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젊은 시대'가 장 콕토를 애독하기 시작했다. 현대 프랑스가 낳은 이 놀라운 재능은 세계 각지에 모방자를 낳고 있는 듯하다. 모방자에게 죄는 없다. 장 콕토 자체가 신문학의 견본 제작자이다.
이번엔 토고 세이지 군을 이 '일본의 콕토'에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선 문학에 선 사람은 아니다. 아방가르드의 화가로서 아는 사람은 그의 손에서 소설 번역이 이뤄진 걸 살짝 의외로 여기리라.
"무서운 아이들". 이 일본어 번역명은 아마 여러 의미로 해석되리로 티리블은 '무서운'이란 뜻이 분명하나 더욱 설명적으로 번역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에 들어 맞다. '손 쓸 도리 없는'에 가깝다. 확실히 이 이야기의 작은 주인공들은 이상한 소질을 지녀 이상한 생활에 발을 들여 간다. 그곳에서 그려지는 환경은 로마네스크한 허풍이 아닌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에 바탕을 둔 근대 사회층의 해설이다. 눈덩이에 가슴을 찢긴 소년이 독약 덩어리에 이빨을 세울 때까지의 운명은 선과 악, 저주와 기원이 교차하는 인생사의 상징적 기록이다.
내가 이 작품에 빠진 이유 중 하나는 작가가 조금도 정의파적 감상을 넣지 않았음에도 한없이 따스한 작품을 내놓았다는 점에 있다. 제목의 '무서운 아이들'은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사랑스러운 아이들'로서 독자들의 마음에 담기리라. 나는 이따금 프랑스의 부모들이 남에게 자기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 “Ils sont terribles”라는 말을 남용했던 것처럼 기억한다. 일본 부모라면 "정말이지 난폭해서 곤란하다니까요" 쯤 되리라. 콕토는 이러한 부모처럼 그 '무서운 아이들'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그러한 아이 중 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이 번역본을 손에 드는 사람들이 그 훌륭한 내용적 디자인과 지독히도 스마트한 삽화를 보고 이 '무서운 번역가'는 정말 부러운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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