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일단은 번역가란 직업의 말석에 방석을 하나 두고 있는 입장에서, 이름 있는 번역가의 활약이 기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롤모델이 생긴 격이랄까. 사실 일본어 번역 계열에서도 롤모델이라 부르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둘 다 활동도 뜸하고 여러 구설수도 생겨 있더라. 그렇다보니 분야는 달라도 일단 대분류에 속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데드풀이나 스파이더맨을 재밌게 보기도 했고.
사실 본문에선 번역가들은(정확히는 사실 대부분의 직업이) 어영부영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반면에 나는 제법 뚜렷한 목표성을 가지고 이 직업을 갖게 되었다. 아니, 굳이 으스대는 표현을 쓰자면 '손에 넣었다' 정도 되려나. 내가 번역가가 되자고 마음 먹은 것은 중학생 쯤이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무어라 '남에게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내 첫 꿈은 프로그래머였다. 재밌는 게임으로 누군가에게 공헌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만한 수학적 능력을 지니지 못한 듯했다. 결국 프로그래머라는 꿈을 접는 대신에 번역가라는 길을 택했다. 당연히도 이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향이었다. 소설가나 만화가 같은 꿈도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지금도 그 길을 온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 같아서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그런 절충안이 번역가였던 셈이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좋은 이야기를 선물하는 다리라는 '공헌' 정도는 할 수 있는 셈이니까.
그렇게 절충안으로 시작한 번역이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선택이 옳았다 확신한다. 이 블로그에서 (물론 법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겠지만) 웹소설을 번역하면서 받은 수많은 댓글, 번역을 내리고 나서도 내 번역을 찾는 메일들, DLsite에 달리는 리뷰와 원작자 코멘트. 아쉽게도 회사에서 번역하는 작품은 그 반응을 살필 수 없지만, 뭐 어딘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믿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보람 없는 직업을 이어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돈이야 어찌 되었든 이 분야에 엉덩이를 붙인 건 최고의 행운이자 성공 중 하나라 자부할 수 있다. 물론, 부족한 점이 많다는 자각은 있으니 좀 더 노력은 해야겠지마는. 다행히 이렇게 책은 읽고 있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그렇게 자부할 수 있는 직업에서 가장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의 책이다. 그야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또, 요즘 들어 부쩍 나 자신을 돌아보는 독서를 반복했으니, 잠시 쉬워갈 책이 필요하기도 했다.(지금은 다시 심리책을 읽고 있는 상황이지만.) 사실 에세이 자체에 번역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황석희 번역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7할, 그에 얽힌 직업적 번역가의 이야기가 2할, 번역 그 자체의 이야기가 1할 정도일까.
그렇다보니 직업적 관점에서 접근한 나로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대신 모든 에세이가 으레 그렇듯,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단 사실에 방점을 두어야겠지. 인간 황석희가 궁금한 사람도, 직업적 번역가가 궁금한 사람에게도 권할만한 책이다. 아직 직업적 번역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번역 그 자체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쉽게도 제목과 달리 얻어갈 게 많을 거 같진 않다. 다른 책을 찾아보자.
번역: 황석희
(전략)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번역가거든요. 상대의 말은 물론, 표정과 기분을 읽어내 각자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도 번역이고 콧속에 들어온 차끈한 아침 공기로 겨울이 오고 있음을 깨닫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죠. 그 과정에서 때론 오역을 하기도 하고 과한 의역을 하기도 해요. 그런데 반드시 정역해야 하는 제 일과 달리 일상의 번역은 오역이면 오역, 의역이면 의역 그 나름의 재미가 있죠.
프롤로그, 7p
고찰점: 남의 기분과 표정을 읽어내는 것도 번역. 그럴 의도 없이 산 책인데 괜히 이 말에 꽂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요즘 들어 부쩍 오역과 과한 의역이 심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원래도 관심 있었던 책이 더 재밌게 느껴진 거려나. 뭐, 일상 속 오역과 의역에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전략) 그저 즐기러 갔을 땐 최대한 노동을 피하고 싶다. (중략) 이미 누군가가 공들여 만들어준 자막이 있는데 굳이 그걸 안 보고 노동처럼 영어만 듣다 올 필요가 있나.
영화 번역가는 자막 봐요?, 51p
고찰점: 아... 이건 진짜다. 심지어 현실에서 사귄지 얼마 안 된 친구한테도 들은 적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자막 키고 본다. 한때는 이것도 공부라며 객기 부리며 안 끄고 봤는데, 괜히 더 애니메이션이랑 만화만 멀리하게 되더라. 아예 정발이 안 된 만화야 도리 없이 원서로 본다지만, 정발본이 있으면 무조건 그쪽으로 본다. 여기서 어떻게 번역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 사이 작품을 즐기던 나는 사라지고 번역가만 남는다. 비싼 돈 주고 산 책으로 그러느니 그냥 정발본을 사고 만다. 인터넷에서 난리가 난 정도의 작품만 아니라면.
종종 받는 욕설 메세지에서 '역겹다'라는 표현을 보면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혐오하고 증오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상욕을 들으면 오히려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다. 단순히 내게 화가 났구나, 생각할 테니까.(중략) 저런 구체적이고 강도가 높은 표현들이 수사로 흔히 쓰인다는 게 내게는 뭔가를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처럼 느껴진다. 이게 시작이면 시작이지 끝은 아닐 테니까.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두렵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후진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69p
고찰점: 올바른 언어 습관을 가지자. 어지간하면 책 잡힐 말은 하지 말자.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기는 여럿 떠오르지만 명확하진 않다. 동생이 국어 교사가 된 것, 본격적으로 '번역가'라는 직업적 타이틀을 가지게 된 것, 독서노트나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 등등등. 때문에 과거에 커뮤에 썼던 글들을 보면 살짝 얼굴이 달아 오를 정도이다, 지금도 커뮤에서는 말이야 험악해지기 일수니 남말할 처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때엔 정말 정도가 심했으니까.
또 한 편으로는 나 스스로 우쭐대 조심하는 것도 있기는 하다. 사실 나는 지금보다 좀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고 내 번역, 내 소설, 내 글들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 나 그 사람 알아!" 하는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 머릿속에선 이미 그럴싸한 옷을 차려 입고 모교에 가서 "졸업자입니다, 여러분도 힘내세요"하는 식으로 강연하는 망상 내지 몽상도 얼마든지 했다. 그럴 사람이 말투 한두 개로 책 잡혀서야 쓸까. 4~10년 전 글이야 학생이어서 그렇다 쳐도 지금은 그렇지도 않으니까.
직업인으로서의 삶에서 금전적 보상 이외의 보상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면 직업에 대한 애착이 한결 강해지고 당면한 직업을 대하는 성의도 커지기 마련이다. 나는 정말 운 좋게도 그 보상을 찾아냈다. 그 보상을 받고자 검수해야 하는 스트레스와 부담이 나를 좀 먹어서 머리가 뭉텅이로 빠지는 일도 흔하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는 수준까지 왔다.
영화 번역가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 112p
고찰점: 위에서도 적은 바이지만 확실히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아직 이름값이랄 게 없다 보니 머리가 뭉텅이로 빠질 일은 없다마는(물론 탈모가 있는 이상 뭉텅이로 빠졌다간 큰일난다), 언젠가는 한 번쯤 빠지는 경험도 해보고 싶다. 정수리가 반딱반짝해질 정도로.
이 빵이구나, 그 빵 좋아하는 사람이 이걸 하루종일 건빵 주머니에 넣고 있었구나.
마음껏 미워할 수 없는, 249p
고찰점: 이 부분은 일부러 책에서 읽어줬음 하는 생각에 이 문장만 발췌한다. 사실 읽으면서 질질 짰는데(지하철에서 읽은지라 좀 창피하긴 했지만), 덕분에 이 책이 굳이 번역가에게만 팔리지는 않으리란 생각도 함께 들었다. 직업적 번역가로선 환영이다. 번역가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글들도 여럿 있으니. 다른 이유로 잡았다 오해도 정정하고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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