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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백합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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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료헤이는 어느 잡지사에서 교정용 빨간펜을 쥐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바란 바가 아니었다. 그는 조금 한가해지면 마르크스의 번역본을 탐독했다. 혹은 두터운 손가락 끝에서 골든배트 하나를 즐기며 어두컴컴한 러시아를 꿈꾸고 있다. 백합 이야기도 그런 때에 불쑥 그의 마음을 스친 단편적인 추억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로 일곱 살이 된 료헤이는 태어난 집의 주방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이웃친구인 킨조가 땀을 머금은 얼굴을 빛내며 무언가 대사건이라도 벌어졌다는 양 대뜸 뛰어 들어왔다.
 "지금, 료, 지금 말야. 싹이 두 개난 백합을 발견했다?"
 킨조는 두 싹을 표현하기 위해 위로 든 코 끝에 두 손의 검지를 모아 보였다.
 "싹이 두 개라고?"
 료헤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뿌리 하나서 싹이 두 개 난 백합은 간단히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 엄청 두꺼워. 끝이 둥근 거랑 붉은 거 하나가……"
 킨조는 풀려버린 오비 끝에 얼굴을 닦으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 갔다. 료헤이도 어느 틈엔가 그에 이끌려 접시를 내려둔 채로 킨조가 찾아 온 문옆에 쭈구려 앉아 버렸다.
 "밥부터 먹어야지? 싹이 두 개든 붉든 무슨 상관이야."
 어머니는 단지 넓은 옆방에서 뽕나무잎을 다듬으며 두 번 세 번 료헤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료헤이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싹이 얼마나 두터운지, 두 싹이 길이는 같은지 질문 공세를 쏟아냈다. 킨조는 물론 다 받아주었다. 싹은 둘 다 엄지손가락보다 크다. 길이는 똑같다. 그런 백합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다………
 "료, 지금 당장 보러 가자."
 킨조는 교활하게 엄마 쪽을 보고는 가만히 료헤이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싹이 두 개 난 백합을 본다――이만큼 대단한 유혹도 없었다. 료헤이는 대답도 않고 엄마의 밀짚 조리를 신었다. 밀짚 조리는 습한 데다가 코끝이 느슨해져 있었다.
 "료헤이! 밥! 먹고 가야――"
 어머니는 놀라서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료헤이는 이미 앞장 서서 뒷뜰을 달리고 있었다. 뒤뜰 바깥에는 골목길을 하나 두고 나무싹이 무성한 잡목림이 펼쳐져 있었다. 료헤이는 그곳으로 달려 가려 했다. 하지만 킨조는 "여기야"하고 열심히 소리치며 밭이 있는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료헤이는 한 발을 내딛자마자 크게 빙글 고개를 돌리고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달려 돌아왔다. 그는 왜인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뭐야, 밭둑에 핀 거야?"
 "아니, 밭 안에 있어. 저기 밀밭의……"
 킨조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뽕밭 두렁에 들어갔다. 벌써 많이 자란 뽕나무는 옆으로 뻗은 가지에 2전 동화만한 잎을 달고 있었다. 료헤이도 그 가지를 지나 킨조의 뒤를 따라 갔다. 그의 바로 코앞에는 천을 덧댄 킨조의 엉덩이에 풀려 가는 오비가 흔들리고 있었다.
 뽕밭을 지나자 겨우 줄기마디가 나기 시작한 밀밭이 나왔다. 킨조는 앞에 선 채로 밀과 뽕 사이의 두둑에서 오른쪽으로 굽었다. 재빠른 료헤이는 그 순간 바로 콘조의 옆을 앞질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화가 난 듯한 킨조의 목소리에 곧장 멈춰 서야만 했다.
 "뭐야,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기가 죽은 료헤이는 마지못해 킨조를 앞세웠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서로 입을 다문 채로 밀과 닿을 듯 말 듯 걸었다. 하지만 그 밀밭 구석의 둑 옆에 이르자 킨조가 불쑥 웃으며 료헤이를 보더니 발밑의 두렁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야."
 료헤이도 그 말을 들으니 불쾌함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때, 어때?"
 그는 그 두렁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킨조의 말처럼 붉은 잎을 두른 백합 싹 두 개가 광택 좋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야기로 들었어도 실제로 이 훌륭한 모습을 보니 소리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껍지."
 킨조는 자못 의기양양히 료헤이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료헤이는 고개 한 번 끄덕인 걸 끝으로 백합 싹만 보았다.
 "어때, 두껍지."
 킨조는 다시 한 번 말하고는 오른 싹에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자 료헤이는 정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그 손을 튕겨냈다.
 "아, 만지지 마. 꺾이잖아."
 "만지면 또 어때? 누가 보면 네 백합인 줄 알겠다!"
 킨조는 다시 화를 냈다. 료헤이도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네 것도 아니잖아."
 "내 게 아니라도 만지는 건 되잖아."
 "하지 말라니까. 꺾인다고."
 "안 꺾여. 아까도 많이 만졌단 말야."
 "아까도 많이 만졌다." 그렇게 말하면 료헤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킨조는 자세를 낮추고 전보다 더 거칠게 백합 싹을 건드렸다. 하지만 세 치도 되지 않는 싹은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도 만져 볼까?"
 겨우 안심한 료헤이는 킨조의 얼굴색을 살피며 가만히 왼쪽 싹을 만져 보았다. 붉은 싹은 료헤이의 손가락에 묘하게 또렷한 촉감을 주었다. 그는 그 촉감 속에서 말로 못할 기쁨을 느꼈다.
 "오오!"
 료헤이는 혼자 작게 웃었다. 그러자 킨조는 잠시 후 대뜸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싹이 이렇게 대단하면 뿌리도 엄청 클 거야――료, 한 번 파볼래?"
 그는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논두렁 흙에 손가락을 꽂고 있었다. 료헤이는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그는 백합 싹도 잊은 것처럼 대뜸 그 손을 붙잡았다.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그러고는 료헤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들키면 혼날 거야."
 밭 안에 자란 백합은 들판이나 산에 자란 백합과 다르다. 이 밭 주인 말고는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그런 건 킨조도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 미련이 남는다는 양 주변 흙에 원을 그리며 순순히 료헤이의 말을 듣기로 했다.
 맑은 하늘 어디선가 종다리가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두 아이는 그 목소리 아래서 싹이 두 개 난 백합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이런 약속을 나누었다――하나, 이 백합은 어떤 친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둘이 같이 보러 온다……

       ―――――――――――――――――――――――――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약속대로 함께 백합을 보러 밀밭을 찾았다. 백합의 붉은 싹 끝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킨조는 오른 싹을 료헤이는 왼쪽 싹을 제각기 손톱으로 튕겨 이슬을 떨어트렸다.
 "크다――!"
 료헤이는 그날 아침도 새삼스럽게 백합 싹의 훌륭함에 빠져 있었다.
 "이거 5년은 됐을 거야."
 "5년――?"
 킨조는 료헤이의 얼굴에 살짝 경멸로 찬 시선을 보냈다.
 "5년? 10년은 됐을걸."
 "10년! 10년이만 나보다 연상인가?"
 "그럼. 너보다 연상이지."
 "그럼 꽃이 열 개 필까?"
 다섯 해 된 백합에는 꽃이 다섯 개가 피고 십 년 된 백합에는 열 개의 꽃이 핀다――두 사람은 언젠가 연상에게 그런 걸 배운 적이 있다.
 "피지, 열 개 정도!"
 킨조는 엄숙히 단언했다. 료헤이는 내심 기가 죽는 걸 느끼며 변명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빨리 피면 좋겠다."
 "피지. 여름이면."
 킨조는 다시 비웃었다.
 "여름? 여름일 리가. 비가 내리는 시기지."
 "비가 내리는 게 여름이야."
 "여름은 하얀옷을 입는 시기야――"
 료헤이도 간단히는 물러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건 여름이 아냐."
 "바보! 하얀 옷을 입는 건 토왕이야."
 "거짓말. 우리 엄마한테 물어봐. 하얀 옷을 입는 건 여름이야!"
 료헤이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짝하고 따귀를 맞았다. 하지만 맞았다 싶은 순간에는 이미 상대를 때리고 있었다.
 "건방져!"
 얼굴색을 바꾼 킨조는 있는 힘껏 그를 밀쳐냈다. 료헤이는 하늘을 보며 밀논두렁에 쓰러졌다. 두렁에는 이슬이 내려와 있었으니 얼굴이나 옷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벌떡 일어나자마자 대뜸 킨조에게 매달렸다. 킨조도 갑자기 당한 탓인지 평소에는 잘 지지 않음에도 이때만은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심지어 그 엉덩방아 자국은 백합싹 바로 옆이었다.
 "싸울 거면 이리로 와. 백합 싹이 다치니까 이리로 와."
 킨조는 턱을 문지르며 뽕밭의 두둑으로 올랐다. 료헤이도 울상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로 올랐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둥바둥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붉힌 킨조는 료헤이의 멱살을 붙잡은 채로 억지로 앞뒤로 돌렸다. 료헤이는 평소에 이렇게 당하면 대개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날 아침은 울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머리가 흔들려도 억지로 상대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뽕나무 안에서 대뜸 누가 나타났다.
 "어머나? 너희 싸우는구나?"
 두 사람은 겨우 손을 놓았다. 두 사람 앞에는 옅은 곰보끼가 있는 중년 여성이 서있었다. 소키치라는 학교 친구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뽕을 따러 온 건지 잠옷 차림에 손수건을 걸친 채로 커다란 소쿠리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산만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스모하는 거예요, 아줌마."
 킨조가 일부러 기운 차게 말했다. 하지만 료헤이는 떨면서 상대의 말을 끊듯이 말했다.
 "거짓말쟁이! 싸웠으면서!"
 "너야말로 거짓말쟁이잖아."
 킨조는 료헤이의 귓볼을 잡았다. 하지만 다행히 잡아 당기기 전에 무서운 얼굴을 한 소키치의 어머니가 그 손을 붙들었다.
 "너는 항상 난폭하구나. 요전 번에 소키치의 뺨에 상처 입힌 거도 너지?"
 료헤이는 킨조가 혼나는 걸 보고 "꼴좋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에 어째서인지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킨조는 소키치의 엄마 손을 넣으며 한 발씩 뛰듯이 뽕나무 안으로 도망쳤다.
 "히가네야마가 어두워졌다! 료헤이의 눈에선 비가 내리네!"

       ―――――――――――――――――――――――――

 그 다음날은 새벽부터 봄치고는 보기 드문 큰비가 내렸다. 료헤이의 집에서는 누에에게 먹일 뽕의 비축이 부족해져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전이 되자마자 비옷의 먼지를 털고 오래된 밀짚모자를 찾는 등 밭으로 나갈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료헤이는 그런 사이에도 계피 껍질을 씹으며 백합 생각만 했다. 이렇게 내려서야 백합 싹도 꺾여버릴지 모른다. 아니면 밭의 흙과 함께 뿌리째로 쓸려 나가지 않을까……
 "킨조 녀석도 걱정이네."
 료헤이는 또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자 우습기도 했다. 킨조의 집은 바로 옆이니 지붕 밑으로 통해 가면 우산을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제 싸우자마자 먼저 놀러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설령 먼저 놀러 오더라도 먼저 한 마디 해줘야지. 그러면 그 녀석도 의기소침해질 게 분명하다………(미완)

(다이쇼 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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