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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르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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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전이었던가, 혁명 후였던가.――아니, 그건 혁명 전이 아니었다. 왜 혁명 전이 아니냐면, 내가 당시 주워 들은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푹 찌는 밤, 무대 감독 T군은 제국 극장의 발코니에 앉아 탄산수 컵을 한 손에 든 채 시인 단첸코와 대화를 나누었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맹목 시인 단체코 말이다.
 "이것도 역시 시대 흐름일까요. 저 먼 러시아의 그랜드 오페라가 일본의 도쿄까지 오다니."
 "볼셰비키는 과격파니까요."
 이 문답이 있었던 건 첫날부터 다섯 날이 지난 밤――카르멘이 무대에 오른 밤이었다. 나는 카르멘 역할을 맡은 이이나 불스카야에 빠져 있었다. 이이나는 눈이 크고 작은 코가 오똑한 육감적인 여성이었다. 나는 물론 카르멘을 연기하는 이이나를 보는 걸 기대했다. 하지만 제1막이 오르자 다른 배우가 카르멘을 맡은 걸 알 수 있었다. 파란 눈동자를 지니고 코가 높은 가녀린 여성이었다. 나는 턱시도를 입은 채 T군과 같은 구역에 앉아 있었는데,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멘이 우리의 이이나가 아닌걸."
 "이이나는 오늘밤 쉰다는군. 그 원인이 또 조금 로맨틱해서 말야――"
 "뭔데?"
 "아무개 구 제국의 후작 한 사람이 이이나 뒤를 쫓아서 그제 도쿄에 도착했다네. 그런데 이이나는 어느 틈엔가 미국인 상인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지. 그 녀석을 본 후작이 절망해서, 어제 호텔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나 봐."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떤 광경을 떠올렸다. 그건 밤의 호텔방에서 수많은 남녀에게 둘러싸인 채 트럼프를 만지작거리는 이이나였다. 검은색과 적색이 섞인 옷을 입은 이이나는 집시점을 하고 있다며 T군에게 웃으며 "이번에는 당신의 운을 봐드리죠."하고 말했다.(혹은 말했다고 한다. Да[각주:1] 말고는 러시아어를 알지 못 하는 나는 물론 12 국가의 언어를 할 줄 아는 T군에게 번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트럼프를 뒤집어 본 후, "당신은 그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죠"하고 말했다. 그 사람이란 건 이이나의 옆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던 러시아인이었다. 나는 불행히도 '그 사람'의 얼굴이나 복장은 기억하지 못 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가슴에 꽂혀 있던 패랭이꽃뿐이었다. 이이나의 사랑을 잃어 목을 매 죽었다는 그 날밤의 '그 사람' 아니었을까? ……

 "그래서야 오늘 밤은 못 나오겠군."
 "그냥 밖에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겠나?"
 T군도 물론 이이나파였다.
 "뭐 한 막 정도는 더 봐도 되지 않겠어?"
 우리가 단체코의 이야기를 한 건 아마 이쯤이었을 것이다.
 다음 막도 우리에게는 지루했다. 하지만 우리가 자리에 앉아 5분도 되지 않아 대여섯 명의 외국인이 우리의 정반대 편 자리를 찾았다. 심지어 그들의 가장 앞에 선 건 틀림없는 이이나 불스카야였다. 이이나는 자리의 가장 앞에 앉아 공작 깃털 부채를 쓰며 유유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동반 외국인 남녀와(개중에는 반드시 이이나의 남편인 미국인도 있으리라.) 유쾌하게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이나군."

 "그래, 이이나야."
 우리는 기어코 마지막 막까지――카르멘의 유해를 품은 호세가 "카르멘! 카르멘!"하고 오열할 때까지 우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무대보다는 이이나 불스카야를 보기 위함이었다. 남자를 죽인 사실에 무엇도 느끼지 않는 듯한 이 러시아의 카르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로부터 2, 3일이 지난 어느 밤. 나는 한 레스토랑의 구석에 T군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이나가 그날 밤 이후로 왼쪽 약지에 붕대를 하고 있는 걸 봤나?"
 "그러고 보니 붕대를 하고 있었지."
 "이이나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가……"
 "자네, 그거 마시지 말게나."
 나는 T군에게 주의를 주었다. 옅은 빛이 깃든 잔 안에서 작은 풍뎅이 한 마리가 발버둥 치고 있었다. T군은 백포도주를 바닥에 뿌리고는 묘한 얼굴로 덧붙였다.
 "접시를 벽에 던져서는 그 파편을 캐스터네츠 대신 썼다는군.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는 것도 아랑곳 않고……"
 "카르멘처럼 춤췄다는 건가?"
 그에 우리의 흥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은 머리가 허연 급사 한 명이 조용히 술잔을 가지고 왔다.

 

 

  1. Yes.를 뜻하는 러시아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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