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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O군의 초가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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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릎을 안은 채로 서양화를 그리는 O군과 이야기하였다. 붉은 셔츠를 입은 O군은 다다미 위에 배를 대고 누워 끊임없이 골든배트를 피우고 있었다. 또 O군의 옆에는 묘하게 뒤숭숭한 의족 하나가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늦더위가 남은 거 같네."
 O군은 대답하기 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툇마루 너머의 시온을 보았다. 몇 송이의 시온은 어느 틈엔가 얇은 꽃을 피운 채로 꼼짝도 않고 햇살을 받고 있었다.
 "어, 이게 벌써 피었네………뭐라고 하더라. 부채 그림 속에 있는 꽃이었는데."

     ×

 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기가 맑은 날의 저녁이었다. 나는 역시 O군과 함께 넓은 모래길을 산책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아가씨 한 사람이 나무 울타리를 따라 걸어왔다. 하얀 옷에 붉은 오비를 묶은, 꽤나 키가 큰 아가씨였다.
 "아, 저 아가씨는 유감인걸. 긴 다리를 낭비하고 있어."
 실제로 아가씨의 태도는 O군의 말과 똑닮아 있었다.

     ×

 O군은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채로 어떤 커다란 별장 뒤편의 콘크리트 울타리에 서서 소변을 보았다. 그때 근시 안경인지 뭔지를 쓴 순사 하나가 지나갔다. 순사는 물론 한 소리 하려 했는지 하얀 부채로 O군을 가리키려 했다.
 "이거 좀 보세요."
 O군은 조금 말을 더듬으며 지팡이로 오른 다리를 두세 번 두드렸다. 오른다리는 의족이었으니 화가 나서 말하는 게 분명했다.
 "제 집은 저기인데요……"
 순사는 히죽히죽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

 집 지붕이나 소나무 가지에 서쪽에서 드는 햇빛이 남은 저녁이었다. 나는 캔디 스토어 앞에서 우연히 O군과 만났다. O군은 오랜만에 일본옷을 입고 양쪽 모두에 지팡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두 개네."
 O군은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그래, 오늘은 노를 가지고 나왔지."

     ×

 나는 O군의 집에 놀러 가 전등 아래의 네 첩 반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신경이나 텔레파시의 이야기였다. U라는 우리의 친구 중 한 명은 컵에 물을 넣고 머리맡에 둔 후, 잠시 후 컵을 보면 어느 틈엔가 물이 반이 되어 있다. 또 어느 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더니 대뜸 얼굴에 물이 뿌려졌다. 하지만 놀라서 일어나 보니 컵은 넘어지지 않았다――그런 이야기마저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산책 겸 거리까지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러자 O군은 평소와 달리 팔을 걸치는 창틀 따위를 닫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내게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 창에 빛이 들어와 있으면 말야,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에 누가 홀로 여기 앉아서 뜨신 물이라도 마시고 있는 거 같아서 말야."
 물론 O군은 이 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

 O군은 오늘도 여전히 붉은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은 채로 오전 11시의 뒤뜰에서 화로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땔감은 솔잎이나 소나무 가지였다. 나는 뒷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어때? 밥은 잘 돼가?"하고 말했다. 하지만 O군은 돌아보고는 내게 답하지 않고 주위의 소나무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렇게 밥을 짓고 있으면 말야, 소나무는 모두 땔감――이야."

     ×

 파나마모자를 쓴 O군은 낮은 언덕에 걸터앉아 브러시를 움직였다. 기둥뿐인 하얀 단층집 한 채고 어린 소나무 가운데에 홀로 셔터를 내려놓고 있다――그 모습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소나무는 우리의 주위에도 두세 척의 높이로 자란 채, 가을바람 속에 푸른 솔방울을 맺고 있었다.
 "솔방울이 이런 소나무가 되는 거구나."
 O군은 브러시를 움직이며 내 쪽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들리네."

     ×

 O군은 본업 틈틈이 시를 쓰고는 한다. O군을 조금 묘사한 김에 그러한 시도 덧붙이자면――

애먼 난죽에 가위질해버리는 어둔 날이랴.

야구타와는 수세미 오이 선반에 걸어두라.
병든 나뭇잎 나비가 되어버린 참억새였나.
옅은 햇살 수세미 오이에 담아 우물가 향해.
무엇보다도 푸른 것은 들판 위 소나무 하나.

큰 것마저도 뒤섞여 굴러가는 밤 송이 무리.
씨앗을 가른 봉선화 때까치에 먹혀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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