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필연이 될 때
내가 책을 찾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제목과 디자인만으로 고르는 것이다. 물론 그 만큼 내용물에서 속을 때도 많지만, 어느 새인가 그마저도 즐기게 됐다. 그런 것도, 이따금 우연이 필연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바로 그랬다. 나는 (심리 테스트 같은 걸 원래 좋아했기에) 이전부터 내가 분리형 애착임을 알고 있었다.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부모님과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내내 집에 붙어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리라.
그런 데다 학교에서 괴롭힘 당한 먼 기억과, 가까운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한 기억은 그런 나의 성격에 박차를 가해주었다. 그나마도 혼자 있을 때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이게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더라. 별 거 아닌 것에 불안해하고, 전혀 엉뚱한 의심을 품고,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례한 발언을 일삼고. 그 아이가 착하고 순수해서 다행이지, 내가 생각해도 금방 깨져도 이상할 게 없는 관계였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 온 게 이 책이다. 처음 봤을 때엔 기막힌 우연이었다. 다 읽었을 땐 훌륭한 필연이라 느꼈다. 상대가 아닌 내게 문제가 있음을, 또 그 문제는 중립적일 뿐, 나의 잘못이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과거와 감정과 상황을 중립에 두는 법. 이 책은 두께와 긴 인내심으로 그 방법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쯤 되니 차라리 책 이름이 아쉬워질 정도이더라. 감정의 객관적 자각은 분명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일일 터이다. 자기 챙김과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은 모든 현대인을 위한 선사이리라.
진심으로 더 많이 널리 퍼져도 좋을 책이라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이 책을 짚길 바란다. 감정을 정확히 마주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적확히 살아가는 방법일 테니까.
나는 왜 사랑할 수록 불안해질까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괴롭거나 수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차근차근 나아가다 보면 지금 당신이 고통과 두려움 속에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끔 하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프롤로그, 16p
고찰점: 이 위에 체크 리스트가 17개 있는데, 나는 그 중에 8개가 해당되었다. 특히 마지막 항목인 '그 사람이 누구와 연락하는지, 나한테 거짓말을하지는 않는지 알아보려고 휴대전화를 몰래 확인한다'는 항목은 크게 뜨끔했다. 뭐, 아직까지 대놓고 보진 않고 힐끔힐끔 본 게 전부지마는.(그리고 아마 그 아이라면 내가 말하면 그냥 보라 내줄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워낙 심리 테스트, 성격 테스트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성인 애착 유형 검사는 이전에도 해본 적이 있다. 전형적인 불안형인 모양이더라. 물론 이제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늘 가족하고 함께 살았고, 그 외에 애착을 느낄만한 사람은... 아마 한 명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
참고로 이 한 명하고는 내가 더 연락하고 싶어서 질척거리는데 그쪽이 태도가 영 미적지근해 결국 내가 반쯤 끊어내다시피 한 관계다. 그쪽이 착해서 어떻게어떻게 이어지고 있지마는, 마지막으로 내가 먼저 연락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능하다면 연애에서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다.
(전략)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죠. 친한 친구를 포함해 인간 관계는 대부분 우리가 개인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 관한 귀중한 교훈을 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중에 그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확신을 얻고 싶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게 되죠. 두 사람이 함께하는 현재에 충실하며, 서로를 귀한 선물로 여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우리는 사랑하도록 태어났다, 57p
고찰점: 원래부터 인간 관계가 그리 폭넓지 않은 인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이리도 미숙한 건 그 탓이지 않을까. 하물며 관계에서 무언가 교훈을 얻고 성장할 계기를 찾기는 고사하고, 외려 많은 걸 남탓으로 돌리며 내가 이 자리에 안주해있기 좋은 요소로만 써온 거 같다. 이제 그런 인식이라도 생겼다면, 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따름이다. 내가 누구에게 귀한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아무리 감정적으로 안정된다 해도 가끔은 파트너와 충돌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성공적 관계란 아무 문제도 없는 관계가 아닙니다. 관계의 건강함은 갈등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이 그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태어났다, 65p
고찰점: 이것만큼은 어떻게든 명심하려 하고 있다. 다행히(...랄까 아직 두 달도 안 된 시점에서 싸우는 것도 좀 우습지 싶지마는.) 아직까지 싸운 적은 없고 또, 싸우게 되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그 아이의 착함에 달린 문제이다. 내게 말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로 삭히다가 고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내지 불안이 늘 도사리고 만다. 그렇다면 좀 더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따름이다.
(전략) 그가 까맣게 몰랐던 것은 나쁜 파트너여서가 아니라, 수잔이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물론 댄도 수잔이 자기 도움을 고마워한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수잔은 댄을 잃는다는 두려움 탓에 자기 욕구와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죠. 막다른 길에 다 다를 때까지 갈등을 피했고, 그렇게 분노가 쌓이자 상처 받은 수잔의 내면 아이는 폭발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수잔은 댄이 자신을 떠난다는 두려움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스스로 시나리오를 완성시킨 것입니다.
당신이 아픈 건 그 사람 탓이 아니다, 92p
고찰점: 사실 그런 불안을 안고 마는 건,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남들을 다 자기 같은 사람이라 여기는 게 나쁜 버릇이란 건 알지만, 세상은 1인칭인 이상 이따금 남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하는 일반화를 종종 하고 만다. 제일 무서운 건 '누군가를 잃을까봐 취한 선택이 결과적으로 그 두려움을 실현시키는 것'일까. 처음 읽었을 때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시간을 들여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타인은 물론 당신 자신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기 위한 토대를 다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뼛속 깊이 느껴지는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얻는 방법임을 기억하세요.
불안과 회피가 추는 춤, 136p
고찰점: 요즘 여러 책을 비롯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찾아보고 있는데, 결국 으레 '나'로 귀결되더라. 나의 생각, 나의 관점, 나의 말, 나의 비전. 불교적으로 생각해도 좋고, 오타쿠식이라면 '나의 인지가 곧 나의 세계'란 말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를 다지는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 과정에서 주위에 얼마나 많은 폐를 끼칠지는 모르나, 그럼에도 이 토대를 완성해야 비로소 그 아이의 옆에서 온전히 자립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모든 감정은 중요하고, 귀 기울일 가치가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중략) 당신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줘야 하죠.
잘못된 감정은 없다, 175p
고찰점: 사실 개인적으론 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받아 들이기 전까지, 내가 느끼는 불안, 두려움, 의심, 질투 등을 '나쁜 감정'으로 치부했다. 당연히 겉으로 드러내는 걸 늘 꺼려 왔고, 이제까지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런 식으로 해왔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고서 비로소 그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 스스로 그걸 인식하고, 그 감정이 시작되었음을 잘 알고서, '올바른 방식'으로 상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이건 분명 연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터이다.
"당신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고,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노력을, 신뢰를, 자신을 향한 헌신을 절대 멈추지 마세요.
자기 희생에서 자기 채움으로, 248p
고찰점: 나는 늘 내가 혼자라고 생각했다. 좀 더 정확히는 혼자 남겨지리라 믿었다. 지금이야 부모님이라는 우산이 있지만, 언젠가 그 우산이 걷힌 후에 내가 기댈 곳은 하나도 없으리라 봤다. 때문에 나는 글에 매달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만, 그 누군가가 없어서 나 스스로 기대야 할 구석을 만들어야 했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또 쓰기 전에는 그런 인식도 없었지만 그게 바로 '리텔러'였다. 물론 그 과정이 전부 무의미했다 보지는 않는다. 리텔러는 아직도 내 안에 있고, 이 책을 읽은 이후로는 오히려 더욱 크기가 커졌다. 나의 일부이자 성취와 성공의 대변자로서 나를 살포시 품어주고 있는 격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리텔러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 내 주위가 얼마나 축복 받았는지 인식하는 것, 그리고 또 내가 찾아서 나서면 이런 좋은 책들이 나를 지지해주리란 걸 깨닫는 것부터 시작하자.
진짜 친밀한 관계로 가는 유일한 길은 거절 당할까 봐 두렵더라도 시간을 들여 내면아이의 핵심 상처를 돌보고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자기 욕구를 표현하는 겁니다.
유연하게 선 긋기, 271p
고찰점: 거절 당하는 게 두려워서 먼저 그 손을 뿌리친다. 어쩌면 갖은 창작물에서 오랫동안 써온 테마일 터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에반게리온' 시리즈부터 그렇지 않은가.(창작물의 예시라고 가지고 오는 게 참 오타쿠스러운 건 둘째치고.) 신지도, 아스카도, 겐도도, 레이도, 미사토도. '사랑 받고 싶다' 말하지 못한 채 서로를 향해 높은 벽을 치고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지 못한 채로 LCL과 보완작전을 통해 강제로 서로를 알게 된 후에는 서로 목을 조르며 '기분 나쁘다'고 매도한다. 소통의 부재는 그만큼 치명적이다. 모르지 않건만, 에반게리온도 즐겨 봤건만, 왜 이제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걸까. 아쉬운 지점이다.
세상에 '완벽한' 연애는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갈등이라는 파도를 헤쳐나가는 법, 293p
고찰점: 이것만큼은 정말로 더할 나위 없이 찬동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내가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생길 갈등 속에서 서로의 지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늘 하는 사고 방식으로는 '그야 전부 내 탓이겠지, 그 아이는 한없이 착한 애니까' 싶겠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그럴까. 중요한 건 정확히 파악하고 마주하는 방법이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말싸움에서 이기고 상대방이 내 관점에서 상황을 보게 하는 대신 두 사람이 같은 팀이라는 점, 그리고 각자의 관점에서는 각자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된 감정이란 없으며, 사실마저도 각자에게 다른 의미가 있죠.
누가 맞고 틀린지는 아무 의미 없다, 303p
고찰점: 사실, 인간관계에서 별로 '이겨야 할' 이유는 없지 싶다. 굳이 이겨서 상대를 논파한다 해본들, 상대가 그 논파를 듣고 자신을 바꿀 리도 전무하니까. 외려 괜히 화가 나서 반대로 튕겨져 나가지 않으면 망정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게 서로 편할까. 같은 지점을 향해 달려 갈 가족이나 친구, 연인 사이라면 더더욱.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현실로 이루어질 확률을 높일 뿐입니다.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열쇠는 서로 속도를 늦추고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피며 소통을 이어가는 여유에 있습니다.
내 편인 듯 내 편 아닌 방어기제, 308p
고찰점: '최악의 시나리오'란 말에 꽂혔다. 나는 도무지도 망상이 심하다. 좋은 쪽으로도 심하지만 나쁜 쪽으로도 심하다. 머리속에는 내가 파멸로 향하는 피폐 루트가 수도 없이 뻗어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지금 내가 그 피폐 루트 위에 있나?' 싶어지는 순간 참을 수 없이 불안해지고 만다....그리고 분명 이런 생각이 그 이야기가 현실로 이루어질 확률을 높인다는 거겠지. 고치기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고쳐 가야 한다.
모든 관계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고, 이걸 겪다 보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이 점을 무시하고 완벽한 관계를 이상화하는 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죠. 훌륭한 관계란 문제 하나 없이 순탄한 것이 아니라 과제를 던져주고 성장시키는 관계를 가리키니까요.
내가 준비되면 인연은 찾아온다, 342p
고찰점: 함께 성장하는 인연 관계. 이는 사실 내가 가장 바라는 연애관이기도 하다. 또 이미 그 아이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받아 성장하고 있는 나 자신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매우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런 한 편으로 '이런 재미 없는 연애에 그 아이가 금세 질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도 함께 존재한다. 가슴 뛰고 스릴 있는 로코 같은 연애와, 진지하고 진부하며 눅진한 연애. 각기 장단과 호오가 있다는 걸 아니까. 다행이라면 그 아이도 '그래서 좋다'고 말해주고 있다는 점일까.
어린 시절 안전을 위해 키웠던 바로 그 능력 덕분에 불안형은 두려움과 불안정함만 줄이면 치유와 상호 의존 관계를 위한 이상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중략) 불안형이 유리한 점 중 하나는 애착 체계 전체가 관계를 맺고 그것을 지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불안애착의 장점, 358p
고찰점: 장점도 단점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책 답게, 불안형 그 자체를 매도하는 일도 없다. 이건 어떤 의미에선 최고의 격려이자 칭찬일까. 고친 후의 나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격이니까. 내 미래의 모습을 곁눈질한 거 같아 기쁘다. 지금은 그렇게만 생각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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