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 소개자로서 요네카와 마사오의 이름을 모르는 독자는 오늘날 일본에 한 명도 없을 테지만 이 요네카와 씨가 어떤 사람이며 스스로가 좋아서 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으리라 본다.
요네카와 씨가 삼십 년 동안 번역이란 일을 계속하며 이것이 자신에 맞는 일이라 믿게 된 이유를 이 책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한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요네카와 씨가 흥을 타고 쓴 수필 종류는 굉장히 순수하며 어떤 의미론 박눌하다 해도 좋을 인품과 생활자로서 부러워 마땅한 정신의 느긋함을 지녔으며 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러시아풍이 아닌 되려 진정으로 러시어 민중이 가진 듯한 낙천성을 일본풍 몸가짐으로 감싼 보기 드문 한 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권두에 '취경산영록'이란 제목의 짧은 글 모음집이 있다. 약한 췻기를 두른 요네카와 씨의 쾌변을 방불케하며 동서의 술찬미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 이야기를 끌어내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 질척질척 들러 붙는다.
다음으론 음악에 관련된 수필이 이어져 있다.
"16년부터 오늘까지 코토를 시작으로 삼현, 샤쿠하치, 우타, 코츠즈미 순서대로 손을 대왔다"며 "그것도 살짝 문앞만 들여다 본 정도가 아니라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는 요네카와 씨의 겸손벽에 걸맞지 않은 말처럼 그중 하나는 장인의 직계를 이을 정도라니 놀라운 일이다.
나도 어느 날 초대 받은 공적 자리에서 요네카와 씨의 연주를 '감상'한 적이 있다. 사실 내 귀는 이 고전적인 우리 음악의 음색을 구분하는 능력이 없다. 단지 우치다 햣켄 씨와 한 합주가 특히 이 모임의 주된 볼거리였기에 강당의 청중과 함께 코에 힘을 주며 무대를 응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수필을 읽으며 나도 사실은 요네카와 씨의 음악적 천성과 지식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눈 밑바닥에서'란 소설 한 편이 담겨 있다. 이십 년 작품이란 걸 보아 이게 제목의 '추억'이란 의미에 이어지리라. 나는 이를 알고 이중의 관심을 가진 채로 읽었다.
모든 인도주의 시대를 돌아볼 필요는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는 요네카와 씨의 문학적 평생을 관철하는 영원한 청춘의 노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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