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년호 츄오코론에 '규야마 호텔'이란 제목의 희곡을 발표했다.
프랑스령 인도 중국을 무대로 삼아 해외에서 돈을 버는 아마쿠사 여자를 주요 인물 삼아 그 생활을 그려 봤다.
나는 물론 그러한 여자들의 아마쿠사벤을 써야 한다 생각했으나 적당하게 배운 괴이한 말로선 곤란하며 독자도 꽤나 읽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기에 처음엔 평범한 말로 써봤다. 하지만 전혀 느낌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작품을 쓰는 게 무의미하다 느껴질 정도로 느낌이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친구 H군이 아마쿠사 출신인 걸 떠올려 일부러 사흘 밤이나 찾아오게 한끝에 겨우 그만한 물건을 완성해낸 것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쓴소리가 나왔다. 그런 말을 써서야 읽는 게 힘들다. 알아먹을 수 없다. 민폐다. 아니, 큰 문제다. 그런 내용들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 말이 작품의 효과를 돕고 있다. 오히려 재밌다는 이해 깊은 평판도 있는 듯하여 일단은 안심하고 있으나 나는 이전부터 각본은 읽기 쉽게 써야 한다 믿고 있으니 여기서 한 마디 해두고 싶다.
일단 희곡이란 말은 소설이나 수필과 달리 그렇게 술술 읽어서는 무대상의 효과를 알 수 없다. 무대상의 효과를 알지 못하면 희곡의 재미를 알 수가 없으니 그렇게 읽어서야 읽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자신의 작품에 많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방언 탓에 읽기 어렵단 말은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읽고 어려운 방언을 일부러 쓴 작가의 의도도 생각해 줬으면 한다.
"빨리 안 하면 늦는다"는 결코 "빨리 안 하나, 늦는다 마"의 효과를 낼 수 없다. 전자는 우리에게 의미만 전달할 뿐이다. 반면 후자는 그만한 말 뒤에 인물의 생활이, 기품이, 취미가, 습관이, 특수한 뉘앙스가 담기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목소리나 표정, 모습마저 떠오르게 한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방언 그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희곡을 읽을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방언을 쓴다는 건 확실히 수도 없이 반복할 일은 아니다. 나로서도 아마 이 시도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지.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희곡을 전문적으로 쓰겠다면 그 작품 속에 '일종의 방언'을 쓰지 않는 경우가 존재할까. '일종의 방언'이란 표준어론 전할 수 없는 말. 요컨대 작가 본인의 말투이다. 단지 그걸 읽기 어렵다 느끼지 않는 건 의미만을 단순히 해석하기 때문이다.(192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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