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무로우 사이세이

아쿠타가와의 원고 - 무로우 사이세이

by noh0058 2022. 8. 23.
728x90
반응형
SMALL

 아직 그리 친하지 않고 아마 서너 번째 방문이었을 터인 어느 날. 아쿠타가와의 서재에는 선객이 있었다. 선객은 아무개 잡지의 기자인 듯하며 아쿠타가와에게 원고를 강요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츄오코론에도 써야 할 글이 있으며 그마저도 아직 시작조차 못 했다며 단호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 거절은 가능성이 없으며 도무지 쓸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으나 선객은 거절당하는 것도 각오하고 왔는지 좀처럼 받아주지 않았다. 설령 세 장이든 다섯 장이든 좋으니 뭐라도 써달라며 물러나는 기미가 없었다. 세 장이든 열 장이든 소재도 없고 시간도 없어 도무지 쓸 수 없다 거절하니 잡지 기자는 그럼 한 장이든 두 장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아쿠타가와는 두 장으론 소설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선객은 애당초 당신의 소설은 그리 길지 않으니 두 장이라도 의외로 소설이 된다, 되려 재밌는 소설이 될지 모른다며 포기할 줄 몰랐다. 일종의 자조와 실제로 쓰지 못한다는 곤혹스러움이 반씩 섞인 아쿠타가와는 그래도 쓸 수 없다고 말했고 선객은 역시나 두 장설을 고집하며 뭐라도 써주면 된다고 들러붙었다. 서서히 미처 거절하지 못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탓인지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잡지 기사의 눈썹이 어떻게든 한 장이라도 쓰게 만들겠단 기합으로 찌릿찌릿 떨렸다. 이런 격한 거래 현장은 그날 처음으로 보았다. 당시의 나는 아직 소설을 쓰기 전이었으니 유행 작가의 심약함과 대단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나는 마침 남몰래 연습 삼아 매일 같이 서너 장의 소설을 쓰던 참이었는데, 아쿠타가와와 잡지 기사의 끝을 모르는 문답 속에서 아쿠타가와가 잡지사에게 얼마나 중요한 작가인지를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된 셈이었다. 이렇게 완고히 거절할 수 있는 자신이 내게는 어쩐지 무서울 정도였다. 심지어 아쿠타가와의 거절에는 여유가 있어서 겉으로는 거절하면서도 속으로는 곤란해하거나 물러서는 기미가 없이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신문 기자가 찾아오면 그날의 아쿠타가와처럼 고압적으로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더라도 어딘가 사과하는 듯한 어조를 품는 게 예의였다. 아쿠타가와는 눈부신 명성을 지니고 있었고 잡지로서는 두 장이든 세 장이든 권말을 장식하기엔 충분했으니 이 잡지 기자가 고집을 부리는 것도 알 만했다. 기자는 끝으로 다음 달 잡지엔 실어야겠다는 확약을 받은 후에야 겨우 자리를 떴다. 분노도 실망도 없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이 사람이 아직도 '카이조' 편집부에서 일하시는 요코세키 아이조 씨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에도 이렇게 가열차게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요즘에도 이렇게 거절하는 작가는 한 명도 없으리라. 잡지 기자란 원고를 요청할 때에는 부탁한다고 말하고 쓴 원고를 받을 때는 고맙다며 인사하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작가가 갑인 거 같지만 사실 작가란 잡지 기자가 무서운 사람 중 하나이며 가장 먼저 원고를 읽고 원고가 잘 써졌는지 결정하는 것고 그 사람이다. 작가란 마술사가 처음 쓰는 마술을 보는 게 잡지 기자인데 적당한 마술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잡지 기자는 원고의 글자 더미를 훑는 것만으로 내용이나 작품의 무게감을 바로 읽어낼 수 있는 감을 가지고 있으니 방심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다. 유행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그 이름의 기묘함이 역효과를 드러낸 셈이다. 내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사실이나 내게 대단함을 보여주려는 기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쓰지 못하는 걸 거절하는 진중함과 서서히 불이 붙는 곤혹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요코세키 아이조 씨가 그렇게나 들러붙은 것도 야마모토 사네히코 씨의 엄명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츄오코론의 타키타 테츠타로 씨만큼 아쿠타가와의 원고를 기뻐하며 읽은 사람은 희소하리라. 매일 저녁 석 장에서 넉 장 가량의 원고를 받아 유명한 작가의 그림처럼 애무하던 건 원고의 역사상에도 희소한 일이었다. 손때 묻은 손가락에 조금 더러워진 원고는 함부로 말하자면 타케타 씨에겐 난학난운 사이를 헤매는 몸처럼 보였을 테니 한 시대를 풍미한 문학자의 원고가 얼마나 고귀한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봐야 하리라. 그는 원고를 표구사에게 맡겨 한 권의 서적으로 보존하였다. 나도 한 번인가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제본된 원고가 지금은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책에는 아쿠타가와가 일일이 제목을 적어 넣었을 것이고 타키타 씨는 후대에 몇 만 금의 값어치를 하리라고 남몰래 생각했으리라. 물론 이제는 실제로 몇 만 금을 내지 않으면 입수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아쿠타가와의 원고는 덧댄 듯한 흔적이 있는가 하면 원고지 위에서 싸우는 듯한 감각이 잘 드러나는 "덧쓰기"나 "지우기", "끼워 넣기"도 많아 장렬하기 짝이 없었다. 술술 쓰지 못한 탓인지 한 번 건드렸다 몇 번은 다시 쓴 부분도 있는 듯했다. 쓰다 만 원고는 완성된 원고보다도 훨씬 많았고 아쿠타가와는 그런 걸 파기하는 법 없이 쌓아서 책상 구석에 놓아두었다. 나츠메 소세키도 파기 원고를 보관해두었다는데 그런 걸 배우려 한 걸 수도 있겠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