큼 민첩하며 돈을 빌리는 일은 사츠마 비와처럼 용맹하고 활발하기 짝이 없다. 그런 사람이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쓰고 저렴한 사냥복을 입고 포도색 보헤미안 넥타이를 하고 있으니――그렇게 말하면 대부분 이해하리라. 생각하기에 이 다나카 군은 이미 일종의 타입이니까 칸다 혼고 근처의 바나 카페, 청년회관이나 음악 학교의 음악회(단 가장 저렴한 자리에 한정되지만) 노점, 산카이도의 전시회 따위를 가면 반드시 두세 명은 이런 사람들이 거만하게 민중들을 흘겨보고 있다. 그러니 이 이상으로 명확한 다나카 군의 초상화를 원한다면 그런 장소에 가보면 된다. 내가 쓰는 건 이제 질색이다. 애당초 내가 다나카 군의 소개에 힘을 들이는 사이에 오키미 씨는 어느 틈엔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어 놓은 창문 밖으로 차가운 달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벽돌 지붕 위에 뜬 달빛은 목이 얇은 유리 화분에 꽂힌 조화 백합을 비추고 있다. 벽에 붙인 라파엘로의 작은 마돈나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또 오키미 씨의 위를 향한 코를 비추고 있다. 하지만 오키미 씨의 밝은 눈에는 달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리 내린 벽돌 지붕도 없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다나카 군은 오늘 밤 카페에서 여기까지 오키미 씨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내일 밤은 둘이서 즐겁게 보내자고 약속했다. 내일은 마침 한 달에 한 번 있는 오키미 씨의 휴일이니까 오후 여섯 시에 오가와마치의 전철 정류장에서 만나 시바우라에 와있는 이탈리아인 서커스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오키미 씨는 오늘까지 남자와 둘이 놀러 나간 적이 없다. 그러니 내일 밤 다나카 군과 세상의 연인들처럼 나란히 밤의 곡마를 보러 갈 생각을 하니 새삼스레 심장 고동이 강해진 것이다. 오키미 씨에게 다나카 군은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비밀의 주문을 알고 있는 알리바바와 차이가 없었다. 그 주문이 외워졌을 때 어떠한 미지의 환락경이 오키미 씨 앞에 나타나는가――아까부터 달을 바라보면서도 달을 보지 못하는 오키미 씨가 바람이 부는 바다처럼 혹은 달리는 승합 자동차의 모터처럼 울리는 가슴속에 그리고 있는 건 실로 이 다가와야 마땅할 불가사의한 세계의 환상이었다. 그곳에는 장미꽃이 흩날리는 길에 양식 진주 반지나 비취 오비도메 따위가 끝을 모르고 뿌려져 있다. 나이팅게일의 상냥한 목소리도 이미 미츠코시의 깃발 위에서 꿀 떨어지는 듯이 울기 시작했다. 감람의 꽃향기 속에 대리석을 쌓은 궁전에서는 미스터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모리리츠 코죠의 무도가 한참 물이 오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오키미 씨의 명예를 위해 덧붙인다. 그때 오키미 씨가 그린 환상 속에는 이따금 어두운 구름 그림자가 모든 행복을 위협이라도 하듯이 꺼림칙하게 오고 갔다. 분명한 건 오키미 시는 다나카 군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나카 군은 사실 오키미 씨의 예술적 자극이 후광을 실어준 다나카 군이었다. 시도 쓰고 바이올린도 연주하고 유화 물감도 쓰고 배우도 하고 카루타도 굉장히 잘 하며 사츠마 비와도 할 줄 아는 The 랜슬롯이다. 그러니 오키미 씨 안에 자리한 처녀성의 신선한 직관은 그런 란슬롯의 괴상한 정체를 못 느끼지 않았다. 어두운 불안의 그림자는 그렇게 오키미 씨의 환상 속을 지나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구름의 그림자는 나타나자마자 사라지고 만다. 오키미 씨는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열여섯이나 열일곱 먹은 소녀이다. 심지어 예술적 감격으로 가득 찬 소녀이다. 비로 옷을 적실 걱정이 있을 때나 라인강에 해가 뜨는 그림에 감탄할 때 외에는 구름 그림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하물며 지금은 장미꽃이 흩날리는 길에 양식 진주 반지나 비취 오비도메 따위가――이 뒤는 앞에 쓴 바 있으니 그 부분을 다시 읽어줬으면 한다.
 오키미 씨는 오랫동안 샤반의 성 생 주느비에브처럼 달빛을 받는 벽돌지붕을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재채기를 한 번 하고는 창문을 닫고서 다시 책상에 옆으로 앉아 버렸다. 그렇게 다음 날 오후 여섯 시까지 오키미 씨가 무얼 했는가. 그 자세한 소식은 아쉽게도 나도 알지 못한다. 왜 작가인 내가 알지 못하는가――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오늘 밤 중에 이 소설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오후 여섯 시, 오카미 씨는 괴상한 적홍색 오메시치리멘 코트 위에 크림색 숄을 걸고서 평소보다 안절부절 못하며 벌써 저녁 어둠에 둘러싸인 오가와마치의 정류장에 들어섰다. 다나카 군은 여느 때처럼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눈가 깊은 곳까지 쓰고 양은 손잡이가 달린 얇은 지팡이를 짚고 강렬한 줄무늬의 반 오버의 소매를 세운 채로 붉은 전등 아래에 서 가만히 오키미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평소보다도 더 눈부시고 살작 향수 냄새까지 나는 걸 보면 오늘밤은 특별히 더 차림을 신경 쓴 모양이다.
 "기다렸어?"
 오키미 씨는 다나카 군의 얼굴을 올려보고는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
 "기다리긴."
 다나카 군은 거창하게 대답하면서 또렷하지 않은 웃음을 머금은 눈초리로 오키미 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불쑥 몸을 떨더니
 "조금 걸을까."
그렇게 덧붙였다. 아니, 덧붙이기만 한 게 아니다. 다나카 군은 이미 인기척과 등불이 많은 거리를 스다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서커스가 열리는 건 시바우라였다. 설령 걷는다 쳐도 여기서는 칸다바시 쪽으로 가야만 한다. 오키미 씨는 멈춰선 채로 모래 섞인 바람에 부는 크림색 숄에 손을 얹고는
 "거기로 가게?"
그렇게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다나카 군은 어깨 너머로
 "그래."
하고 가볍게 대답하고는 태연히 스다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니 오키미 씨도 도리가 없어 곧장 다나카 군의 뒤를 쫓고는 잎을 떠는 버들 가로수 아래를 함께 부리나케 걸었다. 그러자 다나카 군은 또 또렷하지 않은 웃음을 눈안에 머금고 오키미 씨의 옆얼굴을 살피며
 "아쉽게도 시바우라의 서커스는 어젯밤으로 끝난 모양이라서 말야. 그러니까 오늘 밤은 내가 아는 가게에 가서 같이 밥이라도 먹자."
 "그래? 나는 아무래도 좋아."
 오키미 씨는 다나카 군의 손이 살며시 자신의 손을 잡는 걸 느끼며 희망과 공포에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또 동시에 오키미 씨의 눈에는 마치 '불여귀'를 읽을 때 같은 감동의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이 감동의 눈물 너머로 본 오가와마치, 아와지쵸, 스다쵸의 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으리라. 연말 세일을 알리는 음악대의 소리, 눈이 돌아갈 듯한 인단 광고 전등,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는 나무 장식, 거미줄처럼 쳐진 만국기, 창가 안의 산타클로스, 노점에 줄지은 엽서나 일력――모든 게 오키미 씨의 눈에는 장대한 연애의 환희를 노래하며 세상의 끝까지 빛내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오늘 밤만큼은 하늘 위의 별빛도 차갑지 않았다. 이따금 부는 모래먼지 섞인 바람도 코트 소매를 펄럭이더니 곧 봄이 돌아온 듯한 따듯한 공기로 변하고 만다. 행복, 행복, 행복……
 그러는 사이 문득 오키미 씨가 정신을 차려보니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골목으로 들어와 좁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 오른쪽에는 작은 채소가게 하나가 밝은 가스등 아래에서 무, 당근, 배추, 파, 순무, 자고, 우엉, 야츠가시라, 소송채, 멧두릎, 연근, 토란, 사과, 귤 따위가 가게에 넓게 쌓여 있었다. 그 채소 가게 앞을 지났을 때, 오키미 씨의 시선은 모종의 박자에 산더미처럼 쌓인 파 사이에 서있는 대나무에 묶인 가격표를 향했다. 가격표에는 검은 묵으로 쓴 못난 글자로 "한 다발 4전"이라 적혀 있었다. 여러 물가가 폭등한 오늘날에 한 다발에 4전하는 파는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다. 그 저렴한 가격표를 보는 동시에 이제까지 연애와 예술에 취해 있던 오키미 씨의 행복한 심정 속에선 이제까지 잠들어 있던 실생활이 대뜸 눈을 떴다. 조금의 텀도 주지 않고서. 장미와 반지와 나이팅게일과 미츠코시의 깃발은 그 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월세, 쌀값, 전기세, 난방비, 술값, 기름값, 신문값, 화장값, 전철 이용금――그 외에도 갖은 실생활이 과거의 괴로운 경험과 함께 마치 불에 나방이 모이 듯이 오키미 씨의 작은 가슴에 사방팔방 모여들었다. 오키미 씨는 저도 모르게 채소가게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황당해하는 다나카 군을 홀로 두고서 선명한 가스등불을 받는 채소 안에 발을 들였다. 심지어 끝내는 가련한 손가락을 뻗어 한 다발 4전 가격표가 꽂힌 파더미를 가리키며 "방랑자"의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저거 두 다발 주세요."하고 말했다.
 모래먼지가 부는 거리에는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눈가 깊은 곳까지 쓰고 강렬한 줄무늬의 반 오버의 소매를 세우고 양은 손잡이가 달린 얇은 지팡이를 짚은 다나카 군이 홀로 쓸쓸히 서있었다. 다나카 군의 상상에는 아까부터 이 마을 구석에 자리한 격자문을 둔 집이 떠올라 있었다. 지붕에 마츠노야라 적힌 전등을 걸고 현관의 돌이 젖어 있는 대충 지은 듯한 이층집이다. 하지만 이런 거리에 서있으니 그 자그마한 이층집의 그림자가 묘하게 점점 옅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에는 천천히 한 다발에 4전하는 가격표를 적어 둔 파가 떠오른다. 그러더니 곧장 상상이 깨지며 먼지가 섞인 바람이 불더니 실생활처럼 신랄하고 눈에 스며드는 듯한 파 냄새가 다나카 군의 코를 찔렀다.

 "기다렸지?"
 불쌍한 다나카 군은 한없이 한심한 눈초리로 마치 다른 사람을 보기라도 하듯이 가만히 오키미 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한가운데에서 깔끔히 가르며 물망초 비녀를 한 코가 조금 위를 향한 오키미 씨는 크림색 숄을 뺨으로 누른 채로 한 손에 두 다발에 여덟 전하는 파를 들고 서있었다. 그 맑은 눈동자 안에 기쁜 웃음을 지은 채로.

       ―――――――――――――――――――――――――

 드디어 다 써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리라. 밖에서는 추위에 떠는 닭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데 모처럼 글을 완성했는데도 괜스레 울적한 건 어째서일까. 오키미 씨는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이 다시 이발소 2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카페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또 다시 다나카 군과 둘이 놀러 나갈 수도 있으리라. 그때 일을 생각하면――아니, 그때는 또 그때다. 내가 지금 아무리 걱정해본들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다. 자, 이대로 펜을 내려놓자. 잘 있어라, 오키미 씨. 그럼 오늘 밤도 그날 밤처럼 여기서 부리나케 나가 용맹하게――비평가에게 퇴치 당하고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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