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눈이 그친 어느 오전이었다. 야스키치는 물리 교관실의 의자에 앉아 스토브의 불을 바라보았다. 스토브의 불은 숨이라도 쉬듯이 노란색으로 불타며 검은 잿먼지를 가라앉게 했다. 실내에 감도는 추위와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야스키치는 문득 지구 밖의 우주적 한냉을 상상하면서, 붉게 탄 석탄에 무언가 동정에 가까운 걸 느꼈다.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스토브 앞에 선 미야모토란 이학사理学士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근시용 안경을 걸친 미야모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콧수염이 옅은 입가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호리카와, 자네는 여자도 물체라는 걸 알고 있나?"
　"동물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동물이 아니야, 물체지――이건 나도 고심의 끝에 얼마 전에 발견한 진리야."
　"호리카와 씨, 미야모토 씨가 하는 말은 진지하게 들으면 안 돼요."
　이건 또 다른 물리 교관――하세가와라는 이학사의 말이었다. 야스키치는 그를 돌아보았다. 하세가와는 야스키치의 뒤에 자리한 책상에서 시험 답안을 확인하며, 이마가 벗겨진 얼굴에 당혹스러운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거 너무하네. 내 발견은 하세가와 군을 크게 행복하게 하지 않겠어?――호리카와 군, 자네는 전열 작용의 법칙을 알고 있나?"
　"전열? 전기의 열 같은 건가?"
　"이래서 문학자는 안 된다니까."
　미야모토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불이 붙은 스토브 입구에 석탄을 한가득 들이부었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서로 접촉시키면 열은 높은 온도의 물체에서 낮은 온도의 물체로 이동하지. 양쪽의 온도가 똑같아질 때까지 줄곧 이동하는 거야."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런 걸 전열 작용의 법칙이라 하는 거야. 자 그럼 여자를 물체로 삼아 볼까. 알 거 같아? 만약 여자를 물체로 둔다면 남자 또한 물론 물체겠지. 그럼 사랑은 열에 해당하겠지. 지금 이 남녀를 접촉하면 사랑이 전해지는 것도 전열처럼 보다 높은 남자에서 낮은 여자에게, 두 사람의 사랑이 같아질 때까지 줄곧 이동하겠지. 하세가와 군의 경우가 딱 그렇지……"
　"또 시작이시네."
　하세가와는 되려 기쁘다는 양 간지러움이라도 타는 것처럼 웃었다.
　"S라는 면적을 통해 T 시간내에 이동하는 열량을 E라 해볼까. 그러면――알 거 같나? H는 온도, X는 열전도 방면에 걸린 거리. K는 물질에 따라 일정한 열전도율이야. 그러면 하세가와 군의 경우엔……"
　미야모토는 작은 칠판에 공식 같은 걸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뜸 돌아서서는 자못 실망한 것처럼 분필 조각을 내던졌다.
　"아마추어와 호리카와 군 상대로는 모처럼의 발견을 자랑할 수 없군――어찌 됐든 하세가와 군의 혼약자는 이 공식에 따라 열이 전도된 모양이야."

　"실제로 그런 공식이 있으면 세상이 얼마나 편하겠어."
　야스키치는 다리를 길게 뻗으며 멍하니 창밖의 눈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물리 교관실은 2층 구석에 있어 체조 기계가 놓인 운동장이나 운동장 너머의 소나무, 또 그 너머의 붉은 벽돌 건물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었다. 바다도――바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어두운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신 문학자는 벌어먹기가 쉽지 않잖아――어때, 요전 번에 낸 책은 잘 팔려?"
　"여전히 조금도 안 팔리네. 작가하고 독자 사이에는 전열 작용도 안 일어나는 모양이야――그나저나 하세가와 군은 아직 날짜 안 잡았어요?"
　"네, 결혼하기로 한 건 한 달 가량 됐는데――준비해야 할 것도 많으니까요. 공부도 못 해서 곤란해요."

　"공부도 못 할 정도로 못 기다리겠어?"

　"제가 무슨 미야모토 씨인 줄 아세요? 애당초 집을 마련하더라도 빌릴 곳이 없어서 쉽지 않네요. 안 그래도 요전 번 일요일에 대강 돌아봤거든요. 가끔 비어 있나 싶으면 이미 예약이 돼있지 뭐예요."

　"제가 사는 쪽으로 오시죠? 매일 학교 다니면서 기차 타도 괜찮다면야."

　"호리카와 시 쪽은 좀 너무 머네요. 그 근처는 셋집도 있을 거 같아서 아내는 그쪽을 바라긴 하는데――어라, 호리카와 씨. 신발 끝 타는 거 같은데요?"
　야스키치의 구두는 어느 틈엔가 스토브에 닿고 있었는지, 가죽이 타는 냄새와 함께 약간의 김이 올라왔다.
　"그거도 전열작용이지."
　미야모토는 안경을 닦으며 도움 안 되는 근시 안경 너머로 야스키치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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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네다섯 날이 지난 후――어느 서리 낀 아침이었다. 야스키치는 기차에 타기 위해 피서지의 벽지를 열심히도 뛰었다. 길의 오른쪽에는 밀밭, 왼쪽에는 노선이 놓인 두 첩 가량의 둑이었다. 인기척 없는 밀밭은 작은 소음으로 충만했다. 누군가가 밀 사이를 걷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뒤집힌 밭 밑에 자리한 고드름이 저 혼자 떨어지는 소리인 듯했다.
　그러는 사이 여덟 시의 상행 열차가 긴 기적 소리와 함께 느린 속도로 둑 위를 지나갔다. 야스키치가 타야 할 하행 열차는 이 열차보다 삼십 분 가량 늦을 터였다. 그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계는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이 시간 차이를 시계의 죄라 해석했다. "오늘은 못 탈 일은 없겠군"――물론 그런 생각도 하였다. 길옆의 밀밭은 서서히 나무 울타리로 바뀌어 갔다. 야스키치는 "아사히" 하나를 꺼내 전보다도 마음 편히 걸었다.
　석탄 찌꺼기를 뿌린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자 건널목이 나온다――별 생각 없이 그런 곳에 이를 대였다. 야스키치는 건널목 양쪽에서 인파를 느꼈다. 누가 기차에 치여서 죽었군. 곧장 그런 생각도 했다. 다행히 자주 가는 고깃집 아이가 건널목 울타리 쪽에 짐을 둔 채 자전거를 세워두고 있었다. 야스키치는 담배를 손에 든 채 뒤에서 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치였어요. 방금 지나간 상행 기차에."
　아이는 빠르게 말했다. 토끼가죽 귀마개를 한 얼굴 또한 묘하게 생기 넘치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치였는데?"
　"건널목 보는 사람이요. 학교 학생이 치일 뻔한 걸 구하려다 치였나 봐요. 하치만마에에 나가이라는 서점이 있죠? 그 집 여자아이가 치일 뻔했어요."

　"그 아이는 살았고?"

　"네, 저기서 울고 있어요."

　"저기"라는 건 건널목 건너에 있는 인파였다. 확실히 그곳에는 여자아이 하나가 순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역무원인 듯한 남자 또한 이따금 순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건널목지기는――야스 키치는 건널목 옆에 자리한 초소 앞에 줄에 싸인 시체를 발견했다. 혐오감을 느끼는 동시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멀리서도 줄 아래로 나온 두 신발만은 똑똑히 보였다.
　"시체는 저 사람들이 가지고 갔어요."
　야스키치쪽 신호등 아래에서 철도 인부 둘셋이 작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었다. 노랗게 타는 모닥불은 빛도 연기도 내뿜지 않았다. 그만큼 굉장히 추워 보였다. 인부 중 하나는 그 모닥불에 반바지의 꽁무니를 말리고 있었다.
　야스키치는 건널목을 지났다. 선로는 정차장과 가까워 몇 개나 되는 건널목을 두고 있었다. 그는 선로를 넘을 때마다 건널목지기가 치인 게 어떤 선로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떤 선로였는지는 곧장 그의 눈에도 확실해졌다. 피는 아직 한 선로 위에서 벌어진 2, 3분 전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건널목 너머를 보았다. 하지만 의미가 없었다. 차갑게 빛나는 철에 붉은 게 묻은 광경은 순식간에 마음속에 선명히 새겨지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그 피는 선로상에서 희미한 수증기마저 내뿜고 있었다 
　십 분 후, 야스키치는 정류장의 플랫폼에서 진정되지 않는 걸음을 거듭하였다. 그의 머리는 방금 본 꺼림칙한 광경으로 가득했다. 특히 피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또렷이 눈을 끌었다. 그는 요전 번에 대화한 전열 작용을 떠올렸다. 피 속에 깃든 생명의 열은 야마모토가 가르쳐준 규칙대로 일 푼 일할 의 오차도 없이 시시각각 선로에게 전해지고 있다. 또 그 생명은 누구라도 좋다는 양, 순직한 건널목지기라도 중죄인이라도 매한가지라는 양 역시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다――그런 생각에 의미가 없다는 건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효자라도 물에는 가라앉는 법이다. 절조를 아는 부인이라도 불에 탈 터이다――그는 이런 생각 속에서 몇 번이나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본 사실은 그런 이론을 간단히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답답한 감명을 남겼다.
　하지만 플랫폼 사람들은 그런 그의 기분에 어울리지 않고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스키치는 그에 짜증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해군 장교들이 큰 목소리로 대화하는 건 육체적으로 불쾌했다. 그는 두 번째 "아사히"에 불을 붙이고 플랫폼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선로의 두세 블럭 앞에 있는 건널목이 보이는 장소였다. 건널목 양쪽에 있던 인파도 지금은 대강 해산한 듯했다. 단지 신호등 아래에선 철도 인부의 모닥불 하나가 노란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야스키치는 그 먼 모닥불에 동정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건널목이 보이는 건 역시 불안한 일이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는 다시 한 번 인파 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처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문득 붉은 가죽 장갑 한 짝을 떨어트린 걸 깨달았다. 장갑은 담배에 불을 붙일 때에 오른손만 벗은 걸 들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장갑은 플랫폼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구르고 있었다. 그건 마치 말 없이 그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야스키치는 서리 낀 겨울의 하늘 아래에서, 홀로 남겨진 붉은 가죽 장갑의 마음을 느꼈다. 동시에 추운 세계에도 언젠가 따스한 햇살이 내려올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