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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매소적 무대를 향한 공격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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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일본 문화는 여러 부문에서 좀 더 엄밀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보아 가장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다 여겨지는 연극에 몸을 담고 있으니 이 현상의 우울한 경향을 지적해보려 한다.

 먼저 도쿄에 자리한 주된 상업 극장의 상연 목록을 보면 '근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희곡을 상연하는 경우는 예외라 해도 좋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 중에도 고등 교육을 받았다 할 사람은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극장은 소위 '고급 작품'을 기피하며 그런 걸로는 관객을 부를 수 없다. 생각한다. 또 손님만 와준다면 아무리 '볼품 없는 각본'이라도 고맙다는 양 무대에 올린다. 배우 중에는 학식은 별개로 상당한 예술적 감각을 갖춘 자도 있으니 그런 걸 진지하게 연기할 기력은 없으리라. 하지만 대부분은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극장주는 극장의 문화적 역할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그 주위 또한 그들을 '용납'하고 있으니 '취미의 저열함'에 따라 신사로서의 자존심을 잃을 우려도 없이 단순히 사업가로서 성공하면 콧대를 높일 수 있다.

 그럼 관객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만족할 수 있는가. 마냥 그렇지도 않다. 무엇보다 흥행을 확실히 얻기 위해서 '렌츄'란 제도를 두어 배우에게 티켓 팔이를 떠넘기고 할인으로 단체를 유도하며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하여 말하자면 '억지로' 관객을 긁어 모으고 있으니 관객의 '애호'를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극장에 '무언가를 원해' 오는 게 아니다. 무엇을 보여줘도 그때마다 감흥이 다른 것이다. 가치 비평을 내릴 여유는 없다. 자극적일 수록 크게 술렁일 뿐이다. 그 '술렁임' 정도에 따라 극장주는 '흥했나' 아닌가를 판단하고 다음 상연 목록을 위해 참고한다. 때문에 극평가의 비평은 배우만 신경 쓸 뿐으로 극장주는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극장주도 이런 생각 정돈 한다. '이번 분기엔 관객이 변덕스러워 뭘 원하는지 짐작 가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이 이상의 걸 못 한다곤 안 하겠다. 관객만 만족해준다면 어떤 좋은 거라도 하겠다"하고서.

 좋은 거라면 관객이 만족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잘못되지 않았으나 이익이란 면에선 확실하지 않으리라. 한 걸음 양보하여 하다못해 '문명국의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의 걸 하면 어떨까.

 오늘날에 이를 극장주에게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 관객 쪽에서 그런 의지 표명을 하면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보고 '부끄러워지는' 연기를 향해 용서 없이 분개의 뜻을 표해야 한다. 그걸 즐겁게 보는 녀석들에게 "어라, 그랬나"하고 반성시킬만한 수단을 취해야 한다. 영업 방해를 권하는 듯하나 이는 되려 극장주에게 용기를 주는 유일한 수단이며 일반 관중이 극장에 '요구하는 걸' 각자의 머리에 또렷히 그려낼 좋은 기회이다.

 정치가가 문화적 지도력을 잃고 민중이 생활에 허덕이며 취미의 방향을 잘못 설정할 때, 가장 단적으로 또 가장 밝게 국민적 추락을 경고할 수 있는 건 극장을 찾는 '교양 있는 청년'의 통렬한 목소리임을 나는 믿는다.

 이 방법은 단순히 영리 극장의 '악취미'에만 맞서는 게 아니라 소위 '신극'이라 칭해지는 독선적인 무대에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갈피를 못 잡으며' '지루한지' 알려주는데 도움이 되리라.

 나는 현재의 연극이 '재미 없어' 보러 가지 않는 사람들을 '듬직한 관객'이라 불렀는데 그건 너무 소극적인 생각임을 깨달았다.

 정열을 토해낼 곳을 찾아 시대의 병폐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극장을 찾아 매소적 무대에 침을 뱉고 다음으론 '불효자 배우'를 멍하니 세워두는 건 어떨까. 약간의 항의가 허락된다면 그야말로 쇼와 역사를 자랑할 합법적 애국 운동자가 되리라 생각하는데 찬성자는 없으랴.(193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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