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효자 덴키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이야기이다.
덴키치는 신슈 미노치군 사사야마무라에 사는 백성의 외동아들이었다. 덴키치의 아버지는 덴조라고 하여 "술을 좋아하고, 도박을 좋아하고, 쌈박질하기를 좋아하니" 사람들에게 양아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각주 1) 어머니는 덴키치를 낳은 다음 해에 병으로 달아겼다고 한다. 혹은 남편에게 정이 떨어져 나가버렸다고도 한다. (각주 2) 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든 이 이야기가 시작할 쯤에는 자리해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덴키치가 겨우 열두 살 먹은(일설에 따르면 열다섯이라고도 한다) 텐포 7년의 봄이라고 한다. 덴키치는 어쩌다가 "에치고의 떠돌이 무사 핫토리 헤이시로란 자의 분노를 사서 자칫 칼에 베어 죽을 뻔" 했다고 한다. 헤이시로는 당시 분조라는 카시와라의 노름꾼의 호위를 맡던 검객이다. 물론 이 "어쩌다가"에는 두세 개의 다른 설이 존재한다.
먼저 타시로 겐보가 쓴 "타비스즈리" 속 문장에 따르면 덴키치는 헤이시로의 상투에 연을 걸었다고 한다.
또 덴키치의 묘가 자리한 사사야마무라 지쇼지(정토종)는 "효자 덴키치 이야기"란 목판 소책자를 배포하고 있다. 이 "덴키치 이야기"에 따르면 덴키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낚시를 하던 차에 우연히 지나가던 헤이시로에게 낚싯대를 빼앗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즈미 코쇼가 쓴 "농가 의인전" 중 한 편에 따르면 헤이시로는 덴키치가 끌던 말한테 걷어차여 진흙에 떨어졌다고 한다. (각주 3)
어찌 되었든 헤이시로는 화가 나서 덴키치에게 칼을 휘두른 게 분명하다. 덴키치는 헤이시로에게 쫓기며 아버지가 있는 산전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덴조는 홀로 산전의 뽕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 자식이 위험한 걸 알자 감자 구멍 안으로 덴키치를 숨겼다. 감자 구멍이란 건 감자를 두르는 한 첩 가량의 토실이었다. 덴키치는 그 구멍 안에서 지푸라기를 붙든 채로 숨을 죽였다.
"헤이시로가 곧장 다가와 '영감, 영감, 꼬맹이 어디로 갔는지 보았소?'하고 물으니 덴조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라 '저 길로 달려갔네'하고 속였다. 헤이시로는 그쪽으로 가지 않을뿐더러 불쑥 덴키치의 혀를 나무라며 '일개 백성 따위가 대담히도 □□□□□□□□□□□(벌레 먹어 읽히지 않는다) 하며 덴조를 걷어차려 한다. 그러자 덴조도 마음을 굳게 먹고는 가까이에 있던 괭이를 들더니 여차하면 일개 백성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거친 숨을 내쉰다.
"어느 쪽도 쉽게 굽어 줄 사람이 아니기에 한동한(오자일까)은 필사적으로 뒤엉키지만……
"싸움에 익숙한 헤이시로는 덴조를 한껏 지치게 해 휘두른 괭이를 질질 끄는 사이에 덴조의 어깨에 검을 휘둘러……
"도망치려 하나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크게 휘둘러진 검에……
"덴키치의 위치는 알지 못했으나 유유히 검을 닦아내고 도리 없이 물러난다."(타비스즈리에서)
뇌빈혈을 겪은 덴키치가 겨우 구멍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에는 싹을 피운 뽕 뿌리에 덴조의 시체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덴키치는 시체에 매달려 한사코 혼자 가만히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눈물은 눈꺼풀을 전혀 적시지 않았다. 대신 어떤 감정이 불꽃처럼 마음을 태우는 걸 느꼈다. 그건 아버지를 죽게 놔둔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어떻게든 원수를 갚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분노였다.
그 후, 덴키치의 평생은 사실상 이 분노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좋았다. 덴키치는 아버지를 묻어 준 후 나가쿠보에 사는 숙부 밑에서 하인이나 다름없이 살았다. 숙부는 마스야 젠사쿠(일설에 따르면 젠베이)라고 해서 여관 운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각주 4) 덴키치는 하인용 방에서 생활하며 원수를 갚을 궁리를 했다. 이 원수 갚을 궁리란 것도 어느 설이 옳은지는 한동안 의문으로 둘 수밖에 없다.
(1) "타비스즈리", "농가 의인전" 등에 따르면 텐키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덴키치 이야기"에 따르면 핫토리 헤이시로란 이름을 알 때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또 미니가와 쵸안이 쓴 "나뭇잎" 중 "덴키치"도 "몇 년이 지나"라 서술하고 있다.
(2) "농가의인전", "혼죠코모쵸"(저자 불명) 등에 따르면 덴키치가 검법을 배운 스승은 하라이 사몬이란 떠돌이 무사였다. 사몬은 나가쿠보 아이들에게 독서나 글자를 가르치면서 원하는 자에게는 호쿠신무소류라는 검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덴키치 이야기", "타비스즈리", "나뭇잎" 등에 따르면 덴키치는 스스로 검법을 익혔다고 한다. "어떤 때는 나무를 원수라 부르고 어떤 때는 바위에 헤이시로란 이름을 붙여" 열심히 마음을 연마한 것이다.
그러자 텐포 10년 쯔음 핫토리 헤이시로는 대뜸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건 덴키치가 자신을 노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갖은 떠돌이 무사처럼 어딘가로 모습을 감춰버린 것이다. 덴키치는 물론 낙담했다. 한때는 "신마저 원수를 지켜주는가"하고 탄식했다. 그런 데다가 원수를 갚으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정처 없이 여행에 나서는 건 지금의 덴키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덴키치는 격렬한 절망 탓에 점점 방탕에 젖기 시작했다. "농가 의인전"은 이 변화를 "교제를 도박에서 찾는다. 그건 어쩌면 원수의 거처를 알기 위함일지도 모른다"하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건 여럿 있는 해석 중 하나일지 모른다.
덴키치는 머지않아 마스야에서 쫓겨나 토마루의 소나무란 호칭을 지닌 도박꾼 마츠고로의 꼬붕이 되었다. 그 후로는 거의 스무 해 가까이 무뢰한의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각주 5) "나뭇잎"은 이 사이에 덴키치가 쫓겨나면서 마스야의 딸을 유괴하거나 나가쿠보의 본진에 어떤 사람을 찾아가는 이야기 등을 전하고 있다. 이 또한 다른 서적에 없는 걸 보면 가볍게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실제로 "농가 의인전"은 "덴키치, 한동안 마을에서 횡포를 부린다고도 전해진다. 근거 없는 말이다. 덴키치는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려는 효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랴"하고 "나뭇잎"의 내용을 부정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덴키치는 이 동안에도 원수를 갚겠단 생각만큼은 잊지 않았으리라. 비교적 덴키치에게 동정을 품지 않는 미나가와 쵸안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덴키치는 주변에 원수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원수가 있다는 걸 안 자에게도 이름을 모르는 척을 해 깊은 뜻을 가진 자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 흘렀고 헤이시로의 행방은 여전히 누구의 귀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안세이 6년 가을, 덴키치는 문득 헤이시로가 쿠라이무라에 있는 걸 발견했다. 물론 이번에는 과거처럼 검을 차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 틈엔가 머리를 자르고는 쿠라이무라의 지장당의 당수가 되어 있었다. 덴키치는 "하늘이 돕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쿠라이무라는 나가쿠보에서 다섯 리도 되지 않는 산속 마을이다. 그런 데다가 사사야마무라에 맞닿아 있으니 좁은 길 하나마저 다 알고 있다. (지도 참조) 덴키치는 현재 헤이시로가 죠칸으로서 살아가고 있단 걸 확인하고는 안세이 6년 9월 7일, 삿갓을 쓰고 외투를 차고, 소슈 무메이의 나가와키자시를 든 채 홀로 원수를 갚기 위한 길에 올랐다. 아버지 덴조가 죽은 지 자그마치 23년째에 뜻을 이룰 때가 온 것이다.
덴키치가 쿠라이무라에 이른 건 술시를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일부러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밤을 고른 것이다. 덴키치는 밤추위가 감도는 시골길을 지나 산 중턱에 있는 지장당으로 향했다. 찢어진 창문지로 들여다 보니 장작불 빛을 받는 벽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각도 탓에 그림자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눈앞의 커다란 그림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중머리였다. 그뿐 아니라 한동안 귀를 기울여도 이 외로운 당수 이외에 다른 사람은 없는 듯했다. 덴키치는 일단 처마 밑 돌에 삿갓을 두었다. 그리고 조용히 외투를 벗어 두 번 접어 삿갓 안에 넣었다. 삿갓도 외투도 어느 틈엔가 밤이슬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러자――불쑥 변의를 느꼈다. 덴키치는 도리 없이 덤불 속에 들어가 옻나무 아래에 볼일을 보았다. 이 부분을 타시로 겐보는 "무시무시한 담력이다"하고 치켜 세웠고 코이즈미 코쇼는 "덴키치의 침착함과 용감함이 극에 이르렀다"고 감탄했다.
준비를 갖춘 텐키치는 나가와키자시를 뽑은 후, 거창하게 지장당의 문을 열었다. 이로리 앞에는 스님 하나가 편안히 다리를 뻗고 있었다. 스님은 등을 돌린 채로 "누구신고?"하고 물었다. 텐키치는 조금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이런 스님의 태도는 원수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또 그 뒷모습은 덴키치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초췌했다. 덴키치는 순간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품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저할 수 없었다.
덴키치는 손을 뒤로 해 문을 닫고 "핫토리 헤이시로"라 물었다. 스님은 그럼에도 놀라는 법 없이 의아하다는 양 손님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하얗게 빛나는 칼날을 보고는 바로 법의를 입은 무릎을 일으켰다. 장작불 빛을 받은 스님의 얼굴은 뼈와 가죽만 남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덴키치는 그 얼굴 어딘가서 또렷이 핫토리 헤이시로를 느꼈다.
"그대는 누구냐?"
"덴조의 아들 덴키치다. 이 원한을 잊었다고는 못할 테지.
죠칸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말없이 덴키치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말로 못할 공포였다. 덴키치는 검을 쥐면서 차갑게 그런 공포를 즐겼다.
"자, 그 덴키치가 원수를 갚으러 왔다. 어서 일어나서 승부해라."
"일어나라고?"
죠칸은 작게 웃었다. 덴키치는 그런 웃음 속에서 묘한 압박감 같은 걸 느꼈다.
"그대는 내가 과거처럼 설 수 있다 생각하나? 나는 앉은뱅이야."
덴키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은 어느 틈엔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죠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가 빠진 입으로 비웃듯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일어서는 것마저 마음 같지 않은 몸이야."
"거짓말 마라, 거짓말 마……"
덴키치는 필사적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죠칸은 반대로 조금씩 냉정해져 갔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잖느냐. 나는 작년에 큰 병을 앓아 앉은뱅이가 되었어. 하지만――"
죠칸은 잠시 말을 끊고는 젠키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비겁한 소리 않으마.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대의 아버지에게 손을 대었어. 이 앉은뱅이라도 치겠다면 얼마든지 맞아주마."
덴키치는 짧게 침묵하는 동안 여러 감정이 무리 짓는 걸 느꼈다. 혐오, 연민, 굴욕, 공포――그런 감정의 고저차는 괜스레 그의 칼날을 둔하게 만들었다. 젠키치는 죠칸을 노려보고는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했다.
"자, 쳐라."
죠칸은 태연히 덴키치에게 어깨를 내밀었다. 그 박자에 덴키치는 죠칸의 숨결에서 술 냄새를 느꼈다. 동시에 과거의 분노가 활활 불타는 걸 느꼈다. 그건 아버지를 죽게 놔둔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어떻게든 원수를 갚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분노였다. 덴키치는 분노에 몸을 떨리는 걸 느끼자마자 대뜸 죠칸을 대각선으로 베어버렸다……
덴키치가 훌륭히 원수를 갚은 이야기는 곧 마을의 평판을 사게 되었다. 공권력도 물론 효자를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듯했다. 물론 미리 원수를 갚겠다는 탄원을 올리는 걸 잊었기에 상은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 후의 덴키치를 이야기하는 건 아쉽게도 이 이야기의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대강 밝혀 보자면 덴키치는 유신 후 목재상을 운영하여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기어코 정신 이상을 겪었다고 한다. 죽은 건 메이지 10년 가을, 항년 53세였다. (각주 6) 하지만 이런 마지막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실제로 "효자 덴키치 이야기"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덴키치는 그 후 부를 이루어 즐거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착한 일을 쌓으면 돌아온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겠죠.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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