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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여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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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거미는 한여름의 태양빛을 받으며 붉은 월계화 아래에서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날갯소리가 들리며 꿀벌 하나가 무너지듯이 월계화 아래로 왔다. 거미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고요한 대낮의 공기 속에는 벌들의 날갯소리가 만든 잔향이 자그마한 파동을 남기고 있었다.
 암거미는 어느 틈엔가 소리도 없이 꽃 밑바닥에서 움직였다. 벌은 이미 꽃가루 범벅이 된 채 꽃술 아래에 담긴 꿀에 주둥이를 뻗었다.
 잔혹한 침묵이 몇 초인가 흘렀다.
 이윽고 붉은 월계화 꽃은 꿀에 취한 벌 뒤 쪽에 암거미의 모습을 토해냈다. 거미는 맹렬히 벌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벌은 필사적으로 날개를 휘저으며 무작정 적을 쏘려 했다. 날갯짓에 꽃가루가 태양빛의 품에 날렸다. 하지만 거미는 한 번 물은 입을 결코 놓는 법이 없었다.
 투쟁은 짧았다.
 머지않아 벌의 날개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다리에는 마비가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긴 주둥이가 경련하듯이 공중을 두어 번 가량 찔렀다. 그게 비극의 종국이었다. 인간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얄팍한 비극의 종국이었다――다음 순간, 벌은 붉은 월계화 밑바닥에 주둥이를 뻗은 채로 누워 있었다. 날개도 다리도 향이 강한 꽃가루에 범벅이 된 채…………
 암거미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벌의 피를 빨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태양빛은 다시 월계화에 돌아온 대낮의 적막을 가르며 살육과 약탈에 빠진 거미의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의 수자와 지독히 닮은 배, 검은 남경옥을 연상케하는 눈, 한센병을 앓는 듯한 곳곳이 각진 다리――거미는 거의 '악' 그 자체인 것처럼 한사코 죽은 벌 위에 꺼림칙하게 올라타 있었다.
 이런 잔혹하기 짝이 없는 비극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하지만 붉은 월계화는 갑갑한 빛과 열 속에서 매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대낮, 암거미는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꽃잎과 꽃의 사이를 지나 한 가지 위로 기어올랐다. 그 너머에는 뜨겁게 달아 오른 바닥에 시든 푸른 꽃봉오리가 꽃잎을 더위에 비튼 채로 약간의 단향을 내뿜고 있었다. 암거미는 그 위까지 올라 이번에는 그 푸른 봉오리와 가지 사위를 쉼 없이 왕복했다. 동시에 새하얀 광택을 지닌 무수한 실이 말라가는 푸른 꽃을 반쯤 얽맨 채 서서히 가지 끝자락에 둘러졌다.
 잠시 후, 그곳에는 고치와 같은 원뿔형의 주머니 하나가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대낮의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거미는 집이 만들어지자 그 화려한 자루 밑바닥에 무수한 알을 낳았다. 또 자루 입구에 두터운 실로 견직물을 짜고는 자신은 그 위에 앉아 비단 같은 막을 쳐 천장처럼 덮었다. 막은 돔과 같이 단 하나뿐인 창문만 남긴 채 이 사나운 회색 거미를 대낮의 푸른 하늘과 차단시켜 버렸다. 하지만 거미는――산후의 거미는 새하얀 공간 안에 마르고 쇠퇴한 몸을 눕힌 채 월계화도 태양도 벌의 날갯소리도 잊은 듯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몇 주가 지났다.
 그 사이 거미의 자루 안에는 무수한 알에 잠들어 있던 새로운 생명이 눈을 떴다. 그걸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건 하얀 공간 안에 식사조차 끊은 채 누워 있는, 지금은 다 늙어버린 어미 거미였다. 거미는 어느 틈엔가 실 아래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새로운 생명을 느끼고는 약해진 다리를 천천히 옮겨 어미와 자식을 가로막는 자루의 천장을 찢었다. 무수한 아기 거미가 하나둘 넘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 견직물 자체가 백십의 미립분자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기 거미는 곧장 돔의 창문을 지나, 태양과 바람을 받는 월계화 가지로 몰려들었다. 어떤 아기 거미들은 여름 더위를 무겁게 받치는 꽃잎 위에 빼곡히 모였다. 또 어떤 아기 거미들은 신기하다는 양 몇 중으로 꿀냄새를 품은 꽃 안으로 파고들었다. 또 어떤 아기 거미들은 세로로 창공을 가르는 가지와 가지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얇은 실을 치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소리를 낼 줄 알았다면, 이 태양빛 아래의 월계화는 가방에 넣어둔 바이올린이 저 혼자 노래하듯 울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돔의 창문 앞에는 그림자마냥 마른 어미 거미가 나 홀로 쓸쓸히 앉아 있었다. 그뿐일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다리 하나 움직일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방의 정막과 시든 푸른 꽃봉오리의 향과――무수한 아기 거미를 낳은 암거미는 산실과 묘를 겸한 비단 같은 천막 아래에서, 천직을 다한 어머니의 더할 나위 없는 환희를 느끼며 어느 틈엔가 죽음에 이른 것이었다――벌을 물어 죽인 거의 '악' 그 자체인 듯한, 대낮의 자연을 살아가던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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