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하나, 1월에 하나
첫 감상은 시큰둥했다. 제목으로 보나, 예고편 스타일로 보나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식 극장판의 일종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니, '쏘아 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아래에서 볼까' 같은 부류의 작품 말이다. 재미야 있겠지만 굳이 극장까지 가서 찾아볼 필요는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중 12월에 영화 '조제'가 개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하니 극장판 '조제, 호랑이~'와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단다. 원작이 있다는 사실은 이때 알았다. 더군다나 그 원작이란 게 2003년에 이미 한 번 영화화가 되었고 굉장히 명작이라는 듯했다. 요컨대 소설 하나가 영화화, 한국판 리메이크, 극장판 리메이크까지 이뤄진 셈이다. 아, 뭐가 됐든 평범한 작품이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그게 마침 11월의 일이다. 한국판 '조제'가 12월이고, 애니메이션판 '조제 호랑이~'가 1월 개봉(당시에는)이었다. 세 개 중 둘을 놓치는 일 없이 볼 수 있다는 건 제법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가장 먼저 나온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었다. 원작인 책도 읽어 보고 싶었는데, 먼저 구해둔 책을 우선하는 사이에 뒤로 밀려 아직까지도 읽지 못하였다. 앞으로 이야기하는 모든 '원작'이라 함은 03년판 '조제, 호랑이~'를 뜻함을 일러두고 싶다.
본래는 한국판과 애니메이션판을 보고 원작을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판의 개봉이 이래저래 3월까지 밀리면서 도중에 원작 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다. 즉 관람 순서는 한국판 '조제' → 원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애니메이션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되겠다. 한 작품이 여러 갈래로 파생되어 있는 경우, 관람 순서도 감상에 크게 영향을 주기에 미리 기재해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세 영화는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장애인 조제와 츠네오의 만남. 조제가 두려워하는 호랑이. 조제와 츠네오가 함께 논하는 물고기들. 부제에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뺀 한국판도, 내용이 크게 달라진 애니메이션판도 이러한 요소는 놓치지 않고 챙겼다.
그 중에서도 조제와 호랑이는 어느 작품에서나 크게 차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와 츠네오와 만나는 조제. 좋아하는 책에서 이름을 따와 스스로를 부르는 조제. 차가운 듯 조금 엉뚱하게 츠네오와 거리를 두려 하는 조제. 츠네오와 함께라면 호랑이를 봐도 무섭지 않은 조제.
그러나 물고기만큼은 세 작품 모두 차이가 난다. 물고기 이야기를 하는 장소부터 달라진다. 원작 영화에서는 러브 호텔, 한국판에서는 수족관, 애니메이션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요소이다.
알다시피, 조제란 여주인공의 본명이 아니다. 호랑이들에게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즐겨 찾는 책에서 따온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작품 제목에서 진짜 조제 즉, 구미코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게 물고기이기에 세 작품은 그 부분에 변주를 주었다 본다.
러브호텔에서 본 물고기
- 원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계속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것도 나쁘지 않아.
조제는 그렇게 말한다. 한바탕 데이트를 하고, 러브호텔에서 정을 나눈 후에 불쑥. 자신들이 언젠가 헤어질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이 단지 바다 밑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될 거라는 암울한 말과 함께. 그럼에도 조제는 담담히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조제는 츠네오와 가진 관계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었던 걸까.
조제는 그전까지 두 종류의 인간들 밖에 겪어 보지 못 했다. 자신을 위협하는 무수한 호랑이들, 또 장애를 이유로 모든 걸 통제하려 드는 할머니. 그런 와중에 멸시도, 연민도, 부끄러움도 없이 호기심과 관심으로 대하는 츠네오. 요컨대 츠네오란 조제가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 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단지 평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츠네오와 조제의 썸, 또 연애를 보라. 츠네오는 단지 생각이 나서 조제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을 뿐이다. 방법이 있기에 도움을 주었을 뿐─후술 할 이유 탓에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해진다─이다. 단지 여느 여인들처럼 외출을 하고, 과거를 이야기하고,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나눈다. 하물며 조제가 꼬장을 부릴 때에도 꼬박꼬박 한 마디씩 걸고넘어진다. 결코 '불쌍한 녀석이니 봐주자'하는 식이 없다.
조제는 또 무엇이 다를까? 그녀 또한 남들처럼 사랑하고, 평범하게 질투하고, 그럴 듯하게 어리광도 부린다. 또 누구보다 더 격렬하게 치정 싸움을 펼칠 줄도 안다. 바깥세상을 호랑이에 빗대어 두려워하는 한 편으로, 츠네오에게 호랑이를 대입하는 법은 없다. 본인이 한 말과는 달리 '불쌍함'을 무기로 츠네오를 붙드는 일 또한 없다.
이처럼 영화는 츠네오와 조제 사이에 결코 장애라는 요소를 주지 않았다. 비슷한 여타 작품처럼 장애가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장벽이 되는 법이 없다. 할머니가 뻔히 보이게 두 사람을 갈라놓지만 단지 그뿐. 되려 할머니가 죽는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또 정상화된다. 버린 책을 주워 읽던 조제는, 어느 새인가 책을 버리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마당이니, 조제의 문제성 발언은 되려 통쾌하기만 하다.
그러면 댁도 다리를 자르던가.
그깟 동정심 따위로 츠네오를 잡을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니라면 너도 한 번 잘라봐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멋도 없게 조제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분명 그런 식이 되리라. 확실히 카나에의 말처럼 츠네오는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 덕일까. 원작 영화를 이야기하다 보면 둘의 로맨스에 집중한 감상평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애니메이션판의 개봉 소식이 들렸을 때에도 "이번에는 조제와 츠네오가 잘 되길 바란다"는 말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두 사람만큼 이별을 통해 완성될 연인은 분명 달리 찾아보기 힘들 터임에도.
다시 상기의 대사를 돌이켜 보자.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혼자 밑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뿐이다. 다른 연인 관게에서 이 말은 어쩌면 저주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조제와 츠네오이기에 헌사가 된다. 조제는 츠네오 덕에 평범함을 알았다. 할머니의 손에 꽁꽁 싸매인 채 방구석에 유폐된 쿠미코가 아닌, 설령 밑바닥일지라도 혼자 힘으로 구를 수 있는 물고기 내지는 조개껍데기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단지 츠네오가 평범하게 사랑하고 온전히 조제로만 받아주었기에.
그러나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모든 사랑이 성공하지는 않고, 또 모든 연인이 결혼하지 않는다는걸. 조제는 분명 평범한 이별 또한 경험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제와 츠네오에겐 이별마저도 예정 조화였던 걸지 모른다. 조제 또한 필시 그런 걸 직감하였기에 츠네오를 안심시켜주었으리라.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미 평범한 걸 겪어 본 자신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물며 츠네오의 이별은 또 어땠을까. 분명한 것은, 장애와 사회의 시선이 조제의 성격을 (괴팍하다 해도 문제 없을 정도로) 일그러트려 놓았다는 점이다. 또 장애가 있는 만큼 금전적이거나 현실적인 문제 또한 따를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마침 헤어졌던 전 여자 친구마저 돌아왔다. 그 끝에서 츠네오는 이별을 택했다. 그럼 과연 츠네오는 조제의 장애에게서 도망친 것일까.
그럴 리도 없을 터이다. 말을 바꾸어 보면 결국은 '성격 차이', '금전 문제' 따위다. 전 여자친구가 그나마 복잡할까.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버린 건지 모른다는 자책감, 또 같은 일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도 있을 수 있겠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건, 어느 쪽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감정이란 점이다.
괴팍한 성격이 비단 조제만의 일인가. 우리는 갖은 남녀가 상대의 지랄 같음에 나날이 학을 떼고 있음을 안다. 금전과 현실이 장애인만의 문제인가. 이제는 같은 이유로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인간관계의 실패에 지레 겁을 먹고 진행에도 시작에도 겁을 먹는 건 어제도 내일도 몇 번이나 겪을 일이다.
도망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너무나 사랑했음에도 결국 감당하지는 못 할 거 같아 도망친 츠네오. 그렇기에 결코 친구로는 남을 수 없는 걸 알고 오열하는 츠네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분명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청년인 우리의 모습일 터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로맨스로만 대하는 관점은 사랑해줄 수밖에 없다. 그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동시에,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가장 궁극적인 뒷 이야기일 테니까. 우리가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는 그 시절에 조제와 츠네오를 위한 자리를 하나 놓아주는 셈일 테니까……
수족관에서 본 물고기
- 한국판 "조제"
이렇게 원작 영화는 우리의 청년 시절을 조명하는 영화기도 했다. 그런 만큼, 리메이크의 재해석 속에 2020년 한국의 청년이 담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 해도 좋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청년상은 어떨까? 과연 밝기만 할까? 그렇지도 않을 터이다. 너무나 많아져 되려 가치를 잃은 우리. 오늘은 어제의 연장선일 뿐인 우리. 더 이상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는 것엔 질려버린 우리. 2020년, 한국의 '조제'는 그러한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그 덕일지, 그 탓일이지 영화의 톤은 굉장히 낮아져 있다. 정적이고 어두우며 또 울적하다. 조제의 생활 반경에 이르러서는 아예 물리적으로 낮춰져 있다. 그럭저럭 평범했던 조제의 집은 더 보잘것 없어졌고, 이영석(원작의 츠네오)은 원조 교제나 다를 바 없는 일을 하고 있으며, 부 여주인공은 고시원에서 사는 통에 마음 놓고 사랑 조차 나누지 못한다. 아름다운 영상미 또한 그런 분위기 속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거든다.
한국판 조제와 이영석은 원작의 조제와 츠네오만큼 평범하지는 못 하다. 대신 평범하려고 애 쓰려는 듯이 보였다. 이 또한 먼 이야기일까? 우리도 많은 걸 바라지는 않을 터이다. 딱 남들만큼만 살고 싶어 한다. 평범하고 싶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설령 누군가가 우리를 불쌍해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엔 물고기가 갇혀 있는 듯하지만, 물고기들이 보기엔 우리가 갇혀 있는 걸 수도 있어.
이 때문에라도 한국판 '조제' 또한 미워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우리의 삶이 절절히 스며드는 감촉은 결코 싫지 않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이 또한 관점이 다를 뿐인 우리의 삶이라는 말은 아름다웠다. 영화관을 나오고 생각을 나누려 평론 어플을 켰을 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원작 이야기와 함께 '차라리 원작을 두 번 보라'는 혹평으로 가득했다. 대체 원작이 어느 정도길래─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국판 조제를 가장 먼저 보았다─이렇게나 민심이 뒤숭숭할까. 원작을 보고 나니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의 톤을 낮추면서 각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에도 대폭 손질이 들어갔다. 원조 교제, 고시원 살이도 그렇지만 가장 대조적인 건 역시 조제의 성격이었다.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서 괴팍하면서도 귀엽고 당돌한 조제의 면은 많이 사라지고 괴팍하고 시크한 조제가 대신 앉아 있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마저 건드려 버렸다.
원작과 한국판 모두 공통된 장면으로, 츠네오(영석)가 음식을 구해다 주는 장면과 나라의 지원을 받아 집을 리모델링하는 장면이 있다. 일본판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판 조제는 동정 운운하며 히스테릭을 발산한다. 가란다고 진짜 가냐는 생떼마저도 차가운 겨울날의 보호 본능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물론 우리는 영석(츠네오)이 그렇게 훌륭한 양반이 되지 못하는 걸 알기에, 일종의 피해망상 따위로 밖에 보일 수 없다.
말하자면 청년의 이야기에 집중한 나머지, 되려 장애에 관련된 묘사에서 섬세해지지 못 한 느낌이다. 로맨스의 뒤에서 자연스럽고 정적이되 당연하게 묘사되었기에 아름다웠던 여러 장면들이, 되려 정면으로 드러나 빛을 잃고 말았다. 조제가 장애인 전용 자동차를 타고 외출하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의미로 평범하지 못하고 특별하기까지 하다.
일본판 조제는 다시 물 밑바닥으로 돌아갔음에도 지금 또한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한국판 조제는 어떨까. 여전히 수족관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저들이야말로 갇혀 있는 거라 믿고 있을까. 피해망상에 젖은 조제와 노골적으로 불쌍해진 우리들. 혹여 우리를 정말로 불쌍히 여기는 건 그 누구보다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 아닐까. 조제와 츠네오가 불쌍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제와 영석 또한 불쌍하지 않아야 했던 거 아닐까.
스쿠버 다이빙을 통해 본 물고기
- 애니메이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다행인 건, 애니메이션판 '조제, 호랑이~'에서 익숙한 조제가 다시 돌아왔다는 점이다. 냉소적─물론 이 부분은 많이 덜어지긴 했다─이면서도 어딘가 귀여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그 조제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꽤나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러한 좋은 인상은 영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좋은 영화다. 원작과 많은 게 달라졌지만, 달라졌기에 좋은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스쿠터 다이빙 중인 츠네오와 물고기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번 '츠네오'는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고 물고기에 관심이 많아 멕시코 유학까지 준비하고 있단다. 솔직히 말해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분명 예고편에도 있었던 장면인데, 개봉이 밀리는 사이 까먹어 버렸나 보다. 조제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순간에야 비로소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어찌 되었든, 이는 결정적이자 꽤 중요한 변화였다. 츠네오 또한 조제와 같은 '물고기'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츠네오와 조제가 처음으로 같은 걸 바라보며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된 것이다. 여느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같이. 혹은 이 '여느 극장용 애니메이션 같이'란 말도 제법 중요할지 모르겠다.
원작은 어떤 영화였던가.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그 시절의 로맨스에 자연스레 장애라는 소재를 섬세하게 녹아내린 영화였다. 덕분에 장애를 다룬 영화로 보기 이전에, 가슴 아픈 로맨스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영화기도 했다. 이번 영화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란 장르에 그 감성을 녹여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기 쉬울까.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츠네오는 여전히 그리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고.
그래서일까. 얼핏 진부한 청춘물 극장 애니메이션 같은 줄거리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 장애에 관련된 묘사도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장르적 맥락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싶었다. 무엇보다 작품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자생력만큼은 같은 장르의 어떤 작품에도 밀리지 않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캐릭터성의 변화도 그렇다. 츠네오를 비롯해 모든 캐릭터가 자주적으로 변모했다. 조제에 이르러서는 단지 구원을 받는 여주인공을 넘어, 츠네오를 구원해내는 히어로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였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 관계는 물론 숱한 애니메이션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분명 '조제'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으리라.
분명한 건, 애니메이션판 '조제, 호랑이'는, 원작에게서 많은 걸 물려받아 애니메이션적으로 한 발짝 나아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고기니 꿈이니 날개니, 진부하지만 분명 아름다운 방면으로. 물론 원작의 분위기와 섬세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한 발짝이 괜한 사족처럼 비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매체가 달라지면 대상층 또한 달라지는 법이다. 그 대상층이 만족하고, 또 그 기회로 원작에까지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만한 일이 더 있을까.
이번 영화의 상영관은─적어도 여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비하면─다양한 계층으로 채워져 있었다. 원작의 명성 덕이지 싶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원작을 생각하고 보러 와 당황한 경우도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들 또한 마지막에는 만족스레 자리에서 일어났을 거란 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나 바라던 '조제와 츠네오가 잘 되는 결말'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며
서두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정말 어쩌다 이만큼 글을 쓸 정도의 애정이 생겼지 싶다. 보는 눈이 형편없어 (특히 좀 더 전문적인) 남들이 본다면 볼품없는 글일지는 몰라도, 내가 느낀 바를 고스란히 적으려 노력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래간만에 덕통사고를 제대로 당한 느낌이다. 더군다나 아직 원작이니, 애니메이션판의 코믹스니 볼거리가 남아 있어 즐겁기만 하다.
이 글의 요점은 하나이다. 가능하면 지금 걸려 있는 애니메이션판 '조제, 호랑이~'를 봐주었으면 한다. (사실, 상영 중인 작품이라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에도 할애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또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원작도 챙겨보면 좋다. 여전히 넷플릭스에 걸려 있다. 한국판도……봐서 나쁠 건 없지 싶다. 영상미만 따진다면 그 어떤 조제보다도 우수하니까. 결국 마냥 미워할 수 있는 작품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혹여 스크린에서 내려갈 때까지 다 못 쓰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다행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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