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진코론의 N 씨가 오셔서 "정말 보잘 것 없는 부탁이라 죄송합니다만"하고 운을 떼고는 은혜와 원수를 주제로 몇 장인가 적어 줄 수 없겠냐고 말씀하셨다. "은혜와 원수인가요." 나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 위에 은혜란 말과 원수란 말을 쓰며 N 씨께 물었다. N 씨는 솔직하며 맑게 갠 날과 같은 분이셨다. "그렇습니다. 제게는 굉장히 좋은 주제로 보이거든요. 편지로 부탁하면 거절하실 거 같아서 제가 직접 부탁하러 온 겁니다. 은혜는 어찌 되었든 원수는 별로 기분 좋은 게 못 되니 주제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어릴 적에 누구한테 맞아 분했다느니 그런 이야기라도 써주시면 됩니다."
나도 N 씨의 친절을 모르는 건 알지만 도무지 해낼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거절할 수밖에 없겠지 싶었다. "저는 못 씁니다. 은혜라 하면 어릴 적부터 은혜투성이라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은인이 열 명 이상 있고, 하나하나 이름을 열거하는 것도 어쩐지 서먹하게만 느껴져 되려 실례인 거 같고 '큰 은혜는 말로 꺼내지 말라'는 말처럼 저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수니 원수니 하는 건 하나도 없고요. 거슬리는 게 있으면 그 자리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나는 은혜를 느끼고 있는 분께 있는 그대로 "은혜"란 말을 썼다가 되려 그분이나 그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받은 적이 있다.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거면 됩니다." N 씨는 내 설명을 긍정해주었다. "지금 말씀하신 걸 그대로 써주시면 돼요." N 씨는 땀이 많은 체질인지 종일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셨다.
"쓰고 싶지 않아요. 네다섯 장씩 수필을 쓰다 보면 굉장히 염세적으로 써지고 맙니다. 그야말로 복수감이 생기려 들어요. 조용히 소설만 쓰고 싶습니다."
"그렇겠죠." N 씨는 진심으로 동의해주셨다. "정말로 안 되는 거 아닙니다. 이런 부탁을 하는 건. 그러니 주제는 상관없어요. 무엇이든 적어주세요."
N 씨가 이 먼 시골의 누추한 집까지 일부러 찾아오신 걸 생각하면 완고히 거절하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게 조금 어려워졌다. 내 마음속에는 역시나 겁이 많아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벌레가 산다. 결국 쓰게 되었다. 하지만 "못 씁니다, 쓰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내 진심이라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쓸 내용이 없다. 어쩔 수 없으니 N 씨가 말씀하신 기분 좋은 말을 왜곡하는 법 없이 그대로 적어보려 한다.
"저도 복수는 싫습니다. 츄신구라도 생각해보면 이상하지요. 부녀자뿐인 무방비한 집에 도둑처럼 숨어 들어 할아버지 한 명을 단체로 죽이는 거니까요. 비겁하지요. 복수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이나 하고요. 방법이 치사하지 않나요. 소가 형제도 어릴 적부터 복수랍시고 사람 죽일 생각만 한 거 아닙니까? 심지어는 어머니가 그런 걸 열심히 부추기죠. 음허하죠. 처참해요. 십팔 년 동안이나 원수를 잊지 않는다니 꺼림칙한 형제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하고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어요. 무사도란 것도 참 이상합니다."
"그래요, 그걸 쓸까요"하고 내가 말했더니 N 씨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N 씨가 근래에 본 영화의 내용이나, 전쟁, 도호쿠 사람(N 씨도 나도 같은 도호쿠 출신이었다)의 장단점, 청년의 무기력함, 부인 잡지의 매출 등 이런저런 솔직하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원고의 이야기만 없었다면 내게는 정말로 즐거운 반나절이었다.
결국 이런 요령 없는 원고가 만들어져 N 씨께는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은혜와 복수를 주제로 독자의 하등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십스러운 소재를 섞어가며 대여섯 장씩 쌓아 올리는 게 작가의 의무라면 작가는 쇠약해지기만 한다. 어린 나이에 괜한 명성만 쌓아 올린 해는 나도 잘 이해하고 있다. 좋은 일이 아니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대(쇼와 15년)의 독자에게 별로 의지하지 않는다
이상은 허세가 아닙니다. 이래저래 생각한 후에 하는 말입니다. 거듭하여 N 씨께는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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