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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하기와라 사쿠타로

나와 아쿠타가와의 교제 - 하기와라 사쿠타로

by noh0058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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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쿠타가와 군과 나의 교제는 죽기 전의 고작 2,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질적으로는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 간 교제였다. "좀 더 빨리 알게 됐으면 좋을 텐데" 아쿠타가와 군도 번번이 그렇게 말했다. 나도 비슷한 감상을 품었기에 불쑥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배신 당한 듯한 분노와 섭섭함을 느꼈다.
 아쿠타가와 군은 일면 사교적 소질을 지니고 있어서 친구가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속까지 터놓는 벗은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내 회한은 교우 관계가 나빴다는 점이야" 같은 뜻의 절절한 말도 이따금 내게 털어놓고 했다. 즉 아쿠타가와 군은 자신과 반대 성격이며 자신의 관념상 이데아를 구체적으로 끌어내줄 만한 친구를 바랐던 것이다. 항상 키쿠치 씨를 경애하며 "영웅"이라 부른 것도 역시 성격이 반대되기 때문이었으며 마치 신경질적이던 보들레르가 호탕하고 속세적이었던 위고를 경애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쿠타가와 군 주위에 모이는 사람은 대개 비슷한 인물뿐이라서 교제가 넓은 것과 반대로 심경이 고독하고 쓸쓸했으리라.
 그런 아쿠타가와 군에게 무로우 사이세이 군이나 나 같은 인간은 확실히 변종의 친구였을지 모른다. 특히 무로우 군에겐 특수한 경이를 느꼈는지 항상 "그런 특이한 남자는 본 적이 없어"하고 말했다. 아쿠타가와 군 같은 인텔리이며 수재고, 문명인의 섬세한 신경을 지녀 사교적인 예절을 신경 쓰던 사람에게 무로우 군의 자연아 같은 야성이나 소박성은 확실히 통쾌한 경이일 테며 영웅적으로도 보였으리라.(당시의 무로우 군은 지금보다도 더 야생적이었다.) 한 편 또 무로우 군 쪽에선 자신의 그런 야성을 부끄러워하며 항상 "교양 있는 신사"란 이상을 품고 있었기에 교양이나 취미 덕에 문화적으로 리파인된 아쿠타가와 군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이상적인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내가 아직 아쿠타가와 군을 모르던 때, 무로우 군은 자주 내게 "그만큼 문명적이고 그만큼 예절을 아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하고 말하며 번번이 감탄을 했다. 그 후의 무로우 군이 품게 된 교양이나 취미 생활에는 아쿠타가와 군과 어울리며 배운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아쿠타가와 군이 나와 어울리면서 어떤 점에 관심을 가진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내 성격 속의 허무주의적 정향이나 아나키즘적 기질에 다른 의미의 관심을 가진 것이리라. '캇파'가 잡지에 실렸을 때 칭찬한 바가 있는데 아쿠타가와 군은 "네가 읽어주길 바랐어"하고 말했다. 그 후로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자주 내 의견을 물어 내 엉망진창이고 독단적인 평가를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들어주었다. 또 아쿠타가와 군도 내 시를 자주 읽어주었고 때때로 적절한 평가를 해주었다. 내 시 중에선 향토망경시 몇 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칭찬해주었다.
 아쿠타가와 군은 다른 많은 친구와 어울리며 도심적인 장난이나 농담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와 교제할 때에는 그런 대화를 전혀 해본 적이 없다. 나 같이 세련되지 못한 촌뜨기는 장난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거겠지.(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아쿠타가와 군과 나의 대화는 항상 생활의 의의에 회의를 품거나 생사의 문제를 논하는 등 종교나 철학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런 갖은 문제에 아쿠타가와 군은 굉장히 회의적이었으며 절망적일 정도로 허무주의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 사상은 아쿠타가와 군에게 공명하는 부분이 많았다. "너와 나는 교단에서 가장 닮은 두 시인이야" 아쿠타가와 군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아쿠타가와 군은 스스로 "시인"으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아쿠타가와 군이 내게 가지는 진정한 관심은 역시나 무로우 군과 마찬가지로 내 기질 속 야생성을 향해 있었으리라.
 가마쿠라에 살던 때, 어느 늦은 밤에 아쿠타가와 군이 찾아왔다. 도쿄에서 후지사와에 가는 도중에 자동차로 들른 것이다. 밤 11시 경이였다. 잠옷 차림으로 일어난 나와 어두컴컴한 전기 아래서 대략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했다. 아쿠타가와 군은 오자마자 대뜸 내게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봐, 손가락이 떨고 있지? 신경쇠약의 증거래. 너도 한 번 해봐"하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사후 생활의 이야기를 하며 굉장히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불쑥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자살 안 하는 염세론자가 하는 말이 돈이 될 리가 없지" 그리고 도망치듯이 돌아갔다.
 가마쿠라에서 있었던 이 밤은 아직도 굉장히 꺼림칙하여 잊을 수가 없다. 밤 11시, 불쑥 찾아온 자동차, 어두컴컴한 전기, 길고 얇은 다섯 손가락, 사후 생활의 이야기, 난잡한 장발, 새파랗게 질린 병자의 얼굴, 그림자처럼 사라진 뒷모습. 그 모든 인상이 악몽처럼만 느껴졌다. "아, 무서워라!" 돌아간 후에 아내는 말했다. 하지만 나도 당시엔 그가 자살을 결심했으리란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그가 즐겨 쓰는 '귀신'이란 말이 호로도 문학상으로도 또 인물상의 풍채로도 정말 잘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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