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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신일본문학전집 3권 키시다 쿠니오' 후기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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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초 희곡가로 출발해 지금도 그쪽이 전문이나 희곡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무언가 좀 더 큰 자극이 있어야 할 거 같다. 연극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선 힘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설 쪽은, 적어도 신문이나 잡지의 장편 소설은 한 번 받아 들이면 책임을 다할 때까진 어떤 궤도에 올라 타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뒤엉켜야만 한다. 도중에 숨이 끊길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걸 참아 밀어 붙이는데 일종의 힘싸움이 발생한다.

 

 희곡도 소설도 순문학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나는 그리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 표준은 문학적으론 미묘한 정신 기능에 있으니까 작가가 의식적으로 이를 추구한다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끌려가는 부분이 더 많다고 믿고 있다.

 좁다는 건 확실히 순수함으로 통하는 하나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내가 작가로서 바라는 건 무엇보다도 '폭을 가지는 것'에 있다.

 내 눈은 항상 인간의 심리를, 사회의 풍속을 쫓는다. 생활은 그 분위기로, 사상은 그 존재로 내 관심이 이어진다. 현실을 향한 회의와 이상을 향한 신뢰는 내 안에 함께 존재하며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이 책에 담은 두 편의 소설은 제각기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것으로 비교적 최근 작품이다.

 '온류'는 쇼와 13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토쵸오오쵸 조간에 실었다.

 발표하기 앞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작가의 말'로서 적었다.

커다란 병원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꺼진다. 그건 수백 남녀의 생명과 불안함처럼 보이지만 또 동시에 그 병원 건물――원장의 가족을 시작으로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의 번영과 쇠퇴의 경계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아직 꿈을 잃지 않은 나이다. 심지어 그의 손에 주어진 건 희망 없는 사업과 은인 일가의 구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고뇌했다. 아름다운 두 여성이 나타난다. 순정은 짓밟힌 것처럼 보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은 겨울처럼 차갑다.

하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인생의 비참함을 의기양양히 폭로할 생각은 없다. 나는 되려 가장 냉혹한 현실 속에야말로 인간이 살려고 하는 의지가, '신성한 불꽃'이 불탄다 믿으며 독자와 함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자면 눈보라 치는 바다 위에서 한 줄기 온류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현실과 이상의 격차에서 만들어진 인생의 미추 양면을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꼭 여기서 '새로운 윤리'를 논할 생각이 없다. 외려 우리의 전통적인 감정이 현대의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 본래의 면모를 발휘하느냐의 문제에 답하려 했다.

 어떤 의미에선 근대적이라 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주 히비키 유조는 그 낡은 도의 개념을 갖은 행동에서 살리려 하는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시마 케이코 또한 이지적인 자신을 어느 정도 과시하는 면이 있는 현대적 소녀이나 그녀가 가진 불굴의 정신은 아버지 야스히데의 무사적 품격이 만든 가정의 흔육 결과이다. 더욱이 이와타 긴의 거의 맹목적인 순정은 같은 순정이라도 서양 여자의 자아철저하고는 거리가 멀며 외려 대상 속에 자신을 투입시키는 일본적 '여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의 조합은 어쩌면 작품을 고색창연히 만들 우려가 크다. 근대적이고 심지어 '서구적'이지 않으며 일본적이면서 심지어 인습의 냄새를 벗었다는 종류의 톤이 이 이야기엔 필요했다.

 그건 과연 성공했을까?

 

 "낙엽일기"는 과거에 동명의 희곡을 쓴 적이 있어 그 주제를 그대로 소설로 만든 건데 물론 구상은 완전히 새롭게 했다.

 희곡 쪽은 노부인 시즈에코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소설은 그 손녀 리에코를 가장 큰 주요 인물로 삼았다.

 여기선 서구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의 대립, 특히 그 불행한 결합에서 만들어지는 구원 없는 성격 파탄의 비극을 다루려 꾀했다.

 예외적인 사건과 인물에서 오는 이 이야기의 발전에 독자는 살짝 현실 세계서 떼어내지는 감각을 받을지 모르나 자칫하면 그것이야말로 현대 일본의 미래 모습일지 모른다. 작가는 그런 암시를 가했다.

 소설 속 시, 산문 속의 리듬이란 문제 또한 나는 이 작품 속에서 의식적으로 추구한 바 있다.

 '뿌리 뽑힌 것'의 공허함과 애수를 생생한 리얼리즘의 붓에 실는 건 앞으로 내게 필요한 일이다.

 

 이 작품집에 담긴 세 개의 희곡은 제각기 극작가인 내게는 어떤 의미로 기념작이라 할 수 있다.

 '마마 선생과 그 남편'은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극단 츠키지좌가 이를 상연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토모다 쿄스케가 사쿠로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아마 그가 내 일을 맡아준 첫 일이지 싶다.

 상연되며 깨달은 건 이런 '고집 쎈' 작품을 어떻게 썼느냐 하는 것이다. 관객의 마음을 기분 좋게 하는 요소가 정말로 적다. 묘하게 쌀쌀한 뒷맛만이 남는다.

 이게 꼭 의외의 발견은 아니나 실제 무대에서 이만한 인상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소설의 경우도 포함해 내가 쓰는 건 대개 차갑단 비평을 자주 받는다. 그건 작가가 '차가운 인간'이란 뜻도 되기에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나는 실생활 속에서 '참는' 습관을 들인 듯하다. 그런 마당이니 한편으론 '용서한다'는 인간의 미덕마저 생각하지 않게 된 듯하다.

 하지만 작품 상에선 나의 그 두 경향이 굉장히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드러난 결과, 어딘가 가학적인 풍모를 두르게 되는 거 아닐까 싶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말하자면 나의 '숨돌리기'이며 무언가를 쓸 때의 자기만족이다.

 하지만 이건 도무지 자신의 '차가움'을 부정하는 일이 되지 않는 듯하다.

 나는 아직 내 단단하지 않는 마음에 붓는 눈물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허세를 부리고 있다.

 

 '사와 씨의 두 딸'과 '세월'은 같은 해 1월과 3월에 연이어 발표한 것으로 이 시절, 내 희곡작 창작욕이 다시 불탔단 증명이기도 하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두둘 다 잡지에 활자로 실기 위해 썼다는 희곡의 본래 용도와 꽤 맞지 않은 작업 방식이었으나 그럼에도 희곡이 희곡인 조건만은 유감 없이 갖추고 있단 괜찮은 완성도의 작품으로 내 최근작으로서 읽어줬으면 한다.

 단지 이쯤에서 나는 '희곡을 위한 희곡'이란 창작 태도를 다시 한 번 결심했다 덧붙여둔다.

 아마 이를 마지막으로 내가 장래 희곡을 발표할 기회가 있다면 그런 면모를 일신하게 되리라.

 '희곡은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가'하는 생각은 이제 진절머리 난다.

 이제는 슬슬 '희곡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건가'하는 과제를 봐야 하리라.

 그렇게 먼 길을 돌아야만 했던 '우리의 시대'를 후세의 문학사가는 진득히 연구해야 하리라. 나는 몰래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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