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실존, 동물
무겁다. 근래 읽은, 혹은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무거운 감개를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겁고, 무섭다. 그야 뭐, 더한 책들을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고 있는 걸지 몰라도.
별달리 유행에 편승한 독서는 아니다. 노벨상 이야기로 서점가가 시끌거려도, 늘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우선해왔다. 주위에 휩쓸리지 않는다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제 좋을 책 밖에 안 읽는다는 뜻으로. 하지만 유행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여자친구가 보내준 동영상이었다. 정신의학과 의사들이 책을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여자친구는 과거에 정신병력을 앓은 모양인데, 어렸던지라 그 병상을 온전히는 파악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단지 와닿는 여러 증상들을 어떤 것인가 하고 골똘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런 와중에 마침 책장에 먼지 쌓인(내가 산 건 아니니 분명 동생 책이리라) 이 책이 있길래 손에 들어보았다. 한참 품귀가 이어졌으니 운이 좋았지 싶다. 별안간 그런 계기로 든 책이니, 제법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도 내용이 무거워 읽는데 조금 난항을 겪었다.
이렇게나 마음이 무거운 데에는 물론, 현실적이고 섬세한 묘사도 제법 공헌을 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 속에서 어떠한 악인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물론 주연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필히 이 모든 내용의 시작일 테니——에 있을까. 당연하지만 1부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인 남편이나, 2부 <몽고반점>의 주인공의 형부도 마찬가지다. 1, 2부를 다 읽었을 쯤에는 그들을 악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외려 3부를 읽고 난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도 단지 실존과 실재 사이에서 발버둥친 것에 지나지 않을까.
그런 걸 가장 크게 느끼게 한 게 바로 영혜였다. 책을 읽은 계기가 계기인 만큼, 필자는 그녀를 피해자이자 약자로 여겼다. 실제로는 피해자일지언정 약자는 아니었다. 되려 책 전체에서 가장 강하며, 가장 실재해 있다 해도 좋지 않을까.
그 시작을 할애하자면, 영혜는 일관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가고 싶다. 식물이 되고 싶다, 동물적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척척 행동으로 옮겨 간다. 채식주의자가 되고, 꽃이 되기 위해 몽고반점을 덧칠하고, 나무가 되려 물구나무를 선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위를 휘두를지언정,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습은 명백한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을 다하고 있다. 단지 그 방향만이 다를 뿐이다.
한 편, <채식주의자>의 남편은 어떨까. 그는 사회인으로서의 방향을 관철하고 있다. 남이 맞춘 틀 안에서 소위 “평범”하게 살아 가고 싶어한다. 때문에 아내의 ‘튀는’ 행동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모든 사회적 절차를 정리한 뒤에는 한없이 속이 후련해 했다. 이 역시 제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나 평범을 추구하던 사람이, 아내를 지킨다는 사회의 평범함을 끝내 져버린 게 아이러니할지언정.
<몽고반점>의 주인공인 형부는 얼핏 영혜와 대칭을 이루는 듯 그 조화를 이뤄내고 만다. <나무 불꽃>에서 아내가 둘의 성관계서 서서히 색욕을 지워간 것도 그때문이지는 않을까. 영혜가 식물이 되고 싶었다면, 그는 동물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이 역시 방향은 다를지언정 거침 없는 전진임은 다를 바가 없다. 왜, 멋잇감을 먹기 위해 식물로 의태하는 동물도 있지 않은가.
소설은 1, 2부를 통해 이러한 다른 방향성을 보여주며, 그 방향성 자체만 보이게 만든다. 때문에 당연히 영혜를 쫓아가며 두 사람의 등만 보게 된다.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남자도, 심지어는 자신의 위치도.
그러나 <나무 불꽃>에서 독자는 다른 위치에 앉을 수 있게 된다. 이름 조차 받지 못한 주인공은, 그저 수많은 나무에 얽매여 있을뿐이다. 살기 위해 장녀로서 살아야 했다. 사랑을 확신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그에게 맞춰주며 살아야 했다. 죽고 싶어도 아이를 위한 책임이란 미명하여 타성으로 살아간다. 무겁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사건을 겪은 뒤로도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동생이 좋아하는 과일을 싸들고, 자신의 생사관보다 동생의 생사관을 먼저 추구한다.
이런 그녀를 실존한다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어 했단 동생보다 더 식물 같다. 아니, 진짜 식물은, 동생이 되고 싶어한 나무는 광합성과 성장이라도 한다. 그녀는 조화만 같다. 단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화 말이다.
이 넓은 판 위로 조화 한 송이가 놓이며 독자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가 잘못 되었음을 느낀다. 조화밭을 즈려밟고 일어서 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사실 모두가 실존해 있었음을, 영혜도, 남편도, 형부도 제각기 방향만 다를 뿐인 실재하는 누군가를 알게 된다. 또 다른 누군가가 실재하는 방식 또한 느낄 수 있으리라. 혹은, 어쩌면…… 자신 또한 저 스스로가 즈려 밟고 있는 조화란 걸 깨닫게 될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불편한 건, 자신 또한 방향만 다를지언정 영혜나, 남편, 형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무의식 중에 자각하게 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한없이 식물적이며 또 도리 없이 동물적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영혜와 마찬가지로 식물이 되어 숲을 이루고 있음을, 또 그 안에 갖은 동물을 픔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더욱.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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