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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by noh0058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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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후의 수업

"그럼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강이나 젖의 줄기로 불리는 이 희미하고 하얀 게 실제로는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선생님은 칠판에 걸어 둔 커다란 별자리판을 위에서 아래로 하얗게 물들은 은하대 같은 곳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캄파넬라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네다섯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조반니도 손을 들으려다 황급히 거두었습니다. 선생님이 가리킨 것이 전부 별이라는 건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습니다만, 요즘 들어 교실에서도 매일 같이 자는 통에 책을 읽을 여유도, 읽을 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탓인지 어쩐지 어떤 것이나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조반니는 뭔지 알고 있지?"
 조반니는 기세 좋게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어나니 똑바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넬리가 앞에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조반니를 보고는 쿡쿡 웃었습니다. 조반니는 가슴이 뛰어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커다란 망원경으로 은하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조반니는 역시 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곧장 대답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님은 한동안 곤란해하셨지만, 시선을 캄파넬라 쪽으로 돌리셔서는,
"그럼 캄파넬라가 대답해볼까?"하고 지명하셨습니다.
 그러니 기운차게 손을 들었던 캄파넬라마저 역시 머뭇머뭇 일어나 대답하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의외라는 양 가만히 캄파넬라를 지켜보았지만 서둘러,
"그럼 좋습니다."하고 말하며 스스로 별자리판을 가리켰습니다.
"이 희미하고 하얀 은하를 커다랗고 좋은 망원경으로 바라보면 수많은 작은 별들로 보인답니다. 그렇죠, 조반니?"
 조반니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조반니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찼습니다. 네, 조반니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캄파넬라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캄파넬라의 아버지인 박사님의 집에서 캄파넬라와 같이 읽은 잡지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일까요. 그 잡지를 읽은 캄파넬라가 곧장 아버지의 서재에서 커다란 책을 가져와 은하 부분을 펼쳐, 둘이서 검은 페이지에 수많은 하얀 점이 가득한 아름다운 사진을 한사코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캄파넬라가 그걸 잊을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곧장 대답하지 않은 것은, 요즘 들어 조반니가 아침이고 오후고 일이 힘들어 학교에 나와도 모두와 놀지 않고 캄파넬라하고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은 탓일 겁니다. 캄파넬라도 그걸 알고 안타까워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조반니는 스스로와 캄파넬라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해졌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이 은하수를 진짜 강이라 생각한다면 이 작은 별 하나하나는 강의 모래나 자갈이 되는 것이지요. 또 이걸 커다란 젖의 흐름으로 생각한다면 좀 더 은하수와 닮아집니다. 즉 이 별들은 가슴 안에 얇게 뭉쳐 있는 모유의 한 방울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럼 무엇이 그 강의 물이 되느냐. 그건 빛을 어느 속도로 전하는 진공이란 것으로, 태양이나 지구도 역시 그 안에 떠있는 것이랍니다. 그럼 저희도 하늘의 강물 안에 떠있는 것이 되겠네요. 그리고 하늘의 강물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물이 깊을수록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하늘 강 밑바닥의 깊은 곳일수록 별이 많이 보이고, 때문에 하얗고 희미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 모형을 보시겠어요?"
 선생님은 안이 빛나는 알갱이로 가득 찬 커다란 양면 볼록렌즈를 가리켰습니다.
"은하수의 형태가 딱 이렇답니다. 이 빛나는 알갱이를 저희의 태양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빛나는 별이라 생각할까요. 저희의 태양은 이 중심에 있고 지구는 바로 그 근처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밤에 이 중심에 서서 이 렌즈 안을 둘러봐주세요. 이쪽은 렌즈가 얇으니까 희미하게 빛나는 알갱이, 즉 별로 밖에 보이지 않지요? 하지만 이쪽은 렌즈가 두꺼워 빛나는 알갱이 즉 별이 잔뜩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희미하고 하얗게 보입니다. 요컨대 이것이 오늘 배운 은하란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수업시간이 다 됐으니 이 렌즈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 안에 담긴 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는 다음 과학 시간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은하 축제날이니까 다들 밖에 나가 하늘을 잘 봐주세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책과 노트를 넣으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교실은 한동안 책상을 열고 닫고, 책을 포개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나섰습니다. 한동안 책상을 열고 닫고, 책을 포개는 소리로 가득해진 교실이었습니다만, 곧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나섰습니다.

2. 활판인쇄소

 조반니가 학교 정문을 지날 때, 같은 반의 일고여덟 명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캄파넬라를 가운데에 둔 채 교정 구석의 벚나무 아래에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 밤의 은하 축제에 푸른빛을 내기 위해 강에 흘릴 쥐참외를 따러 갈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반니는 손을 크게 흔들며 힘찬 걸음으로 학교의 문을 나섰습니다. 그러니 거리의 집집마다 오늘밤 있을 은하 축제를 위해 주목 열매 장식이니 편백 나뭇가지에 조명을 달아두는 둥, 여러 준비를 해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조반니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세 거리를 지나 보이는 커다란 활판인쇄소에 들어가서는, 입구의 계산대에 앉은 헐렁한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에게 인사를 합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올라간 죠반니는 복도 끝자락의 커다란 문을 열였습니다. 안은 아직 점심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쇄기는 덜컹덜컹 움직였으며, 천으로 머리를 묶거나 램프 쉐이드를 쓴 사람들은 노래하듯이 읽고 세고 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조반니는 입구에서 세 번째에 자리한 높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찾아 인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동안 선반을 뒤지다가,
"이거 좀 주워다 줄래."하고 말하고는 한 장의 종이를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조반니는 테이블의 밑에서 작고 평평한 상자를 꺼내, 전등이 잔뜩 달린 벽의 한구석에 주저앉아서는 작은 핀셋으로 마치 밤톨 같은 활자를 하나둘 줍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가슴 보호대를 한 사람이 조반니의 뒤를 지나며,
"반가워, 돋보기 군."하고 말하니 주변에 있던 네다섯 명이 소리도 없이, 돌아보는 법도 없이 차갑게 웃어 보였습니다.
 조반니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활자를 모아갔습니다.
 여섯 시가 되어 얼마 되지 않았을 즘. 조반니는 상자 하나 가득 찬 활자를 다시 한 번 종이와 맞춰 보고는 방금 전 테이블로 돌아갔습니다. 테이블의 사람은 조용히 상자를 받아 들고는 작게 고개를 그덕였습니다.
 죠반니는 인사를 하고 문을 나와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그러니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마찬가지로 조용히 자그마한 은화 한 잎을 조반니에게 건넸습니다. 살짝 얼굴이 밝아진 조반니는 기세 좋게 고개를 숙이고는 내려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빵집에 들러 빵 덩어리 하나와 각설탕 한 봉지를 산 후, 주위에는 눈도 주지 않은 채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3. 집

 조반니가 기세 좋게 돌아온 것은 어느 뒷골목의 자그마한 집이었습니다. 줄지은 세 개의 입구 중 가장 왼쪽에는 빈 상자에 보라색의 케일이나 아스파라거스가 심어져 있었고, 작은 두 창문에는 햇빛 가림막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엄마, 나 왔어. 몸은 괜찮아?" 조반니는 신발을 벗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조반니. 일하느라 힘들었지?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루 종일 멀쩡하네."
 조반니가 현관으로 올라가니 조반니의 어머니가 현관 근처의 방에서 하얀 천을 뒤집어쓴 채 쉬고 계셨습니다. 조반니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엄마. 오늘은 각설탕 사 왔어. 우유에 넣어줄게."
"그래, 너 먼저 먹으렴. 나는 아직 마시고 싶지 않네."
"누나는 언제 왔어?"
"세 시쯤에 왔단다. 다들 도와줬다네."
"엄마 우유는 안 왔고?"
"안 온 거 같은데."
"내가 가지고 올게."
"나는 천천히 먹어도 되니까 너 먼저 들렴. 누나가 토마토로 뭐 만들어서 저기에 두고 갔다."
"그럼 나 먼저 먹을게."
 조반니는 창가에서 토마토 접시를 가져와 빵과 함께 먹었습니다.
"엄마. 내 생각인데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거 같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그러니?"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올해는 북쪽의 어획량이 아주 좋다네.
"그치만 너희 아버지가 어획에 못 나갔을지도 모르잖니?"
"분명 나가셨을 거야. 아버지가 감옥 갈만한 나쁜 짓을 했을 리가 없는 걸. 요전번에 아버지가 학교에 기부한 커다란 게딱지하고 긴 뿔이 아직도 표본실에 남아 있는걸. 선생님들이 6학년 수업 때 열심히 가져가기도 하고."
"다음에는 해달 가죽을 가져온다고 하셨지."
"안 그래도 다들 나한테 그 이야기해. 놀리는 투지만."
"다들 너를 못 되게 구는 거니?"
"응. 그치만 캄파넬라는 절대 안 그래. 캄파넬라는 다들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안타까운가 봐."
"그쪽 집안은 너희 아버지가 너희만 할 때부터 친구였다고 하니까."
"응, 그래서 아버지하고는 자주 캄파넬라네 집에 가곤 했어. 그때는 좋았는데. 학교만 끝나면 캄파넬라네 집에서 놀았거든. 캄파넬라 집에는 알코올램프로 달리는 기차도 있다? 레일을 일곱 개 조합하면 둥글게 되는데 거기에 전신주나 신호등을 붙일 수 있어. 그러면 기차가 지나갈 때면 신호가 파란색으로 변해. 한 번은 알코올을 다 써서 석유를 부었는데 굴뚝이 그슬러지는 거 있지."
"그렇구나."
"지금도 매일 아침 신문 돌리러 가고 있어. 집은 항상 조용하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니까."
"자우어란 개가 있어. 꼬리가 꼭 빗자루 같아. 내가 가면 코를 킁킁 거려. 마을 구석까지 쫄래쫄래 따라오기도 하고. 오늘 밤에는 다 같이 쥐참외를 강에 흘리러 간다네. 분명 개도 따라갈 거야."
"그러고 보니 오늘 밤에 은하축제가 있었지."
"응. 나는 우유 가지러 가면서 보고 오려고."
"그래 다녀오렴. 강에는 들어가지 말고."
"응, 물가에서 보기만 하려고. 한 시간 정도 다녀올게."
"좀 더 놀다 오렴. 캄파넬라하고 같이 있는 거면 걱정 안 되니까."
"그래, 분명 같이 있을 거야. 엄마, 창문 닫아둘까?"
"그래, 그러렴. 좀 쌀쌀하네."
 조반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는 접시나 빵을 정리하고는 기세 좋게 신발을 신고는,
"그럼 한 시간 반 뒤에 올게." 그렇게 말하며 어두운 현관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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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켄타우로스 축제의 밤

 조반니는 회파람을 부는 듯한 쓸쓸한 입놀림과 함께 편백으로 검게 물든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내리막 아래에서는 커다란 가로등 하나가 창백한 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가로등 쪽으로 천천히 내려가니, 이제까지 괴물처럼 길고 희미하게 저 뒤까지 뻗어 있던 조반니의 그림자가, 차례로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가며 또렷해져 죠반니의 옆으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훌륭한 기관사야. 여긴 경사니까 빨라져. 나는 지금 가로등을 지나고 있어. 봐, 이번엔 내 그림자가 콤파스가 됐어. 이렇게 한 바퀴 돌아 앞으로 왔잖아.'
조반니가 그런 생각을 하며 큰 걸음으로 가로등 아래를 지났을 때, 갑자기 자넬리가 깃이 뾰족한 새로운 셔츠를 입고는 가로등 너머에서 어두운 골목길을 나와 조반니와 엇갈렸습니다.
"자넬리, 쥐참외 떠내보내려 가?"하고 조반니가 묻기도 전에,
"조반니, 아버지가 해달 가죽 가져오셨어?"하고 등 뒤에서 자넬리가 외쳤습니다.
 조반니는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아 꾹 움켜쥐고 싶어졌습니다.
"뭐야, 자넬리."하고 조반니도 따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자넬리는 이미 편백이 심어진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왜 쟤는 내가 아무짓도 안 했는데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자기는 꼭 쥐처럼 달리는 주제에. 분명 바보라서 그런 걸 거야."
 조반니는 바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양한 등이나 나뭇가지로 아름답게 장식된 거리를 걸었습니다. 시게 가게에는 눈부신 네온사인이 붙어 돌로 만들어진 부엉이의 붉은 눈이 데굴데굴 움직이고, 바다색의 두꺼운 유리판 위에 수많은 보석이 별처럼 붙어 천천히 움직이고, 그 반대쪽에서는 청동 인마가 천천히 다가옵니다. 그 중앙에는 검은 성좌도가 파란 아스파라거스 잎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홀린 것처럼 성좌도를 바라봅니다.
 낮에 학교에서 본 성좌도보다 훨씬 작은 성좌도였지만, 날짜와 시간에 맞춰 판을 돌리면 타원형 안에 그때 볼 수 있는 하늘이 담겼습니다. 성좌도 한가운데에는 은하가 희미한 띄처럼 위아래로 걸쳐져 있었고, 그 아래에서는 살짝 폭발하여 수중기라도 올라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그 뒤쪽에는 세 개의 다리가 달린 자그마한 만원경이 금빛을 내뿜으며 서있었고, 가장 뒤쪽의 벽에는 별자리에 동물이나 뱀, 물고기나 병의 형태를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전갈이나 사수 같은 것이 하늘에 빼곡히 담겨 있는 것일까, 나도 저 안을 걸어 볼 수 있었으면.' 조반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부탁 받은 우유를 떠올린 조반니는 가게를 나섰습니다. 꽉 조이는 웃옷의 어깨너비에 불편해하면서도 일부러 가슴을 펴고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거리를 걷습니다.
 공기는 아주 맑은 것이 꼭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리나 가게 안에 흘러 들어옵니다. 가로등은 새파란 전나무나 졸참나무를 휘감아주고, 전기 회사 앞의 플라타너스 여섯 그루는 안에 수많은 꼬마 전구가 달려 마치 인어가 사는 도시처럼만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새옷을 입고서 별보기의 노래를 휘파람 불거나, "켄타우로스, 안개를 걷어내라"하고 소리치며 달리거나 푸른 마그네슘 불꽃놀이를 가지고 즐겁게 놀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조반니는 금세 다시 고개를 깊게 조아린 채 주위의 소란스러움하고는 전혀 엇나간 생각을 하며 우유 가게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조반니는 어느샌가 사시나무가 저 높은 밤하늘까지 뻗은 마을 외각까지 와있었습니다. 우유 가게의 검은 문을 지나 소냄새가 풍기는 주방 앞에 서 모자를 벗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해보지만 집안은 조용해 아무도 없는 듯했습니다.
"저기요, 실례합니다." 조반니는 똑바로 선 채 외쳤습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 많은 할머니가 몸이라도 안 좋은 것처럼 천천히 나와서는 무슨 일이냐 물으십니다.
"오늘치 우유가 집에 오지 않아 받으러 왔습니다." 조반니는 기세 좋게 대답했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어 모르겠네요. 내일 와주시겠어요?"
 할머니는 새빨간 눈 아래를 비비며 조반니를 내려봅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오늘밤에 꼭 드셔야 해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오세요." 할머니는 그렇게만 말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조반니는 인사를 하고 주방을 나섰습니다.
 십자로를 돌아가려니 다리 저 너머의 잡화점 앞에 검은 그림자와 하얀 셔츠가 뒤섞인 여닐곱 명의 학생들이 쥐참외 등불을 든 채 휘파람을 불고, 웃고 떠들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웃음 소리도 휘파람 소리도 익숙합니다. 조반니의 동급생들입니다. 조반니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렸지만, 곧 마음을 바꿔 먹고 동급생들을 향해 기세 좋게 걸어갑니다.
"강에 가니?" 조반니가 그렇게 말하려다 잠시 망설였을 때,
"조반니, 아버지가 해달 가죽 가져오셨어?" 자넬리가 다시 한 번 외쳤습니다.
"조반니, 아버지가 해달 가죽 가져오셨어?" 곧 다들 자넬리를 따라 소리칩니다. 조반니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빠져 나가려 하니, 그 안에 캄파넬라가 있는 걸 발견합니다. 캄파넬라는 안타깝다는 양 조용히 작게 웃고는 화나지는 않았나 조반니의 얼굴을 살핍니다.
 조반니는 도망치듯 그 눈을 피합니다. 그렇게 캄파넬라의 등에서 높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다시 퓌하람을 불기 시작합니다. 조반니가 길을 꺾으며 돌아보니 자넬리 역시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캄파넬라 또한 높게 휘파람을 불며 저 멀리 보이는 다리 너머로 사라져 갑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쓸쓸함에 사로 잡힌 조반니는 갑자기 달려 나갔습니다. 귀에 손을 얹은 채 한 발로 콩콩 뛰던 작은 아이들은 조반니가 무언가 재미난 놀이라도 하는 줄 아는지 와아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조반니는 곧 쿠라이오카 쪽으로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5. 천기륜 기둥

목장 뒤편에는 느슨한 언덕이 있습니다. 그 검고 평평한 정상에서는 북쪽의 큰 곰자리가 평소보다도 낮게 보였습니다.
 조반니는 이슬이 내린 좁고 자그마한 수풀 길을 척척 걸어 올라갑니다. 새까만 풀이나 갖은 형태로 보이는 수풀 사이의 얇은 길줄기가 한 가닥의 하얀 별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풀 안에는 반짝반짝 푸른빛을 내뿜는 벌레도 있었고, 어떤 잎은 푸르게 빛나 조반니에게 방금 전 급우들이 들고 있던 쥐참외의 빛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새까만 솔나무나 졸참나무 수풀을 지나니 살짝 하늘이 뚫린 장소가 나옵니다. 은하수의 빛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는 게 보이고 정상의 천기륜 기둥도 같이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초롱꽃인지 들국화인지 모를 꽃이 주변을 한가득 매워 꿈에서도 잊지 못 할 듯한 향기를 내뿜고, 새 한 마리는 지저귀며 언덕을 지나갑니다.
 조반니는 정상의 천기륜 기둥 밑으로 와 비틀거리는 몸을 차가운 풀 위에 던졌습니다.
 마을의 등불은 어두운 거리를 마치 바닷속 용궁성처럼 환하게 비추고, 아이들의 노래나 목소리, 콧노래, 자잘한 환성 같은 것도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바람이 저 멀리서 울고 언덕의 풀잎은 조용히 흔들려 조반니의 젖은 셔츠도 차갑게 식어 갑니다. 죠반니는 저 먼 마을 외각에 검게 펼쳐진 평야를 바라봅니다.
 거기서 기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그마한 열차에서는 작고 붉은 창문이 일자로 엿보였고, 그 안에선 수많은 여행자들이 사과를 베어 물고 웃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막연히 슬퍼진 조반니는 다시 하늘만 올려다봅니다.
 아아 저 하얀 띠가 전부 별이라 하던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저 하늘은 낮에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텅 비고 차가운 장소 같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보면 볼수록 자그마한 숲이나 목장이나 들판처럼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반니는 푸른 별이 세 개, 네 개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끝내 버섯처럼 길게 늘어나는 걸 보았습니다. 또 머리 밑의 거리까지가 희미하고도 수없이 많은 별의 집합이 하나의 안개처럼 이루어진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6. 은하 정류장

조반니는 바로 뒤편의 천기륜 기둥이 어느 틈엔가 희미한 삼각표 형태가 되어 한동안 반딧불처럼 점등하는 걸 보았습니다. 점등은 점점 확실해져 이윽고 짙은 강청색 하늘의 들판에 우두커니 섰습니다. 막 새로 구운 듯한 푸른 강철판 같은 하늘의 들판에 똑바로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신비한 목소리로 은하 정류장, 은하 정류장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앞이 갑자기 활짝 밝아지더니 마치 억만의 매오징어가 내뿜는 빛을 단숨에 화석으로 만들어 하늘 안에 담근 것만 같이 혹은 다이아몬드 회사가 가격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잘 캐지지 않는 척을하며 숨겨 둔 금강석을 누군가가 몰래 훔쳐 흩뿌린 것만 같이 눈앞이 확 밝아져, 조반니는 그만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아까부터 덜컹덜컹하고 조반니가 탄 작은 열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정말로 밤의 경전철을 타고 작고 노란 전등이 줄지은 객실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푸른 융단이 깔린 의자의 대다수는 비어 있었고 회색의 바니시를 칠한 벽에서는 황동 단추 두 개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자리에는 먹이라도 뒤집은 듯이 새까만 윗옷을 입은 키 큰 아이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깨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누군지 알 거 같았던 조반니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려 할 때, 그 아이는 살짝 고개를 빼서는 조반니를 보았습니다.
 캄파넬라였습니다.
 조반니가 전부터 여기 있었냐고 물으려 하니 캄파넬라는,
"다들 열심히 뛰었는데 늦어버렸네. 자넬리도 꽤나 달리던데 못 따라잡았어."하고 말했습니다.
 조반니는 '맞아, 우리 다 같이 나온 거였지'하고 생각하면서
"어디서 기다릴까?"하고 물었습니다.
"자넬리는 벌써 집에 갔을 거야. 아빠가 데리러 오셨대."
 그렇게 대답하는 캄파넬라는 얼굴이 살짝 창백하여 어딘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조반니는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한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말을 잇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캄파넬라는 다시 한 번 창문 밖을 바라보더니 금세 기운을 되찾고는 기세 좋게 말했습니다.
"내 정신 좀 봐. 물통을 까먹었네. 스케치북도 두고 왔고. 그래도 괜찮아. 곧 백조 정류장이거든. 나는 백조를 볼 수 있는 게 정말 좋아. 먼 강 너머를 날고 있더라도 나는 분명 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둥근판 같은 지도를 줄곧 빙글빙글 돌려봅니다. 지도 가운데에서는 한 줄기의 은하 철로가 하얀 은하수의 왼쪽 끄트머리를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뻗어 나갑니다. 지도는 대단한 것이 새벽녘처럼 어두컴컴한 검은 판 위에 무슨무슨 정거장이나늬 삼각표, 온천이나 숲이 파란색, 귤색, 녹색 등 눈부신 빛으로 빛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조반니는 그 지도를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습니다.
"그 지도는 어디서 샀어? 흑요석으로 만들어졌네."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은하 정류장에서 받았어. 너는 안 받았어?"
"아, 우리 은하 정류장 지났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나?"
 조반니는 하얀 새라고 적힌 정류장에서 살짝 북쪽으로 떨어진 곳을 찍었습니다.
"맞아. 어라? 저건 달빛인가?"
 캄파넬라의 시선을 쫓아가 보니 푸르게 빛나는 은하 끝자락에 은빛으로 빛나는 참억새가 바람을 받아 살랑살랑 흔들려 파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달빛이 아냐. 은하라 빛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조반니는 마치 뛰어오를 것 같을 정도로 유쾌해졌습니다. 발로 리듬을 타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별보기의 노래를 크게 흥얼거리며 열심히 몸을 뻗어 은하수를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은하수가 도무지 똑바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물줄기는 점점 유리보다도 수소보다도 깔끔하고 상쾌하게 트여 갔고, 이따금 눈이라도 풀어주듯이 작은 보랏빛 파도를 세우거나 무지갯빛을 내뿜으며 소리도 없이 졸졸 흘러갑니다. 들판에는 이곳에도 저곳에도 인광의 삼각표가 아름답게 서있었습니다. 먼 것은 작게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주황빛이나 노란빛으로 분명하게, 가까운 것은 푸르며 희미하게, 어떤 것은 삼각형, 또 어떤 것은 사각형 혹은 번개나 사슬형으로, 제각기 줄지어 들판을 한가득 빛나게 합니다. 조반니는 가슴이 뛰어 고개를 흔들어댑니다. 그러니 정말로 그 아름다운 들판의 갖은 빛이나 온갖 형태의 삼각표도 숨이라도 쉬듯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이제 정말 하늘 등판에 있는 거야." 조반니는 말했습니다.
"게다가 이 기차는 석탄도 안 쓰네." 조반니는 왼손을 짚고 창문으로 기차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알콜이나 전기를 쓰는 걸 거야." 캄파넬라가 말합니다.
 덜컹덜컹덜컹. 작고 아름다운 기차는 하늘 참억새의 바람을 가르며 은하수나 삼각점의 푸른 미광 속을 한없이 한없이 달려갑니다.
"어머, 용담꽃이 피었네. 벌써 가을이구나."
 선로 끝자락의 짧은 풀밭 안에 월장석이라도 품고 있는 듯한 눈부신 보랏빛의 용담 꽃이 피어 있습니다.
"내가 잠깐 내렸다 저거 따서 다시 올라올까?" 조반니는 뛰는 가슴으로 묻습니다.
"안 돼. 벌써 저렇게나 뒤로 가버렸는걸."
 캄파넬라는 그런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용담 꽃이 한껏 빛을 내뿜으며 지나갑니다
 그러더니 노란 밑둥을 지닌 용담 꽃이 샘솟듯이, 비처럼 눈앞을 지나더니 삼각표 행렬이 연기를 내뿜듯, 불타는 것처럼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7. 북십자와 프리오신 연안

"엄마가 나를 용서해주실까?"
 캄파넬라는 갑자기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대뜸, 살짝 어물거리며 그런 말을 합니다.
 조반니는,
'맞다. 우리 엄마는 저 작은 먼지처럼 보이는 주황색 삼각표 근처에서 지금도 내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카산드라의 말을 듣습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어떤 게 엄마의 가장 큰 행복이 되는 걸까." 캄파넬라는 어쩐지 울고 싶은 걸 열심히 참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너희 엄마 어디 편찮으신 구석도 없으시지 않아?" 조반니는 놀라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모르겠어. 하지만 누구나 정말로 좋은 일을 하면 가장 행복한 거 아닐까? 그러니까 엄마는 나를 용서해주실 거야." 캄파넬라는 어딘가 정말로 결심한 듯이 보였습니다.
 차 안이 살짝 밝아집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로 금강석이나 이슬의 갖은 훌륭함을 한데 모인 듯한 휘항찬란한 은하의 강줄기가 소리도 없이 흘러 그 흐름 정중앙에 푸른 후광을 두른 한 섬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섬의 평평한 정상에는 눈이 번쩍 뜨일만한 훌륭한 하얀 십자가가, 꽁꽁 언 북극의 구름으로 만든 듯한 상쾌한 금빛 원광을 구른 채 조용히, 또 영원히 그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앞뒤로 그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돌아보니 객실 안의 여행자들은 다들 옷소매를 풀어놓은 채 검은 성서를 품에 얹거나 수정 염주를 차거나 하나같이 손가락을 모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또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캄파넬라의 뺨은 마치 달군 사과처럼 붉게 올라 아름답게 빛나 보였습니다.
 그렇게 섬과 십자가는 점점 뒤로 밀려갑니다.
  건너편의 물가도 푸르고 희미하게 빛나 사라지고 이따금 역시나 참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지 은빛이 끼어 숨이라도 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수많은 용담 꽃이 풀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것이 상냥한 도깨비불을 연상케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잠깐으로, 강과 기차 사이는 참억새의 행렬로 가로막혀버립니다. 두 번 정도 저 뒤편에서 하얀새 섬을 볼 수 있었지만, 그것도 곧 점점 멀어져 그림처럼 변해버렸고 다시 참억새가 살랑살랑 울 즘에는 끝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반니의 뒤편에는 언제 탄 것인지 키가 크고 검은 수녀복을 입은 가톨릭풍의 비구니가 동그란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떨구어 전해지는 목소리나 말 같은 것을 경건히 듣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행자들은 다들 조용히 제 자리로 돌아갔고, 두 사람도 슬픔과 닮은 새로운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주고받습니다.
"곧 하얀새 정류장이네."
"그러게. 열한 시쯤에는 도착할 거야."
 벌써부터 녹색 신호와 희미한 하얀 기둥이 창문 옆을 지나가고 유황처럼 희미한 분기기 앞의 조명이 창문 아래를 지나 기차는 조금씩 느려집니다. 곧 일렬로 규칙 바르고 아름답게 줄지은 플랫폼의 전등이 줄지어 이어집니다. 그런 광경이 점점 넓어져 가면서 두 사람은 하얀색 정류장의 커다란 시계 앞에 딱 맞춰 멈추게 됩니다.
 상쾌한 가을 시계의 다이얼에는 푸른 철침이 열한 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다들 기차에서 내리다 보니 객실 안이 텅 비어버립니다.
〔이십 분 정차〕시계 아래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릴까?" 조반니가 묻습니다.
"내리자."
 두 사람은 벌떡 일어서 문을 뛰쳐나와 개찰구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개찰구에는 밝은 보랏빛 전등이 혼자 빛날 뿐, 아무도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안을 들여다봐도 역장이나 역무원 같은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정류장 앞의 수정 세공처럼 보이는 은행나무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광장에서는 폭이 넓은 길이 은하의 푸른빛 안으로 이어집니다.
 방금 내린 사람들은 벌써 어디로 갔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그 하얀 길을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고 있자니 두 사람의 그림자는 네 방향에 창문이 있는 방 안의 두 기둥의 그림자처럼, 또 두 바퀴의 폭처럼 몇 개나, 정말로 몇 개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에서 보인 아름다운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캄파넬라는 그 아름다운 모래 한 움큼을 손바닥에 펼쳐 손가락으로 뒤섞으며 꿈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모래가 전부 수정이야. 안에서 작은 불이 타오르고 있어."
"그러게." 나는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걸까. 조반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대답합니다.
 강가의 조약돌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안이 비쳐서 확실히 수정이나 토파즈, 혹은 주름지거나 모서리에서 안개 같은 창백한 빛을 내뿜는 철옥 등이었습니다. 조반니는 달려서 물가로 다가가 물에 손을 담가봅니다. 그럼에도 은하의 물은 수소보다도 투명하고 맑았습니다. 분명히 흐르는 그 물줄기는 두 사람의 손목이 담긴 부근을 수은 색처럼 떠오르게 했고, 그 손목으로 만들어진 파도는 아름다운 인광을 내뿜으며 작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강 위쪽을 바라보니 참억새가 가득 핀 물가 아래에 마치 운동장처럼 평평한 하얀 바위가 강에 떠있었습니다. 대여섯 사람이 무언가를 파는지 매우는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서고 일어나고를 반복합니다. 무언가 도구처럼 보이는 것이 이따금 반짝 빛을 냅니다.
"가보자." 두 사람은 나란히 입을 모으고는 하얀 바위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얀 바위가 자리한 곳의 입구에는〔프리오신 연안〕이라는 반질반질한 표찰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건너편 물가에는 이따금 얇은 철 난간이 심어져 있고 깔끔한 목제 벤치도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 이상한 게 있어." 캄파넬라가 신기하다는 양 멈춰 서서는 바위에서 얇고 뾰족한 호두 같은 것을 주웠습니다.
"호두네. 잔뜩 있는걸. 흘러서 바위 안에 들어온 거 아닐까?"
"큼지막하다. 보통 호두보다 두 배는 되는 거 같아. 상처도 하나 없고."
"어서 저기로 가보자. 분명 뭔가 파내고 있는 걸 거야."
 두 사람은 뽀족뽀족한 검은 호두를 들고 방금 전 그곳으로 다가갑니다. 왼쪽 물가에는 파도가 완만한 번개처럼 불타며 다가오고, 오른쪽의 절벽에는 은이나 조개껍질 같은 것으로 한 면을 가득 매운 듯한 참억새의 귀가 흔들립니다.
 점점 가까워지니 키가 크고 지독한 근시 안경을 차고 장구두를 신은 학자 같은 사람이 수첩에 무언가를 바삐 적으며 곡괭이를 휘두르고 삽질을 하는 조수로 보이는 세 사람에게 열심히 지도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쪽 돌기는 박살나지 않도록 삽을 쓰도록, 삽을. 이런, 좀 더 멀리서 파봐. 안 돼, 이러면 안 된다고. 왜 그렇게 난폭하게 하는 거야."
 바라보니 하얗고 부드러운 바위 안에서 큼지막하고 푸른 동물뼈 같은 것이 옆으로 쓰러진 채로 절반 이상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편에는 두 발굽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가 깔끔히 사각으로 잘려 놓여 있었습니다. 번호는 열 개나 되었습니다.
"너희는 구경 왔니?" 학자로 보이는 사람이 안경을 빛내며 둘에게 물었습니다.
"호두가 잔뜩 있었지? 그건 대강 백이십만 년쯤 된 호두란다. 꽤나 젊은 편이지. 여기는 백이십만 년 전, 제3기쯤에는 연안이어서 말이지 요 밑에서는 조개도 나온단다. 지금 강이 흐르는 곳에 소금물이 오갔거든. 이 짐승은 여기 보스야. 이봐 이봐, 거기서는 곡괭이를 쓰면 안 되지. 정성스레 끌만 써주게나. 하여간에 요즘 보이는 소의 선조쯤 되는 녀석인데 과거에는 잔뜩 있었단다."
"박제할 건가요?"
"아니, 증명에 필요해서 말야. 우리야 이곳을 두터운 지층이고 백이십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도 여럿 찾았지만 다른 녀석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지층으로 안 보일 테니 말야. 바람이나 물 텅 빈 공간으로나 보이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하지만, 이봐. 거기도 삽은 쓰면 안 돼. 바로 밑에 늑골이 있을 거 아냐" 학자는 황급히 달려갑니다.
"이제 시간 됐어. 가자." 캄파넬라가 지도와 손목시계를 나란히 보이며 말합니다.
"그래. 그럼 저희는 실례하겠습니다." 조반니는 학자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합니다.
"그러니? 그럼 잘 가거라." 학자는 다시 바쁜 발걸음으로 이곳저곳을 오가며 감독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기차에 늦지 않도록 하얀 바위 위를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립니다. 숨도 헐떡이지 않고 넘어지는 법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달릴 수 있다면 온 세계를 다 다닐 텐데. 조반니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앞에 있던 강을 지나, 개찰구의 전등이 점점 커질 즘 본래의 객실 자리로 돌아와 방금 지나온 길을 창문 너머로 바라봅니다.

8. 새를 잡는 사람

"여기 앉아도 될까요?"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친절한 어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뒤편에서 들려옵니다.
 조금 너덜너덜한 갈색 외투를 입고 하얀 천으로 감싼 짐을 둘로 나누어 어깨에 짊어 맨 등이 굽은 적발의 사람이었습니다.
"네. 괜찮아요." 조반니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인사를 합니다. 그 사람은 수염 안에서 작게 웃으며 짐을 천천히 선반 위에 얹었습니다. 조반니는 어쩐지 굉장히 쓸쓸하고 슬퍼 조용히 정면의 시계를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앞쪽에서 유리 피리 같은 것이 울립니다. 기차는 이미 조용히 움직이던 것이었습니다. 캄파넬라는 객실 천장을 여기저기 둘러봅니다. 그중 한 조명에 검은 딱정벌레가 들러붙어 그 그림자가 천장에 크기 드리운 것이었습니다. 붉은 수염을 한 사람은 그립다는 투로 웃으며 조반니와 캄파넬라를 바라봅니다. 기차는 점점 빨라져서 참억새와 강을 번갈아 창밖에 드리웁니다.
 붉은 수염은 조금 머뭇거리며 둘에게 물었습니다.
"두 분은 어디 가시나요?"
"어디까지고 갑니다." 조반니는 조금 부끄럽다는 양 대답합니다.
"그거 좋지요. 이 기차는 실제로 어디까지고 가니까요."
"당신은 어디 가나요?" 캄파넬라가 갑자기 험악한 투로 묻기에 조반니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러자 건너편 자리에 있던 뾰족한 모자를 쓰고 큰 열쇠를 허리춤에 찬 사람도 힐끔 세 사람을 보고 웃기에 캄파넬라도 그만 얼굴을 붉히며 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붉은 수염은 화내는 법도 없이 뺨을 움찔거리며 대답합니다.
"저는 금방 내립니다. 저는 새를 잡는 걸로 먹고 사니까요."
"무슨 새인가요."
"학이나 기러기지요. 백로나 백조도 잡는답니다."
"학은 많나요?"
"많다마다요. 아까부터 우는데 못 들으셨나요?"
"못 들었네요."
"지금도 들리지 않습니까. 자,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두 사람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입니다. 덜컹덜컹 울리는 기차의 울음과 억새의 바람 소리 사이에 보글보글 물이 끓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학은 어떻게 잡나요."
"학인가요 아니면 백로인가요."
"백로입니다." 조반니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대답합니다.
"그 녀석은 간단하지요. 다들 은하수의 모래에 뭉쳐 멍하니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종 강으로 돌아오지요. 강가에서 기다려 이렇게 다리를 내리는 것을 땅에 닿기 전에 붙드는 겁니다. 그러면 백로는 굳어버린 채 편안히 죽게 되지요. 그 후는 아시지요? 석엽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석엽으로 만드나요? 박제하는 건가요?"
"박제는 아니지요. 다들 먹지 않습니까."
"이상한걸." 캄파넬라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이상할 것도 수상적을 것도 없습니다. 여차." 남자는 일어나 선반에서 짐을 꺼내 재빨리 풀어냅니다.
"자, 보시지요. 막 잡은 녀석입니다."
"정말로 백로인걸." 두 사람은 그만 목소리를 높입니다. 새하얀, 방금 전 본 북십자가처럼 빛나는 백로의 몸이 열 개, 살짝 몸을 벌리고 검은 다리를 모아 석상처럼 누워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네. 캄파넬라는 손가락으로 초승달처럼 감긴 백로의 하얀 눈을 만져봅니다. 머리 위에는 창만 같은 하얀 털이 빠짐없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새 사냥꾼은 다시 보자기를 빙글빙글 접고 줄로 묶습니다. 대체 이 주변 누가 백로 같은 걸 먹는 걸까. 조반니는 그런 생각에 물었습니다.
"백로는 맛있나요?"
"아무렴요. 매일 주문이 들어오지요. 하지만 기러기 쪽이 더 잘 팔립니다. 기러기 쪽이 훨씬 잘 생겼고 무엇보다 손이 안 가니까요. 여차." 새 사냥꾼은 또다시 다른 짐을 풀어 놓습니다. 그러니 노란색과 파란색의 얼룩무늬로, 무언가의 조명처럼 빛나는 기러기가 방금 전 백로처럼 부리를 모은 채 옆으로 누워 줄지어 있었습니다.
"이쪽은 금세 먹을 수 있지요. 어떤가요, 조금 드셔보시지요." 새 사냥꾼은 노란 기러기 다리를 가볍게 잡아당깁니다. 그러니 마치 초콜릿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히 분리됩니다.
"자, 한 번 드셔 보세요." 새 사냥꾼은 그렇게 두 개를 찢어 건넸습니다. 조반니는 조금 먹어보고 '뭐야 역시 과자잖아. 초콜릿보다 더 맛있지만 이런 기러기가 날아다닐 리가 없어. 이 남자는 어딘가의 들판에서 과자집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이 사람을 놀리면서 과자를 먹는 것도 마음에 걸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냠냠 먹어 갑니다.
"좀 더 드셔보시죠." 새 사냥꾼이 또다시 꾸러미를 꺼냅니다. 조반니는 좀 더 먹고 싶었지만,
"아뇨, 감사했습니다."하고 사양하니 새 사냥꾼은 반대편 자리의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건넸습니다.
"이거 참, 장사 도구를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그 사람은 모자를 벗으며 말합니다.
"아뇨, 괜찮다마다요. 어떻습니까. 올해는 새들이 좀 많이 오가나요?"
"대단하더군요. 어제 2시쯤에는 왜 등대를 규칙 이외의 시간에 끄는 거냐고 여기저기서 전화가 와 일에 지장이 생길 지경이었는데 아니, 제가 실수한 게 아니라 새들이 까맣게 뭉쳐 등불 앞을 지나니 별 수가 있습니까. 저는 말이죠, 야 이 멍청아 그런 건 나한테 따져도 소용없어. 망토를 입은 다리하고 입이 엄청 얇은 대장한테 따지라고 말해주었죠, 하하."
 참억새가 보이지 않는 탓에 저 멀리의 들판에서 빛이 들어옵니다.
"백로는 왜 손이 많이 가나요." 캄파넬라는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건 말이죠, 백로를 먹으려면" 새 사냥꾼이 둘을 돌아봅니다.
"은하수에 열흘간 걸어둬야 하기 때문이죠. 아니면 모래에 사흘에서 나흘 정도 담가놔도 되고요. 수은이 모드 증발하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건 새가 아니에요. 그냥 과자잖아요?"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캄파넬라가 그렇게 묻습니다. 새 사냥꾼은 어쩐지 크게 당황해서는,
"아이고 여기서 내려야 하는데."하고 말하며 일어서 짐을 챙기더니 금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어디 간 걸까."
 둘이 얼굴을 마주하니 등대지기가 싱긋 웃더니 살짝 고개를 내밀어 두 사람 옆의 창밖을 바라봅니다. 두 사람도 그쪽을 바라보니 방금 전 새 사냥꾼이 노란색과 파란색의 아름다운 인광을 내뿜는 한가득의 산떡쑥 위에 서서 진지한 얼굴로 양손을 펄쳐 하늘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저기 갔지요. 꽤나 기묘한 자세군요. 분명 또 새를 잡으려는 거겠지요. 기차가 가기 전에 어서 새가 내려오면 좋으련만." 그렇게 말한 순간 텅 빈 도라지 색의 하늘에서 방금 본 듯한 백로가 마치 눈처럼 깍깍 소리 지르며 한껏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그 새 사냥꾼은 기다렸다는 양 신이 나서는 양다리를 육십 도로 벌려 서서는 백로가 내려오며 모은 검은 다리를 양손으로 붙들어 천 보따리 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백로는 반딧불이처럼 보따리 안에서 푸른빛을 점멸하였지만 끝내 다들 희미한 흰색이 되어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잡아내는 새보다 잡지 못 해 무사히 은하수의 모래 위에 내려오는 쪽이 더 많았습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다리가 모래에 닿자마자 마치 눈이 녹아내리듯이 작아져 평평해지더니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처럼 모래나 자갈 위로 퍼져, 모래 위에 새 형태가 남아버립니다만 그것도 두세 번 점멸하는 사이 주위와 같은 색이 되어버립니다.
 새 사냥꾼은 20 마리 정도 보따리에 넣어서는 급작스레 양손을 들어서는 병대가 포탄에 맞아 죽은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새 사냥꾼 형태도 없이 사라지더니 되려
"기분 좋군요. 역시 몸에 적절히 맞는 일로 벌어먹어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은." 그런 목소리가 조반니 옆쪽에서 들려왔습니다. 돌아보니 새 사냥꾼은 방금 전 잡은 백로를 하나씩 하나씩 샇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기에서 단숨에 온 거에요?" 조반니는 어쩐지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어 물었습니다.
"어떻게라뇨. 올 수 있으니 온 거죠. 애초에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조반니는 곧장 대답하려 했습니다만 당최 어디서 온 건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캄파넬라도 얼굴을 붉히며 뭔가를 떠올리려 하는 눈치였습니다.
"아, 멀리서 오셨군요." 새 사냥꾼은 알겠다는 양 적당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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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조반니의 표

"슬슬 백조 구역도 끝이군요. 보시지요. 저게 그 유명한 알비레오 관측소입니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창밖을 가득 매운 은하수 안에 검고 커다란 건물이 네 동 서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지붕 위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투명한 사파이어와 토파즈 공이 원을 이루어 조용히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토파즈의 원이 점점 저 너머로 굴러 가고, 작고 푸른 원이 기차를 향해 다가와 두 원의 끝자락이 순식간에 겹쳐지더니 아름다운 녹색의 양면 돌출 렌즈의 형태를 이룹니다. 렌즈도 중앙부가 점점 부풀어 올라 푸른색이 토파즈의 정면까지 오기에 녹색의 중심과 노랗고 밝은 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원도 차례로 옆으로 벗어나, 방금 전 렌즈의 형태를 반대로 이루고는 이윽고 벗어나 사파이어는 반대편으로 굴러 가고, 노란 원이 기차로 다가 와 다시 방금 같은 바람이 되었습니다. 검은 관측소는 형태도 소리도 없는 은하의 물에 휘감겨, 정말로 잠에 든 것처럼 옆으로 조용히 눕는 것이었습니다.
"저건 물의 속도를 재기 위한 기구지요. 물도……" 새 사냥꾼이 그렇게 운을 뗐을 때.
"검표 협조 부탁드립니다." 붉은 모자를 덮어쓴 키 큰 차장이 어느 틈엔가 세 사람의 옆에 서있었습니다. 새 사냥꾼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종이를 꺼냈습니다. 차장은 그걸 보고는 곧장 시선을 돌려 '당신은?'하고 묻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조반니에게 손을 내밉니다.
"글쎄요." 조반니가 곤란해하며 머뭇거리고 있자니 캄파넬라는 너무나 간단히 회색의 작은 표 하나를 꺼냈습니다. 조반니는 당황하며 혹여 윗옷 주머니에 넣었나 싶어 하며 손을 넣어 확인을 해봅니다. 그러니 크게 접힌 종이가 나옵니다. 이런 걸 넣어두었나 싶으면서도 황급히 꺼내보니 사중으로 접힌 옆서 크기의 녹색 종이였습니다. 차장이 손을 내밀고 있기에 무엇이든 어떠냐 일단 주기나 해보자 하고 건네주니, 차장은 똑바로 자세를 고치고 정성스레 내용물을 열어 봅니다. 읽으면서도 윗옷의 단추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등대지기도 아래에서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조반니는 신분증이었나 싶어 가슴이 조금 뜨거워졌습니다.
"이건 삼차 공간의 분께 받으신 겁니까?" 차장이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에 안심한 조반니는 고개를 돌리고 쿡쿡 웃습니다.
"좋습니다. 남십자역에 도착하는 건 다음 세 시 경입니다." 차장은 조반니에게 종이를 돌려주고는 지나갑니다.
 캄파넬라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 황급히 고개를 내밉니다. 보고 싶은 건 조반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종이는 검은 덩굴무늬 안에 이상한 십자를 인쇄한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니 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새 사냥꾼도 옆에서 보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 이거 대단하군요. 이건 정말로 천상마저 갈 수 있는 표인데 말이죠. 천상뿐일까요.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통행권입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니 옳거니, 이런 불완전한 환상 제4차 공간의 은하 철도 따위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도 납득이 가는군요. 대단하신 분이신가 봅니다."
"저는 뭔지 잘 모르겠네요." 조반니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고는 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괜히 어색해져 캄파넬라와 둘이서 다시 창밖을 바라봅니다만 새 사냥꾼이 이따금 대단하다는 양 힐끔힐끔 바라보는 게 느껴졌습니다.
"곧 독수리 정류장이야." 캄파넬라가 건너편 강가의 작고 푸른 세 삼각표와 지도를 번갈아 보며 말했습니다.
 조반니는 영문도 모른 채 옆에 있는 새 사냥꾼이 조금 유감스러워졌습니다. 백로를 잡아 상쾌해졌다고 기뻐하거나 하얀 천으로 백로를 둘둘 포장하거나 표 한 장으로 깜짝 놀라 곁눈질하며 칭찬하거나一一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알지도 못 하는 새 사냥꾼을 위해 자신이 가진 먹을 것이든 무엇이든 주고 싶어졌습니다. 새 사냥꾼이 정말로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 빛나는 은하수에 서서 백 년 넘게 새를 잡아줘도 괜찮을 것만 같아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물으려 했지만 그래서야 너무 빤히 보이는 것만 같아 어쩌지 하고 생각에 잠겨 돌아보니, 이미 새 사냥꾼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선반 위에 올려놓은 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창밖에서 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백로를 잡을 준비라도 하나 싶어 서둘러 그쪽을 보지만, 밖에는 눈부신 가루와 하얀 참억새의 파도로만 가득했습니다. 새 사냥꾼이 쓴 넓지만 뾰족한 모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 어디 간 걸까?" 캄파넬라도 멍하니 그렇게 말합니다.
"어디로 간 걸까.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좀 더 그 사람이랑 이야기했으면 좋았으련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그 사람이 성가셨어. 그래서 더 괴로워." 조반니가 이런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사과 냄새나지 않아? 내가 사과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캄파넬라가 신기하다는 양 주위를 둘러봅니다.
"진짜 사과 냄새네. 그리고 찔레꽃 냄새도 나." 조반니도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나 창문으로 들어 오는 모양이었습니다. 가을이니 찔레꽃 냄새가 날 리도 없을 텐데. 조반니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고 있자니 머릿결이 반질반질한 여섯 살살쯤 되는 남자아이가가 빨간 재킷의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매우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비틀비틀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옆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키 큰 청년은 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같은 자세로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서있었습니다.
"어머, 여기는 어딜까. 예쁜걸." 청년의 뒤쪽에는 열두 살 쯤 되어 보이는 갈색 눈동자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검은 외투를 입은 청년의 팔에 기대어 신기하다는 양 창밖을 바라봅니다.
"여기는 란카샤이아야. 아니, 콘넥트컷주인가. 아니, 그래. 우리는 하늘로 온 거야. 하늘로 가는 거고. 봐볼래? 저건 천상의 표지판이야.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거니까."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기쁜 얼굴로 여자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굉장히 힘든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남자아이를 조반니 옆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여자아이에게 캄파넬라의 옆자리를 상냥히 가리킵니다. 여자아이는 순순히 그 자리에 앉고는 양손을 모읍니다.
"우리 누나한테 가는 거야?" 남자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얼굴을 바꾸어 등대지기 반대편에 앉은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청년은 마무 말도 못 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는 아이의 젖은 머리를 보았습니다. 여자아이는 대뜸 얼굴에 양손을 얹고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합니다.
"아빠랑 키쿠요 누나는 일이 많잖니. 곧 오실 거야. 그보다는 어머니가 줄곧 기다리고 계시잖아. 우리 착한 타다시는 지금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눈 내리는 아침에 다 같이 손잡고 빙글빙글 덧나무 덤불을 돌며 놀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어서 가서 만나 뵈어야지."
"응. 그치만 나는 배를 타고 싶었는데."
"배도 좋지. 하지만 보렴. 어떠니. 훌륭한 강이지? 여름에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며 쉴 때에 창문 너머로 하얗게 보이던 그거야. 이쁘지? 저렇게나 빛나고 있으니까."
 울던 누나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창밖을 봅니다. 청년은 가르쳐주듯이 남매에게 말합니다.
"이제 슬퍼할 거 없어. 우리는 이렇게 멋진 여행을 하며 하느님께 가고 있잖니. 그곳에는 밝고 좋은 냄새가 나는 훌륭한 사람만 있단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 보트에 탄 사람들은 분명 다들 살아서 걱정스레 기다리는 각자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기 집에 돌아갈 거야. 자, 얼마 안 남았으니까 기운 내서 재밌게 불러보자." 청년은 남자아이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어 모두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표정 또한 밝혔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디로 가시고요." 등대지기가 겨우 사정을 알겠다는 양 청년에게 묻습니다.
"그게 배가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았지 뭐예요. 아버지가 급한 일 때문에 두 달 먼저 본국으로 돌아가셔서 저희가 그 뒤를 따르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 과외를 했고요. 그런데 딱 십이일 째, 오늘인가 언제인가 하는 날에 배가 빙산에 부딪혀 기울더군요. 희미한 달빛이 있기는 했지만 안개가 매우 깊어서 말이죠. 그런데 좌현 쪽 보트가 쓸 수 없게 되어서 도무지 모두가 탈 수가 없더라고요 배가 곧 가라앉게 생겼으니 저는 필사적으로 작은 아이들부터 태워 달라 소리쳤습니다. 근처 사람들은 금방 길을 열고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셨죠. 하지만 보트에 가까워질수록 더 작은 아이들이나 부모 분들이 있어서 도무지 밀어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구하는 게 제 의무인 것 같았기에 앞에 있는 아이들을 밀어내려 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이대로 다 같이 신 앞에 서는 게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렇게 신께 등 돌리는 죄는 저 혼자 짊어지고 아이들은 구해주고 싶었습니다. 막상 보고 있자니 도무지 그럴 수 없었지만요. 아이들만 보트에 태운 어머니가 줄곧 아이들에게 키스하고 아버지가 슬픔을 참는 걸 보고 있자니 내장이라도 찢어지는 거 같더군요. 그러는 동안 배는 점점 기울어져 각오를 굳힌 저는 이 두 아이를 안고 떠오를 수 있을 만큼만 떠오른 채 배가 잠기는 걸 기다렸습니다. 누군가가 던진 구명 튜브가 하나 날아왔지만 미끄러져 저 너머로 가버렸어요. 저는 열심히 갑판의 손잡이까지 가서 셋이서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자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다양한 목소리가 수많은 언어로 다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때에 조금 큰 소리가 나는 것이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라 앉는 거구나 싶었더니 이곳에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합니다. 보트는 분명 무사히 구조되었겠죠. 숙련된 뱃사람들이 순식간에 배에서 벗어나셨으니까요."
 작은 기도 소리가 들리기에 조반니도 캄파넬라도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일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아, 그 큰 바다는 태평양 아니었을까. 빙산이 흐르는 북쪽 끝 바다에서 작은 배에 올라탄 채 바람과 얼어붙는 바다, 찢어질 듯한 추위와 싸우며 열심히 살아간 거야. 나는 이 미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침울해진 조반니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어떤 게 진짜 행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제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게 올바른 길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오르막도 내리막도 모두 진짜 행복으로 다가가는 길일 테니까요."
 등대지기가 위로합니다.
"네 그렇죠. 가장 큰 행복에 이르기 위한 수많은 슬픔은 다들 겪는 법이니까요."
 청년은 기도하듯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남매도 지쳤는지 자리에 기대어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맨발이었던 발에는 어느 틈엔가 하얗고 부드러운 신발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덜컹덜컹덜컹. 기차가 휘황찬란한 인광의 강가를 나아갑니다. 건너편 창문을 보니 들판이 마치 환등만 같습니다. 백 개, 천 개는 되어 보이는 크고 작은 다양한 삼각표, 그중에서도 큼지막한 것 위에는 붉게 점멸하는 측량기도 보였고 들판 끝자락에는 그러한 것들이 잔뜩 모여 창백하고 희미한 안개처럼 보입니다. 그 너머에서는 이따금 다양한 형태의 희미한 봉화 같은 것이 제각기 아름다운 도라지 색의 하늘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실로 상쾌하고 아름다운 바람이 가시나무의 향을 가득 전해줍니다.
"어떠십니까. 이런 사과는 처음이지요?" 반대편 자리에 앉은 등대지기가 어느 틈엔가 황금과 진홍색의 커다란 사과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들어 무릎 위에 얹었습니다.
"오,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훌륭하네요. 이 주변에서는 이런 사과가 자라나요?" 청년은 정말로 깜짝 놀랐는지 등대지기가 양손에 안은 한 움큼의 사과를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갸우뚱거리며 열심히도 바라봅니다.
"한 번 드셔보시지요."
 청년은 하나를 들고는 조반니와 캄파넬라를 봅니다.
"자, 거기 도련님께서도 드셔 보시지요."
 조반니는 도련님이란 말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다물었지만 캄파넬라는
"고마워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청년은 하나씩 들어 두 사람에게 건네줍니다. 조반니도 일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등대지기의 두 팔이 빈 덕에 이번에는 직접 하나씩 자는 남매의 무릎 위에 살며시 올려놓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훌륭한 사과는 어디서 자라나요?"
 청년은 여전히 사과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그야 이 주변에도 농업은 있습니다만 대개 혼자 자란 게 맛있는 법이지요. 농업도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씨앗을 뿌려두면 알아서 척척 자라니까요. 쌀도 태평양 부근처럼 껍질도 없고 열 배는 큰 데다가 냄새도 좋답니다. 다만 여러분이 오신 쪽에는 농업이 없군요. 사과도 과자도 조금은 있습니다만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향이 나고 모공부터 빠져 버리지요."
 남자아이가 살짝 눈을 뜨고는 말합니다.
"나 지금 엄마 꿈 껐다? 엄마가 멋진 책장이랑 책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 나를 보고 손을 내밀고 방긋방긋 웃었어. 엄마한테 사과 주워줄까? 하고 말하니까 깨버렸어. 아, 아직 기차 안이구나."
"거기 사과 있지? 이 아저씨가 주셨단다." 청년이 말합니다.</rt>
"고맙습니다, 아저씨. 어라, 카오루 누나는 아직 자고 있네. 내가 깨울게. 누나, 이거 봐. 사과받았어. 일어나 봐."
 누나는 웃으며 일어나 눈부시다는 양 양손을 눈에 얹고 사과를 보았습니다. 남자아이는 마치 파이라도 먹듯이 사과를 먹습니다. 모처럼 깎아낸 아름다운 껍질은 코르크 따개처럼 빙글빙글 바닥에 떨어지면서 회색빛을 내뿜더니 증발해버립니다.
 두 사람은 사과를 소중히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너머의 강가에 푸르게 우거진 커다란 수풀이 보입니다. 그 가지들은 잘 익어 빨갛게 물든 둥근 과일을 잔뜩 품고 있었고, 수풀 중앙에는 높은 삼각표가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숲 안에서는 비브라폰이나 실로폰과 비슷한 뭐라 말로 다 못 할 아름다운 음색이 녹아내리듯이 바람에 실려 흘러 들어옵니다.
 청년은 오싹해졌는지 몸을 부들부들 떱니다.
 조용히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노란색이나 녹색의 밝은 평원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안개가 하얀 촛농처럼 햇빛 위를 긁어내듯이 뻗어 나갑니다.
"저 까마귀 좀 봐." 캄파넬라의 옆에 앉은 여자아이 카오루가 그렇게 외쳤습니다.
"카라스가 아니라 까치란다." 캄파넬라가 또다시 타이르듯이 그렇게 말하기에 조반니는 그만 웃음을 터트립니다. 여자아이는 겸연쩍은 듯했습니다. 푸른색의 강 위에 검은 새가 잔뜩 줄지어 강의 미광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까치네요. 머리 뒤편의 깃털이 쭉 뻗어 있으니까요." 청년이 맞춰주듯 말합니다.
 건너편 푸른 숲속의 삼각표가 기차의 정면까지 왔습니다. 그때, 기차 저 뒤편에서 귀에 익은 찬미가가 들려옵니다. 제법 많은 사람이 합창하는 듯합니다. 청년은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이더니 노래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틀지만 곧 생각을 바꾸어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카오루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습니다. 어쩐지 조반니마저 코가 간질간질합니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랫소리는 점점 강해져만 갑니다. 그만 조반니도 캄파넬라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푸르게 빛나는 감람숲이 보이지 않는 은하수 너머로 사라져 갑니다. 숲에서 들려오던 요상한 악기 소리도 기차 소리나 바람 소리에 묻혀 희미해져 갔습니다.
"아, 공작이다."
"그래, 많이 있네." 여자아이가 대답합니다.
 조반니는 작디 작아져 이제는 녹색 조개처럼 보이는 숲 위에서 이따금 푸른 빛을 내뿜는 공작이 몸을 펼치거나 접는 빛의 반사라를 지켜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공작 목소리도 들렸지." 캄파넬라가 카오루에게 말합니다.
"응, 서른 마리는 있었어. 하프처럼 들린 건 전부 공작이었어." 여자아이가 대답합니다. 조반니는 조금 말로 다 못 할 슬픔에 휩싸여 그만, "캄파넬라, 여기서 뛰어 내려 놀다 가자."고 무서운 얼굴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강이 둘로 갈라집니다. 어두운 섬 한 가운데에 높디 높은 망루가 자리하여 그 위에 느슨한 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양손에 든 붉은 깃발과 푸른 깃발을 올려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조반니가 바라보는 동안에는 붉은 깃발을 쭉 뻗고 있던 남자는, 붉은 깃발을 살짝 내리고는 뒤로 숨기듯 들었던 푸른 깃발을 높게 들어 올리더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열렬히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공중에서 쏴아아하는 빗소리가 울리더니 강 너머에서 포환처럼 새까만 무언가가 수없이 날아 날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조반니는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어 그 광경을 올려다봅니다. 몇 만은 되어 보이는 새가 제각기 무리를 이룬 채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라지 색 하늘 아래를 시끄럽게 울며 지나갑니다.
"새가 날아가고 있어." 조반니가 창밖을 향해 말합니다.
"정말이네." 캄파넬라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망루 위에 선 느슨한 옷의 남자는 붉은 깃발을 살짝 들고는 광기 넘치게 흔들었습니다. 그러니 새무리가 지나지 않게 되고 그와 동시에 강 아래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잠시간 조용해집니다. 붉은 모자의 신호수는 다시 한 번 파란 깃발을 휘두르며 소리칩니다.
"날아라, 새야. 날아라, 새야." 그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수만 마리의 새무리가 하늘을 똑바로 날아갑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내민 중앙의 창문으로 여자아이 또한 고개를 내밀어 아름다운 뺨을 빛내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어머, 새가 잔뜩 있어요. 예쁘기도 해라." 여자아이는 조반니에게 그렇게 말하지만 조반니는 건방지다는 생각에 대답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여자아이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캄파넬라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빼고는 지도를 훑습니다.
"저 사람은 새를 향해 가르쳐주는 건가요?" 여자아이가 캄파넬라에게 묻습니다.
"길을 건너는 새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야. 분명 어디서 봉화가 오르고 있을걸?" 캄파넬라가 조금 애매하게 대답합니다. 그렇게 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조반니는 이미 고개를 뺐지만 다시 밝은 빛을 시야에 들으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왜 계속 이렇게 슬픈 걸까. 마음을 좀 더 크고 곱게 써야 하는데. 강 너머의 불이 꼭 안개처럼 보이는걸. 저긴 분명 조용하고 차갑겠지. 저걸 보며 마음을 다 잡는 거야.' 조반니는 뜨겁게 올라 아픈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고는 고개를 돌립니다. '정말 나랑 같이 어디까지고 갈 사람은 없는 걸까. 캄파넬라도 저런 여자아이랑 즐겁게 이야기나 하고 있고. 정말 괴로운걸.' 조반니의 눈은 다시 눈물로 가득 차, 은하수도 마치 저 멀리 떠나가는 것처럼 희미하고 하얗게만 보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때 기차는 점점 강에서 멀어져 강가 위를 지나는 것이었습니다. 건너편의 강가도 검은색 절벽이 아래로 흐르는 강류를 따라 점점 높아져 갑니다. 커다란 옥수수나무도 힐끔 보입니다. 그 잎은 빙글빙글 늘어져 잎 아래에는 아름다운 녹색 화포가 붉은 털을 내뱉으며 진주 같은 열매를 달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 이제는 절벽과 선로를 구분 짓는 하나의 행렬이 됩니다. 조반니가 그만 창문에서 고개를 빼고 반대쪽 창문을 볼 적에는 아름다운 하늘 들판의 지평선 끝까지 가득 심어진 큼지막한 옥수수나무가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그 훌륭한 잎 끝자락에는 마치 한낮 동안 햇빛을 듬뿍 머금은 금강석 같은 이슬이 적빛과 녹빛으로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캄파넬라가 "옥수수네"하고 조반니에게 말합니다만 조반니는 도무지 마음이 풀리지 않아 미적지근히 선 채 들판을 바라보며 "그러게"하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기차는 점점 조용해져 몇 개의 신호기를 지나 자그마한 정류장에 멈춰 섭니다.
 정면의 푸른 시계는 두 시를 가리킵니다. 바람이 없는 탓에 진자도 움직이지 않고 기차도 조용히 멈춰 선 정숙한 들판 안에서 째깍째깍 초침 소리만이 올곧게 시간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저 먼 들판 너머에서 자그마한 선율이 진자 소리를 메우며 가는 실처럼 흘려 들어옵니다. "신세계로부터야.' 언니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차 안에서는 검은 옷을 입고 키가 큰 청년도 다른 사람들도 상냥한 꿈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조용하고 좋은 곳에서도 왜 나는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걸까. 왜 이렇게 나 홀로 쓸쓸한 걸까. 캄파넬라도 너무해. 나랑 같이 탔으면서 저 여자애하고만 이야기하잖아. 힘들어 정말.' 조반니는 다시 한 번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바깥이 훤히 뚫려 보이는 유리 같은 기적汽笛 소리와 함께 기차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캄파넬라도 쓸쓸히 별보기의 노래를 휘파람 붑니다.
"네, 이 부근은 지독한 고원이니까요." 뒤 쪽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막 눈을 뜬 것처럼 잡담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옥수수도 봉으로 구멍을 뚫어두지 않으면 살 수 없답니다."
"그런가요. 강까지는 얼마나 되려나요."
"글쎄요. 이천 척에서 육천 척쯤 되겠지요. 빼곡한 협곡이랍니다."
 그래. 여기는 콜로라드의 고원이지 않을까. 조반니는 그만 그런 생각을 해버립니다. 캄파넬라는 여전히 쓸쓸한 휘파람을 불었고 여자아이는 망으로 감싼 사과 같은 얼굴로 조반니의 시선을 뒤쫓습니다. 급작스럽게 옥수수가 사라지고 커다랗고 검은 들판이 가득 펼쳐집니다. 신세계로부터는 지평선 너머에서 솟아올랐고, 한 인디언은 하얀 깃털을 머리에 차고 수많은 돌을 팔에 달고, 가슴에 작은 화살을 단 채 나 홀로 검은 들판 속을 달려 열심히도 기차를 뒤쫓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인디언이군요. 인디언이에요. 한 번 보세요."
 검은 옷의 청년도 눈을 뜹니다. 조반니도 캄파넬라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달려온다. 달려오고 있어. 뒤쫓아 오는 걸까?"
"아니, 기차를 쫓는 게 아니란다. 사냥이나 춤을 추고 있는 거야." 청년은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잊은 것처럼 일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했습니다.
 인디언은 정말로 반쯤 춤추는 듯이 보였습니다. 애초에 달린다 하여도 똑바로 걷는 것이 좀 더 경제적이며 그럴듯하게 보일 것입니다. 눈에 띄는 하얀 깃털이 앞으로 쓰러지려 하더니 인디언이 똑바로 자세를 잡고는 공중을 향해 활시위를 잡아당깁니다. 학 한 마리 하늘하늘 떨어져서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 인디언이 크게 벌린 양팔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인디언은 자리에 멈춰 서 기쁘게 웃음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그 학을 들고 이쪽을 보더니 그 그림자가 점점 작아집니다. 전봇대의 애자가 반짝반짝 이어져 두 번쯤 빛나더니 다시 옥수수 숲이 나옵니다. 창밖을 바라보니 기차는 높디높은 절벽 위를 달리고 있었고, 협곡 밑바닥에는 폭이 넓고 밝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주변부터는 다시 내려갑니다. 이번에는 저 수면까지 단숨에 내려가니 간단하지 않지요. 이만한 경사이니 기차는 결코 저 너머에서 이쪽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보세요, 조금씩 빨라지고 있죠?"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기차가 아래로아래로 내려갑니다. 절벽 끝자락에 철도가 깔려 밝은 강이 아래로 보입니다. 조반니의 마음도 점점 밝아져 갔습니다. 기차는 작은 오두막 앞을 지나 그 앞에 시무룩한 아이 하나가 서서 기차를 바라볼 때는 그만 호오, 하는 소리를 낼 정도였습니다.
 밑으로밑으로 기차가 달려갑니다. 객실의 손님들은 뒤로 반쯤 쓰러지며 등받이에 매달립니다. 조반니는 그만 캄파넬라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은하수는 어느샌가 기차의 바로 옆까지 와있었습니다. 어지간히도 격하게 흘려 왔는지 반짝반짝 빛나며 흐릅니다. 희미한 강가에 패랭이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습니다. 기차는 드디어 천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합니다.
 반대편과 이쪽의 강가에 별과 곡괭이가 그려진 깃발이 서있었습니다.
"저건 무슨 깃발일까." 조반니가 겨우 운을 뗐습니다.
"글쎄 모르겠네. 지도에도 없는 걸. 철로 된 배가 놓여 있어."
"그러게."
"다리를 걸 곳을 표시한 거 아닐까요." 여자아이가 말했습니다.
"저건 공병의 깃발이네. 가교를 연습하는 거야. 그런데 병대가 보이지 않는걸."
 그때 반대편 강가의 조금 하류 쪽에서 보이지 않는 은하수가 빛나더니 기둥처럼 높게 솟으며 격렬한 소리가 울렸습니다.
"발파야 발파." 캄파넬라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기둥처럼 솟은 물은 보이지 않게 되어 커다란 연어나 송어가 하얀 배를 반짝반짝 빛내며 공중을 날아 원을 그리며 물에 떨어졌습니다. 조반니는 그만 날아오르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가벼워져 말했습니다.
"하늘의 공병 대대 같은걸. 송어가 펄쩍 뛰어오르잖아. 이렇게 유쾌한 여행은 처음인걸. 아주 좋아."
"가까이서 보면 이 정도 크기는 되지 않을까. 이 물 안에도 물고기가 잔뜩 있구나."
"작은 고기도 있을까요?" 여자아이가 이야기에 끼어들었습니다.
"있을 거야. 큰 게 있으니까 작은 것도 있겠지. 하지만 멀어서 그런지 작은 건 보이지 않네." 조반니는 기분이 썩 풀어져 즐겁게 웃으며 대답합니다.
"저거 쌍둥이자리의 궁 아닐까?" 남자아이가 갑자기 창밖을 보며 말했습니다.
 오른쪽의 낮은 언덕 위에 자그마한 수정으로 만든 듯한 두 개의 궁이 나란히 서있었습니다.
"쌍둥이자리의 궁이라니?"
"전에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어. 작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궁 두 개라고 했으니까 분명해."
"들어보고 싶네. 쌍둥이자리가 뭘 어쨌는데?"
"나는 알 거 같네. 쌍둥이자리가 들판으로 놀러 나갔다 다툰 거지?"
"아니야. 엄마가 말해줬어. 은하수 강가에……"
"거기서 유성이 슈슈웅 하고 온 거지?"
"너도 참. 그건 다른 이야기잖니."
"그럼 지금은 피리를 불고 있을까."
"지금 바다에 갔어."
"아니에요, 이미 바다에서 나왔다고요."
"그러네. 나도 아니까 내가 이야기할게."
 반대편 강가가 살짝 붉어졌습니다. 버드나무가 검게 물들고 보이지 않는 은하수도 이따금 달군 바늘처럼 붉게 빛났습니다. 강가의 들판에 커다란 불이 난 것입니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높고 차가운 도라지 빛 하늘마저 태워버릴 것만 같습니다. 루비보다도 붉고 청명하게, 리튬보다도 아름답고 정취 있게 불은 타오릅니다.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높고 차가운 도라지 빛 하늘마저 태워버릴 것만 같습니다.
"저건 무슨 불일까. 뭘 태어야 저렇게 붉게 빛날 수 있는 걸까." 조반니가 말했습니다.
"전갈의 불이야." 캄파넬라가 다시 지도에서 목을 빼며 대답합니다.
"어머, 전갈의 불은 저도 알고 있어요."
"전갈의 불이라니?"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전갈이 불타 죽는 거예요. 그 불이 아직도 불타고 있다고 아버지가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전갈은 벌레잖아."
"네, 전갈은 벌레에요. 하지만 좋은 벌레에요."
"전갈은 좋은 벌레 아냐. 박물관에서 알콜에 박제된 걸 봤는걸. 꼬리 끝이 뾰족해서 거기에 찔리면 죽는다고 선생님이 그랬어."
"맞아요, 하지만 좋은 벌레에요.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옛날에 발도라 들판에 한 마리 전갈이 있었어요. 그 전갈은 벌레든 뭐든 죽여서 먹는 것을 살아갔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날 족제비의 눈에 들어 잡아먹힐 뻔했대요. 전갈은 열심히 도망치고 또 도망쳤지만 끝내는 족제비한테 붙잡힐 뻔했어요. 그때 갑자기 눈앞에 우물이 나타나 그 안으로 떨어져 버렸대요. 전갈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물에 빠져 갔어요. 그때 전갈은 이렇게 말하며 기도했다고 해요.
 아, 나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을 뺏었던가. 그런 주제에 막상 자신이 족제비에게 붙잡히려 하니 열심히 도망치다니. 그리고 끝내는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아, 이제는 방법이 없어. 나는 왜 내 몸을 조용히 족제비에게 건네주지 않았을까. 그러면 족제비도 오늘 하루를 살아갔을 텐데. 신이시여, 제 목소리를 들어주소서. 이렇게 허무하게 거두지 마시옵고, 다음이 있다면 부디 제 몸과 목숨을 모든 생명의 행복을 위해 써주시옵소서. 그랬더니 전갈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몸이 새빨갛고 아름답게 불타는 불이 되어 밤의 어둠을 밝히는 걸 보게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 불이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다고 하셨고요. 분명 저 불이 그 불일 거예요."
"그래, 저기 좀 봐. 저 삼각표가 마침 전갈 형태로 줄지어 있네."
 죠반니는 커다란 불꽃 너머에 세 개의 삼각표가 전갈의 팔처럼, 이쪽에 다섯 개의 삼각표가 전갈의 꼬리처럼 줄지어 있는 걸 보았습니다. 전갈의 불은 새빨갛고 아름답게, 소리도 없이 밝고 환하게 타올랐습니다.
 그 불이 점점 뒤로 멀어지면서 다들 말없이 조용히 귀만 기울입니다. 시끌벅적한 다양한 악기 소리, 풀과 꽃의 향기, 휘파람과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 갖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치 가까운 마을에서 축제라도 벌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켄타우르스 이슬을 떨쳐라." 갑자기 이제까지 조반니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남자아이가 창문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놉힙니다.
 남자이아의 시선 너머에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새파란 가문비나무가 서있고 그 안에 수많은 꼬마 전구가 마치 반딧불이처럼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맞다, 오늘 밤은 켄타우르스 축제였지."
"그래. 여기는 켄타우르스 마을이야." 캄파넬라가 곧장 말했습니다.

(이하 원고 한 장? 미 존재)
"내가 던지면 절대 안 빗나가."
 남자아이가 허세 부리듯 말했습니다.
"곧 서전 크로스네. 내릴 준비하자." 청년이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나 조금 더 타고 싶어." 남자아이가 말했습니다. 캄파넬라 옆자리의 여자아이는 허둥지둥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지만 역시 조반니나 캄파넬라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듯했습니다.
"여기서 내려야 해." 청년은 단호하게 입을 다물고는 남자아이를 내려보았습니다."
"싫어. 좀 더 타고 갈 거야."
 조반니가 참지 못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하고 같이 타고 가자.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는 표를 가지고 있거든."
"우린 여기서 내려야 해요. 천상에 가야 하니까." 여자아이가 쓸쓸한 투로 말했습니다.
"천상 따위 안 가면 되잖아. 천상보다 좋은 곳을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 선생님도 말씀하셨어."
"하지만 엄마도 먼저 갔고 게다가 하느님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걸요."
"그런 하느님은 가짜 하느님이야."
"오빠 하느님이야말로 가짜 하느님이야."
"아니야."
"당신 하느님이 따로 있나요?" 청년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잘은 몰라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단 한 사람뿐인 하느님이에요."
"그야 진짜 하느님은 한 분뿐이죠."
"아아, 그런 게 아니라 진짜 하나 뿐인 진짜 하느님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 진짜 하느님 앞에서 저희와 마주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청년은 경건히 양손을 모았습니다. 여자아이도 그 동작을 따라 합니다. 다들 이별이 정말로 아쉬운지 얼굴이 살짝 창백해 보였습니다. 조반니는 그만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려버렸습니다.
"자, 다들 준비 다 했니? 이제 곧 서전 크로스란다."
 그때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은하수의 하류에 푸른색이나 감귤색의 갖은 빛으로 빼곡한 십자가가 꼭 하나의 나무처럼 강 안에 뻗어 빛났습니다. 그 위에는 푸른 구름이 둥근 원이 되어 후광처럼 빛났습니다. 기차 안이 술렁입니다. 다들 복십자 역을 찾았을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아이 같은 환성이나 말로 다 못 할 깊은 탄식 같은 것이 들려옵니다. 십자가는 조금씩 창문의 정면으로 자리를 옮겨 갔고, 사과 열매 같은 푸른 원구름도 부드럽고 천천히 회전하는 게 보였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밝고 즐거운 목소리가 울려 다들 멀고 차가운 하늘 너머에서 투명하고 상쾌한 나팔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신호나 전등 속에서 기차는 점차 느려졌고 끝내 십자가의 중앙에 도착해 멈추었습니다.
"자, 내리자." 청년은 남자아이의 손을 끌고 출구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자아이가 돌아 보며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잘 가." 조반니는 울고 싶은 걸 참으며 화라도 난 것처럼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여자아이는 괴롭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번 돌아보았지만 그 이후로는 조용히 기차를 나섰습니다. 객실은 벌써 절반 가까이 비어 버렸고 쓸쓸하고 텅 빈 바람이 불어와 빈 공간을 메우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바깥을 보고 있자니 다들 질서 바르게 줄을 서 십자가 앞의 강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신성하고 하얀 빛을 두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은하수를 건너 손을 뻗는 모습을 둘이서 봅니다. 하지만 유리가 덜컹거리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은빛 안개가 하류에서 흘러 들어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저 수많은 호두나무 잎이 빛을 내며 안개 안에 줄지어 있었고, 그 안에서 황금 원광을 가진 전기 다람쥐가 귀여운 얼굴을 들이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안개가 걷힙니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인지 작은 전등 행렬이 달린 길이 나타납니다. 길은 선로를 따라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그 등불 앞을 지나갈 때에는 콩알 같은 불빛이 인사라도 하듯이 꺼지더니 두 사람이 지나가자 다시 불빛이 들어옵니다.
 돌아보니 둘이 지나온 십자가는 완전히 작아져 있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청년과 아이들은 하얀 물가에 무릎을 꿇고 있을까요, 아니면 어딘지 방향도 모를 천상으로 올랐을까요. 희미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조반니는 깊게 한숨을 내쉽니다.
"캄파넬라 또 우리 둘만 남았네. 어디로 가게 되든 함께 있자. 이제 그 전갈처럼 모두의 행복을 위한 거라면 내 몸 따위 백 번은 태워도 상관 없어졌어."
"응, 나도 마찬가지야." 캄파넬라의 눈에는 아름다운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행복이란 게 대체 뭘까." 조반니가 말했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캄파넬라가 작게 말합니다.
"우리 잘 하자." 조반니는 가슴 한가득 새로운 힘이 차오른 것처럼 크게 심호흡하며 말했습니다.
"아, 저기 석탄자루야. 하늘의 구멍." 캄파넬라가 고개를 돌리 듯이 은하수의 한 곳을 가리켰습니다. 조반니는 그 손가락을 따라 보았다 철렁 놀랐습니다. 은하수 한 곳에 커다랗고 검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나 깊은지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비벼봐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고 그저 눈만 아파집니다. 조반니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저런 커다란 어둠도 무섭지 않아. 모두의 행복을 찾으러 갈 거야.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우리 둘이서."
"응, 꼭 갈게. 저 아름다운 들판을 봐. 다들 모여 있어. 저기가 진짜 천상인 거야. 우리 엄마도 있어." 캄파넬라는 창문 너머 멀리서 보이는 아름다운 들판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조반니도 따라 보지만 그곳에는 하얀 안개가 깔려 있어 도무지 캄파넬라의 말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말로 다 못 할 쓸쓸함에 살짝 고개를 돌리니 저 너머 강가에 두 개의 전봇대가 두 팔을 팔짱 낀 것처럼 붉은 완목을 단 채 서있었습니다.
"캄파넬라, 같이 가자." 조반니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지만 캄파넬라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캄파넬라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그저 검은 융단만이 깔려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마치 대포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 하도록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있는 힘것 가슴에 있는 것을 토해내고 오열하며 울었습니다. 주변은 새까맣게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죠반니는 눈을 뜹니다. 본래의 언덕에서 풀들에게 붙잡혀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슴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고 뺨에는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조반니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거리는 여전히 수많은 등불로 가득했지만 그 빛은 어쩐지 아까보다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방금 전 꿈에서 걸은 은하수 또한 변함없이 하얗고 희미했습니다. 새까만 남쪽 지평선 위는 한층 더 탁했고, 그 오른쪽에서는 전갈자리의 붉은 별이 빛납니다. 하늘의 위치는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조반니는 곧장 언덕을 달려 내려갑니다. 아직 저녁도 드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가 떠오른 것입니다. 검은 소나무 숲을 지나 하얀 목장의 울타리를 지나 입구를 통해 어두컴컴한 축사 앞까지 옵니다. 누가 막 돌아왔는지 방금 전까지 없었던 차 하나가 통 두 개를 실은 채 놓여 있었습니다.
"실례합니다." 조반니가 말합니다.
"네." 하얗고 품이 넓은 사람이 곧장 나와 앞에 섭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오늘치 우유가 오지 않아서요."
"이런,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곧장 안쪽으로 들어 가 우유병 하나를 가져 와 조반니에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오늘 낮 쯔음에 그만 아기소의 울타리를 열어 둔 탓에 어미 소한테 가서 절반 정도 마셔버렸지 뭡니까……" 그 사람은 웃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잘 받겠습니다."
"네,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아뇨아뇨."
 조반니는 아직 뜨거운 우유병을 양손으로 감싸듯이 들고 목장의 울타리를 넘어갑니다.
 그렇게 한 동안 숲길을 지나 대로변까지 나와 또 다시 잠시 걷자니 십자로가 나옵니다. 오른쪽 길 구석에는 방금 전 캄파넬라와 친구들이 쥐참외를 흘리러 간 강에 걸린 커다란 다리의 망루가 밤하늘에 우두커니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로 주위 길가나 가게 앞에서 여자들이 일곱여덟 명식 모여 다리를 보며 무언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리 위도 다양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어째서인지 가슴이 단숨에 식어내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 있었나요?"하고 소리치듯이 물었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어요. 한 명이 대답하니 사람들이 일제히 조반니 쪽을 봅니다. 조반니는 정신 없이 다리를 향해 달렸습니다. 사람들이 다리 위에 빼곡하여 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순사도 나와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리듯 넓은 강가로 내려왔습니다.
 강의 물가를 따라 수많은 빛이 바쁘게 위아래로 파도쳤습니다. 어두운 건너편 강가에도 일곱여덟 불빛이 꿈틀거립니다. 그 중앙을 쥐참외의 빛도 없는 강이 작은 소리와 함께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의 가장 하류 쪽 육지가 모인 인파에 새까맣게 물들어 있습니다. 조반니도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캄파넬라와 함께 있던 마르소와 만났습니다. 마르소도 조반니를 향해 달려옵니다.
"조반니, 캄파넬라가 강에 빠졌어."
"왜, 언제."
"자넬리가 배 위에서 쥐참외를 강에 밀쳐내려 했어. 그때 배가 흔들려 빠진 모양이야. 그랬더니 캄파넬라가 곧장 뛰어 들어서 자넬리를 배로 밀어 준 거고. 자넬리는 배 끝에 매달렸어. 하지만 캄파넬라가 아직도 보이지 않아."
"다들 찾고 있는 거 아냐?"
"그래, 다들 곧장 왔지. 캄파넬라의 아버지도 오셨고. 하지만 찾을 수가 없어. 자넬리는 우리 집으로 데려갔고."
 조반니는 인파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푸르고 뾰족한 턱을 지닌 캄파넬라의 아버지가 검은 옷을 입은 채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오른손에 찬 시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다들 가만히 강을 바라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조반니는 다리가 벌벌 떨렸습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초경 램프가 바쁘게 왔다 갔다 합니다. 검은 강은 작은 파도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하류에서 바라보는 강은 은하가 크게 찍힌, 물이 없는 진짜 하늘처럼 보였습니다.
 조반니는 캄파넬라가 이미 그런 은하 바깥으로 가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캄파넬라가 "나 수영 좀 해."하는 말과 함께 파도 사이에서 빠져나오거나 어딘가 눈이 닿지 않은 육지에 도착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캄파넬라의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제는 힘들겠군요. 떨어진지 사십오 분이나 되었으니까요."
 조반니는 그만 박사 앞에 서서 저는 캄파넬라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저는 캄파넬라와 함께 걸었어요 하고 말하려 했지만 목이 매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박사는 조반니가 인사하러 온 거라 생각했는지 잠시 조반니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반니 군이군요. 오늘 밤은 감사했습니다."하고 정성스레 말했습니다.
 조반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숙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오셨나요." 박사는 시계를 꽉 쥔 채 물었습니다.
"아뇨." 조반니는 작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그제 아주 기운찬 편지를 받았으니 오늘쯤에는 도착해야 했을 텐데요. 배가 늦어지는 걸까요. 조반니 군, 내일 방과 후에 친구분들과 함께 놀러 와주세요."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은하를 가득 머금은 강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조반니는 온갖 것으로 가슴이 가득 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박사 앞을 벗어나 서둘러 어머니께 우유를 전하고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마을을 향해 황급히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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