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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오카모토 키도

세계 괴담 명작집 05 클라리몽드 - 오카모토 키도 역

by noh0058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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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제가 과거에 사랑한 적이 있느냐 물으시는 건가요.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어지간히 독특하고 심지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저는 예순여섯 살인데 아직도 그 기억의 재를 흐트러 놓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성직자가 되는 게 제 천직처럼 여겨져 제 공부는 모두 그 방면을 향했습니다. 스물넷까지 제 생활은 긴 초학자 생활이었죠. 신학 과정을 마치면 이어서 잡무에 종사했으니 목사장들께서도 젊은 저를 인정해주셨고 끝내는 성직을 가지는 걸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성직 수여식이 부활절 기간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세간에 나가 본 적이 없었지요. 제 세계는 학교의 벽과 신학교와 관계된 사회에만 국한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세간에서 말하는 여자란 것에 극히 막연한 생각 밖에 지니지 않았고 또 그런 문제를 생각하는 일이 전혀 없었기에 정말로 순수한 생활을 보냈죠. 저는 1년에 단 두 번, 제 나이 먹고 허약한 어머니를 만나는 게 전부로 그 외에 세간과 연결 고리라 함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생활에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종신직을 가지는데 어떤 주저도 느끼지 않았죠. 저는 단지 기쁨과 고동만을 느꼈습니다. 혼약을 나눈 그 어떤 연인이라도 저만큼 꿈만 같은 기쁨에 젖어 느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테죠. 저는 잘 때마저도 제가 성찬식에서 설교하는 순간을 꿈꾸며 눕고는 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성직자가 되는 것 이상의 기쁨은 달리 없을 거라 믿었습니다. 시인이 될 수 있더라도 또 제왕이 될 수 있더라도 저는 그걸 거절하고 싶을 정도였고 제 야심은 성직자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제게 중요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마치 제 어깨에 날개라도 솟은 듯한 들뜬 기분으로 교회 쪽으로 가볍게 걸어갔지요. 스스로가 천사엔젤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 중에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긴 사람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죠. 저는 전날 밤을 기도로 보내어 신앙적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자애로운 사교님은 영원에 존재한 아버지――신처럼만 보였고 교회의 둥근 천장의 너머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이 의식은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먼저 세례식이 이뤄지고 두 종류의 성찬식, 그리고 손바닥에 세례자의 기름을 바르고 그게 끝나면 사교와 목소리를 맞추는 걸로 신성한 헌신 의식이 종료되지요.
 아아, 하지만 욥(구약 욥기의 주인공)이 "눈을 통해 계약하는 자는 어리석은 인간이다"고 말한 건 진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자 제 눈앞에 마치 닿을 정도로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실제로는 저하고 꽤나 떨어진 성단의 난간 끝자락에 굉장히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고귀한 옷을 입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마치 세계가 달라진 것처럼 보였지요. 저는 마치 먼 눈이 다시 뜨이는 것처럼만 느껴졌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영광으로 빛나던 사교의 모습마저 사라지고 황금 촛대에 불타던 촛불은 여명의 별처럼 희미해졌으며 어둠이 주위에 한가득 펼쳐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여자는 그 어둠을 배경 삼아 천사의 출연처럼 떠올라 있었죠. 그녀는 빛나고 있었습니다. 빛나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빛을 내뿜고 있었죠.
 저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되겠지 싶어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을 결심으로 눈꺼풀을 닫았습니다. 번민이 점점 강해져 스스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눈을 뜨고 속눈썹 사이로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태양을 바라 볼 때면 누구나 떠오르는 보라색 반음영이 원을 그리 듯이 그녀는 모든 무지갯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 아름다움이란! 위대한 화가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하늘서 찾아 지상의 성녀상으로 표현합니다만 지금 제 눈앞에 자리한 자연의 진짜 아름다움에 가까운 표현은 아직 찾아 볼 수 없을 테지요. 어떤 시어도 화가의 그림 도구팔레트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살짝 큰 키로 여신과 같은 자세와 태도를 견지했지요. 부드러운 금색 머리를 중앙에서 둘로 나누어 금빛으로 파도치는 두 강이 되어 양 관자놀이에 흐르는 모습은 왕관을 쓴 여왕처럼도 보였습니다. 이마는 투명하여 푸른빛이 감도는 백색이었고 두 아치 형태를 한 속눈썹은 위로 뻗어 저절로 쾌활한 빛을 내뿜는 바다색 눈동자를 한 층 더 눈에 띄게 했습니다. 단지 신비한 건 그 눈썹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눈은 평범치 않았습니다. 단 한 번 껌뻑이는 것만으로 한 남자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눈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인간에게서 보지 못한 푸르게 개여 열정을 품은 채 촉촉한 빛을 가진 생생한 눈이었습니다.
 두 눈동자는 화살처럼 빛을 내뿜었습니다. 그 빛이 제 심장을 드러내는 걸 똑똑히 보았지요. 저는 그 빛나는 눈의 불꽃이 천국에서 온 건지 혹은 지옥에서 온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임은 분명하지요. 그녀는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양쪽 모두일 테지요. 확실히 그녀는 평범한 여자에게서――즉 이브의 배에서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광택을 지닌 진주 같은 이빨은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빛났습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입술을 움직이면 작은 보조개가 빛나는 장미색으로 뺨에 드러났습니다. 상냥하게 자리한 코는 고귀하게 태어난 걸 말해주고 있었죠.
 절반 정도 드러난 부드러운 광택을 지닌 두 어깨에서부턴 마노와 커다란 진주 목장식이 목덜미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며 가슴가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이따금 그녀가 넘치는 듯한 웃음을 지어 놀란 뱀이나 공작처럼 고개를 들면 그러한 보석을 두른 은격자 같은 고급진 목장식이 그걸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붉은 오렌지색의 벌벳으로 만든 느슨한 옷을 입고 있었죠.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넓은 소매에서는 빛보다도 투명할 정도의 여명의 여신의 손가락 같은 이상적이며 투명하고 한없이 상냥한 귀족풍 손이 나와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굉장히 번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잘한 것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마치 어제 일처럼 명백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턱과 입술 끝자락에 극히 작게 드리운 그림자, 이마 위의 벌벳 같은 솜털, 뺨에 비친 속눈썹의 그림자, 그 모든 걸 놀랄 정도로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걸 바라보고 있자니 저는 이제까지 제 안에서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게 열려 모든 게 분명해지고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내부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가 제게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다른 세계, 모든 게 다른 곳에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습니다. 무서운 고뇌가 붉게 달아 오른 가위가 되어 제 심장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각은 단 1초인가 싶어도 마치 한 세기처럼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산이라도 뿌리 뽑을 정도의 강한 의지력으로 저는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소리치려 했습니다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건 마치 꿈에 짓눌린 사람이 목숨을 걸고 무언가 소리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저는 눈을 뜨고 있음에도 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성직자의 길에 몸을 던지고 말 거란 걸 알고 제게 용기를 주듯이 강하고 듬직한 얼굴로 저를 보았습니다. 그 눈은 시와 같았고 눈동자의 움직임은 노래만 같았습니다.
 그녀는 그 눈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것이 된다면 제가 천국보다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천사들이 당신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상복을 찢어버리세요. 저는 아름답습니다. 저는 젊습니다. 제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제게 오세요.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당신께 무엇을 주지요?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지요. 우리의 생명은 단 한 번의 입맞춤 속에 꿈처럼 지나가버립니다. 그 성찬잔을 던져버리세요. 그리고 자유로워지세요. 저는 당신을 먼 섬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당신은 은색 지붕으로 된 건물 아래서 커다란 황금 침대 위에서 제 품 안에서 잠들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신에게서 빼앗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얼마나 존귀한 사람들의 사랑의 피를 부었는지는 몰라도 누구도 신의 옆에 이르지 못하지 않았나요?"
 이러한 말은 상냥함 리듬을 무한히 짜내어 제 귀에 흘러들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노래만 같았고 그 눈으로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게 진짜 입술에서 새어 나온 것처럼 제 가슴 안쪽에 울렸습니다.
 저는 이제 신을 향해 성직자가 되는 걸 거절하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해졌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건지 제 혀는 의식 대로 말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또다시 제 가슴을 찌르는 듯한 하얀 칼날 같은 절망한 얼굴이나 애원하는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건 어떤 '슬픔의 성모'보다도 강한 칼날로 꿰뚫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던 사이 모든 의식이 끝이 나고 저는 일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이때만큼 그녀의 얼굴에 깊은 번뇌의 색이 드리우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혼약을 나눈 사람의 죽음을 본 소녀도, 죽은 아이를 슬퍼하여 빈 유모차를 바라보는 어머니도, 천계의 낙원에서 쫓겨나 그 문에 선 이브도, 수전노 남자가 자신의 보석과 바뀐 돌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시인이 혼을 담은 단 하나의 원고를 모종의 이유로 불에 태웠을 때도 이때의 그녀만큼 체념할 수 없는 절망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지 싶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서는 혈색이 가셔서 대리석보다도 하얗게 질려버렸습니다. 아름다운 두 팔은 근육이 풀어진 것처럼 몸의 두 쪽으로 힘없이 축 처졌습니다. 부드러운 다리도 이제는 자유롭지 못해서 그녀는 기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또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교회 문까지 비틀거리며 갔습니다. 마치 십자가에 걸린 그리스도상 이상으로 피와 땀을 흘리며 마치 목을 조이고 있는 사람처럼만 느껴졌습니다. 둥근 천장은 재 어깨 위에 내려앉는 듯하여 제 고개만으로 천장의 모든 무게를 받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 제가 교회의 문지방을 넘으려 한 순간이었습니다. 손 하나가 불쑥 제 손을 잡은 거지요. 그건 여자 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여자 손을 만져 본 적이 없었는데 이때 제가 느낀 건 뱀피부를 만진 듯한 차가운 감촉이었습니다. 당시의 감촉은 아직도 손바닥 위에 뜨거운 철의 낙인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건 그녀의 손이었습니다.
 "불행한 분, 정말로 불행한 분…… 무슨 짓을 한 건가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강하게 말하고는 곧장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노년 사교가 제 옆을 지나갔습니다. 그는 제게 냉소하는 듯한 험악한 눈초리를 보냈지요. 저는 어지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을 붉히는가 하면 새파랗게 질리는 등 눈부신 빛이 눈앞에서 빛나는 것처럼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저를 동정하여 제 팔을 잡고 데려가 주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리 구석에서 제 젊은 친구가 다른 쪽을 본 찰나에 이상한 차림을 한 흑인 종자 하나가 제게 다가와서는 걸으면서 금색의 작은 수첩 하나를 건네주며 숨기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저는 그걸 소매 안에 넣고 제 방에서 홀로 남을 때까지 숨겨두었습니다.
 홀로 남아 그 수첩을 풀어보니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담겨 "콘티니 성에서……클라리몽드"라고 작게 적혀 있었습니다.

       둘

 저는 당시에 세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명성 높은 클라리몽드 또한 알지 못했죠. 콘티니 성이 어디 있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만 사실 한 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그녀가 고귀한 여자이든 또 창부이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 사랑은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만 이제는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뿌리내려버렸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녀가 닿은 제 손에 입맞춤을 하거나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하여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모습을 분명히 보고 싶었기에 눈을 감아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교회의 문 앞에서 제게 속삭인 말을 반복했습니다. "불행한 분, 정말로 불행한 분……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저는 그러는 사이 기어코 제 지위의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둡고 꺼림칙한 속박――제가 그런 생활 속에 들어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직자 생활――그건 순결에 몸을 바친단 뜻입니다.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남녀의 성별이나 늙고 어림에 구별을 두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에게서 눈을 돌려야 한단 뜻입니다. 사람의 눈을 뽑는다는 뜻입니다. 평생 동안 교회나 제 방의 차가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의 집 외에는 찾을 수 없게 된단 뜻입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시체의 옆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상복이나 다름없는 법의를 홀로 입고 끝내는 그 상복이 그 사람의 관을 뒤덮게 된단 뜻입니다.
 다시 한 번 클라리몽드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거리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기숙사를 나갈 구실이 없었지요. 저는 더 이상 이런 곳에 한 시도 머물 수 없을 거 같았습니다. 그런 곳에 있어 본들 이제부터 받게 될 새로운 임명을 기다리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창을 열려고 격자에 손을 얹어 보았습니다만 창문은 땅과 떨어져 매우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따로 사다리라도 찾지 않는 한 이 방법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죠. 그런 데다가 밤이 아닌 한 내려갈 수도 없을 거 같았습니다. 또 저 미궁처럼 복잡한 거리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곤란함은 다른 사람에겐 별 볼 일 아닌 거 같아도 제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불과 얼마 전에 난생처음으로 사랑에 바진 학도로 경험은 물론이요 돈도, 옷도 없는 불상한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맹인이나 다름없는 저를 향해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아, 만약 내가 성직자가 아니었다면 매일 같이 그 여자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 여자의 연인이 되어 그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울적한 상복 대신에 비단이나 벌벳 옷을 입고 금색 사슬이나 검을 차고 다른 젊은 기사들처럼 아름다운 깃털 장식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머리도 이렇게 짧게 자를 게 아니라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파도처럼 일렁이며 훌륭히 기른 턱수염을 더해 우아한 모습으로 있었을 텐데……"
 심지어 그 성단 앞에서 보낸 한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명석한 말이 영원히 저를 이 세계에서 떼어내버려, 저는 스스로의 손으로 묘를 파고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 문을 닫은 꼴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창으로 가보았습니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모든 나무는 봄단장을 했으며 자연은 아이러니한 환락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지요. 멋진 젊은 신사나 아름다운 숙녀가 둘이 나란히 숲이나 꽃밭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기운찬 청년이 술에 취해 재밌게 노래합니다. 모든 게 쾌활, 생명, 역동을 묘사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저의 비원과 고독과 대조를 이룬 것입니다. 문의 계단 쪽에선 젊은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와 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직 젖냄새가 남은 귀여운 장미색 입에 입맞춤을 하거나 아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장단을 맞추는 등 어머니가 아니고선 모를 법한 수많고 존엄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방긋 웃으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사랑스러운 관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치를 보는 걸 견딜 수가 없어 거칠게 창문을 닫고 마루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제 마음은 격한 질투와 혐오로 가득 차 열흘이나 굶주린 호랑이처럼 제 손가락을 집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얼마나 드러누워 있었는지는 스스로도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루 위에서 발작적으로 괴로워 몸부림치는 사이 대뜸 방 한가운데에 장로 세라피온이 똑바로 선 채 저를 유심히 바라보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굉장히 부끄러워져 저절로 가슴가에 고개를 숙이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세라피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이윽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뮤오 군, 당신에게 무언가 굉장한 변화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저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로뮤오 군은 항상 침착하며 겸허하고 온건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야수처럼 분노하는 걸까요. 조심하세요. 악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용기를 잃어서는 안 돼요. 그런 유혹에 만났을 때는 무엇보다 확고한 신념과 주의에 의지해야 합니다. 자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악마의 영은 분명 당신에게서 떠나갈 겁니다."
 세라피온의 말에 저는 정신을 되찾고 마음도 꽤나 진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욱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C라는 곳의 사제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걸 알리러 왔죠. 그곳 사제가 죽어 당신을 그곳에 배속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니까요. 내일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해두세요."
 그녀와 두 번 다시 만나는 일 없이 내일 이곳을 떠나 이제까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장애물 위에 더욱이 서로의 사이를 멀게 할 거리를 둔다면 기적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영원히 그녀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편지를 쓰는 건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누구에게 편지를 건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죠. 성직에 몸을 둔 처지에 이런 걸 누구에게 밝혀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제게는 그게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사, 세라피온은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여행용의 빈곤한 손가방 따위를 얹은 두 노새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세라피온은 한 노새를 타고 저는 따라 남은 노새에 올라탔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 저는 혹여나 클라리몽드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 창문이나 노점을 보며 걸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아직 옅은 잠에 들어 있었죠. 저는 제가 지나가는 저택이란 저택의 창문이나 커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세라피온은 제 태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가 그런 저택의 건축을 신기해하는 줄 알았는지 제가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노새의 걸음을 늦춰주었지요. 저희는 드디어 마을의 문을 지나 그 앞에 자리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언덕 정상에 이르렀을 때, 저는 클라리몽드가 사는 마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 위해 돌아보았습니다.
 마을 위에는 커다란 구름 그림자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푸른색과 붉은색 지붕색이 하나로 합쳐져 새롭게 솟아 오른 연기가 하얀 거품처럼 빛나며 여기저기에 떠올라 있었지요. 단지 눈에 보이는 건 하나의 커다란 건물이었습니다. 주위 건물을 가리며 높게 자리하며 수증기에 둘러싸여 짙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 탑은 높고 맑은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그 건물은 3 마일도 넘게 떨어져 있을 터인데 어쩐지 꽤 가깝게만 보였습니다. 특히 그 건물은 탑도, 복도도, 창문 장식도 그렇고, 제비 꼬리 형태를 한 풍향계까지 모두 확연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 햇살을 받아 빛나는 건물은 뭐죠?"
 저는 세라피온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눈 위를 덮으며 제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대답했지요.
 "저건 콘티니 공이 창부 클라리몽드에게 준 옛 궁전입니다. 저기서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지요."
 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환상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건물의 위에 하얀 그림자 같은 게 지나가는 걸 본 것만 같았습니다. 아주 잠깐 빛나듯이 지나가 곧 사라졌지만 그건 분명 클라리몽드였습니다.
 아아, 정말로 그때, 멀리 떨어진 거친 길의 정상――두  번 다시 여기서 내려오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곳에서 진정되지 않는 흥분과 함께 그녀가 사는 궁전을 바라보며 구름 탓인지 저택이 가깝게 보여 저를 그곳에 왕으로 맞이하려 부르는 것만 같은――그때의 제 심정을 그녀가 알고나 있을까요.
 그녀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저와 그녀의 마음은 약간의 틈도 없을 정도로 깊게 뒤엉켜 그녀의 맑은 사랑이――잠옷차림이긴 했지만――아직 아침 이슬이 차가운 그 높은 건물 위에 그녀를 서게 한 게 분명했습니다.
 구름 그림자는 궁전을 뒤덮었습니다. 모든 풍경은 집 지붕과 폭풍우치는 바다로 보여 그런 가운데 하나의 산처럼 우뚝 서 나타났습니다. 
 세라피온이 노새를 끌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속도로 노새를 끌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길이 크게 굽어져 기어코 S 마을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운명과 함게 영원히 제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골의 어두컴컴한 들판을 지나 3일 동안 이어진 피곤한 여행 끝에 제가 맡게 된 암탉 장식이 달린 교회 탑이 나무 사이로 보였습니다. 또 풀로 만든 집과 작은 정원이 있는 굽어진 길을 지나 별로 훌륭하지 않은 교회 현관에 이르렀죠.
 입구의 현관은 조각이 몇 개를 제외하면 거칠게 조각된 바위기둥이 두세 개, 또 그 기둥과 같은 돌로 된 벽돌 지붕이 전부였습니다. 왼쪽에는 잡초가 무성한 묘지가 있었고 중앙에는 철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오른쪽에는 사제관이 세워져 교회의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게 또 극단적으로 소박해서 가까이 다가가자 두세 마리의 닭이 주위에 흩뿌려진 곡물을 집어 먹고 있었습니다. 닭은 성직자의 적적한 습관에 익숙한지 저희가 나와도 별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갈라진 듯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늙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왔습니다.
 그건 이전 사제가 키우던 개로 축 처진 눈동자, 회색 털 등 이 이상 나이를 먹은 개는 없겠지 싶을 정도로 쇠약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개를 가볍게 두들겨주니 무언가 만족했는지 곧장 제 옆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전 사제 시절부터 여기를 지켰다는 할머니가 나타나셨습니다. 노파는 작은 손님방에 저희를 안내하여 앞으로도 자신을 써줄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도 개도 닭도 이전 사제가 남긴 전부 그대로 돌볼 거라 말하자 그녀는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세라피온은 이만큼 작은 세대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가 바라는 돈을 곧장 내주었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꼬박 일 년 동안 제 직무를 충실히 해냈습니다. 기도와 정진은 물론이고 제 몸이 아픈 날에도 아픈 사람의 마음고생을 덜어주고 다른 일에서도 제 생계가 곤란해질 정도로 사력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저는 스스로에게서 충족되지 않는 커다란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신의 은혜는 제게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신성한 직업에 몸을 담은 자에게 올라와야 할 행복을 조금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제 마음은 저 먼 바깥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클라리몽드의 말은 그때도 제 입술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아아, 여러분. 이 사실을 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단 한 번 고개를 들어 한 여인을 보아 그 후 몇 년 동안 가장 비참한 고뇌를 거듭하여 제 평생의 행복이 영원히 파괴되었음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패배 상태에 대해, 또 영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더욱 무서운 파멸에 떨어진 것에 대해 더 이야기해드려야겠지요. 이제부터는 곧장 사실의 이야기로 옮겨 가려 합니다.

       셋

 어느 밤의 일이었습니다. 제 사제관의 현관종이 길게 울렸지요. 노파가 나와 문을 열자 한 남자의 그림자가 서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얼굴색은 그야말로 차가운 금속 같은 색을 하고 있었고 몸에는 비싼 외국 의상을 두르고 허리에는 단검을 차고 있는 게 노파의 제등으로 보였습니다. 노파도 한 번은 놀라서 겁을 먹었는데 여자는 그녀를 진정시키고는 제게 신성한 일을 부탁하러 왔으니 만나게 해달라 말했습니다.
 마침 제가 내려가려던 차에 노파가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남자는 저를 향해 굉장히 고귀한 자신의 여주인이 중병에 걸렸으며 임종 때에 성직자가 옆에 있기를 바란다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곧장 같이 간다고 대답하며 임종 도유식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고 서둘러 2층에서 내려왔습니다.
 밤의 어둠과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은 말 두 필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은 땀에 흠뻑 젖었고 코에서는 커다란 숨이 나와 하얀 연기 같은 수증기가 가슴 언저리를 두르고 잇었습니다. 남자는 등불을 들고 먼저 저를 말위로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안장 위에 손을 얹는가 싶으니 곧장 다른 말에 올라 타 무릎으로 말의 양배를 눌러 고삐를 풀었습니다.
 말은 용맹히도 화살처럼 달려 나갔지요. 제 말은 그 남자가 고삐를 쥐고 있었기에 그의 말과 나란히 달렸습니다. 저희는 정말로 격렬히 달렸습니다. 땅은 마치 짙은 푸른색의 긴 선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뒤로 또 뒤로 흘렀고 우리가 달리는 양옆의 나무 그림자는 혼란스러운 군세처럼 술렁였습니다. 어두운 숲을 지났을 때에는 일종의 미신적인 공포 탓에 온몸에 추위를 느꼈습니다. 또 어느 때는 말발굽이 돌을 걷어차 튀는 불똥이 마치 불의 길이라도 만드는 것만 같았지요.
 누구라도 그런 밤늦은 시간에 저희처럼 질주하는 걸 보면 악마가 탄 두 요괴라 착각할 게 분명할 테지요. 저희가 가는 길에는 때때로 수상한 불이 날아다녔고 먼 숲에서는 밤새가 사람을 겁주듯이 울었으며 굽어지는 길에는 인광만 같이 빛나는 들고양이의 눈이 보였습니다.
 말은 갈기가 흐트러지고 옆구리를 땀으로 물들이며 거친 콧김을 내뿜었습니다. 그럼에도 말이 속도를 늦추면 안내자가 일종의 기괴한 외침으로 말에게 격한 겁을 주었습니다.
 선풍과 같은 질주가 겨우 끝이 나자 수많은 검은 사람의 무리가 엄청난 숫자의 등불을 만들며 저희 앞에 나타났습니다. 저희는 커다란 나무다리를 거창하게 건너고는 두 탑 사이에 검고 커다란 입을 열고 있는 둥근 지붕이 달린 문을 지났습니다. 저희가 들어가자 성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횃불을 든 가신들이 각 방면에서 튀어나왔고 그 횃불은 여기저기서 높고 낮게 흔들렸습니다. 제 눈은 단지 이 커다란 건물에 당혹스러울 뿐이었지요. 수많은 기둥, 복도, 계단의 교차, 그 장엄하고 화려하면서도 환상적으로 우아한 그곳. 전부 이야기에서나 볼 법한 구조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검은 시종이, 언젠가 클라리몽드의 편지를 제게 건네준 시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저를 말에서 내려주려 다가오자 목에 금사슬을 건 검은 벌벳 옷을 입은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상아 지팡이를 짚으며 제게 인사하러 나왔습니다. 남자가 흘린 눈물은 뺨을 타고 그의 하얀 수염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저으면서 슬픈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신부님. 너무 늦으셨어요. 당신이 늦으셔서 영혼의 구원을 부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불쌍한 유체와 함께 밤을 보내주시지요."
 그 노인은 제 팔을 붙잡고 시체가 놓인 어느 방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보다도 더 심하게 울었지요. 죽은 사람이란 게 다름 아니라 제가 이만큼이나 깊고 격렬하게 사랑했던 클라리몽드였기 때문입니다.
 침대 아래에 기도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동으로 만든 촛대서 빛나는 창백한 불꽃은 있는 듯 없는 듯 옅은 빛으로 어두운 실내를 밝혔고 그 빛은 여기저기서 가구나 호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조각된 항아리 안에는 마른 하얀 장미가 단 한 장의 잎만 남긴 채로 꽃도 잎도 전부 향이 나는 눈물처럼 꽃병 아래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쪼개진 검은 가면이나 부채, 또 여러 독특한 가장 옷이 팔걸이가 달린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걸 보면 죽음이 어떠한 소식도 없이 불쑥 이 호화로운 저택에 파고든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침대 위를 볼 용기도 없어 무릎 꿇은 채로 열심히 죽은 사람의 명복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그녀의 영혼과 제 사이에 묘를 두고 제게 기도할 적에 죽음으로 영원히 성스러워진 그녀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해준 걸 저는 깊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열정은 점점 약해졌고 어느 틈엔가 공상에 떨어졌습니다. 이 방은 조금도 죽은 사람의 방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수많은 고인과 밤을 같이 보내며 항상 기운이 꺾이는 듯한 향에 익숙해져 왔죠. 그러나 이 방에선――저는 사실 여자의 요염한 냄새를 알지 못합니다만――어쩐지 눅눅하고 동양스러우며 마음이 풀리는 듯한 향이 부드럽게 퍼져 왔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창백한 불은 물론 환락을 위해 켜둔 것일 텐데 시체 옆에 놓이는 노란 등불을 대신하는 만큼 황혼을 방불케하는 빛을 내뿜고 있었던 것입니다.
 클라리몽드가 죽어 영원히 저와 멀어질 때에 제가 다시 그녀와 만난 신비한 운명에 대해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괴롭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지요. 그러자 누군가 제 뒤편에서 비슷한 한숨을 내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놀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제 한숨 소리가 그렇게 들리도록 울리고 만 겁니다. 저는 그때까지 보지 않으려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기어코 죽음의 침상 위에 시선을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끝자락에 커다란 장미 모양이 있고 금실과 은실로 장식된 붉은 융단 장막을 두고서 저는 아름다운 고인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깍지 끼고서 온몸을 곧게 편 채로 잠들어 있었지요.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아마천을 덮고 있었는데 그게 벽에 걸린 천의 짙은 남색하고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그 아마는 그녀의 우아한 몸의 형태를 조금도 숨김없이 드러내는 아름다운 물건이었습니다. 그녀의 몸의 부드러운 손은 백조의 목덜미 같았고 정말로 죽었다 해도 그 아름다움을 빼앗을 수는 없었지요. 잠든 그녀의 모습은 교묘한 조각가가 왕녀의 묘위에 두기 위해 만든 설화석고상만 같았으며 혹은 조용히 내리는 눈에 덮여 잠든 소녀와도 같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기도를 올리기 위한 사람으로서 근신의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장미는 반쯤 시들어 있었지만 그 강렬한 향은 제 머리에 스며 들어 취한 것처럼 만들었죠. 몇 분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걸음을 돌리는 길에 침대 앞에 멈춰 서 수의에 비쳐 보이는 아름다운 시체를 생각하는 사이에 황당한 공강시 제 머릿속에 떠올랐지요.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게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나를 이 성안으로 데려와 사랑을 밝힐 목적으로 일부러 죽은 척한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또 한 번은 하얀 아마천 아래서 그녀가 발을 움직여 길게 뻗은 시트에 파도를 치게 만든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정말 클라리몽드일까? 이게 그녀라는 증거가 어디 있지? 그 검은 시종은 다른 부인의 심부름꾼이지 않았을까? 나는 단지 혼자 결론을 내린 채로 이런 미치광이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거 아닐까?"
 그럼에도 제 가슴은 격한 고동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녀야. 그녀가 분명해."
 나는 다시 침대로 다가가 의문의 시체를 주의깊게 보았습니다. 아아, 이렇게 된 이상 정직하게 고해야만 하겠지요. 그녀의 아주 잘 정돈된 형태, 그건 죽음의 그림자로 정화되고 더욱 신성해졌다고는 해도 세상에 있을 때보다 더 육감적이었으며 누가 보아도 그저 잠든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장례를 위해 이곳에 온 것마저 잊었습니다. 마치 신랑이 신부가 기다리는 방에 들어오고 신부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숨기고 끝내는 몸 전체를 감싸는 베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장면을 상상했던 겁니다.
 저는 비탄에 젖어 있었다 해도 새로운 희망에 휩싸여 슬픔과 기븜에 함께 떨면서 그녀의 위로 몸을 숙여 두르고 있던 걸 살짝 움켜쥐고 그녀가 눈을 뜨지 않도록 숨을 죽인 채로 치웠습니다. 저는 심한 고동을 느끼며 관자놀이에 피가 올라간 것만 같았고 무거운 대리석 판을 든 것처럼 온몸으로 땀을 흘려야만 했지요.
 거기 누워 있는 건 분명히 클라리몽드였습니다. 이전날 제가 성직자가 되었을 때 교회에서 본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랑스러운 클라리몽드였던 거지요. 그녀는 죽음을 통해 마지막 매력을 드러냈습니다. 창백한 그녀의 뺨, 살짝 광택이 바란 입술, 아래로 내려간 긴 속눈썹, 하얀 피부에 내려 온 풍부한 금발, 그건 조용한 순결과 정신의 고난을 보여주며 무어라 말 못할 유혹의 한 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길게 풀린 머리에 작고 창백한 꽃을 꽂고 그걸 어느 광택 있는 베개를 대신하며 풍부하게 감긴 머리로 드러난 어깨를 감싸고 있었지요. 그녀의 아름다운 두 손은 천사의 손보다도 투명했고 경건한 휴식과 정숙한 기도를 올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또 그 손에는 아직 진주 팔찌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상아 같은 부드러운 피부나 아름다운 형태의 곡선은 죽은 후에도 일종의 요염함을 담고 있었답니다.
 저는 그 후로 말로 다 못할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 지켜볼 수록 그녀가 이 아름다운 몸을 영원히 버렸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 탓인지 혹은 램프의 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혈기 없는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지요. 저는 가볍게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습니다. 차갑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언젠가 교회의 문에서 제 손을 만졌을 때만큼 차가운 거 같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 그녀의 위로 몸을 숙였습니다. 그렇게 제 뜨거운 눈물은 그녀의 뺨을 적셨습니다.
 아아, 이 절망과 무력의 슬픔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말로 못할 괴로움이 계속되면서 저는 한사코 그녀를 바라보았을 겁니다. 저는 제 평생의 생명을 모아 그녀에게 주고 싶었어요. 제 몸에 불타는 불꽃을 그녀의 차가운 유해에 부어주고 싶었어요. 그런 허튼 바람을 품고는 했던 겁니다.
 밤은 깊어져 갔습니다. 이제 그녀와 영원히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온 건가 싶었던 때, 저는 단지 한 명의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마지막의 슬픈 마음을 담은 단 한 번의 입맞춤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오, 기적입니다. 열렬하게 맞춘 제 입술에, 제 숨결에 클라리몽드의 입에서 나온 얕은 숨이 느껴진 것입니다. 그녀가 눈을 떴습니다. 눈은 이전과 같은 빛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쉬며 두 팔을 뻗고 무어라 말로 못할 기쁨의 얼굴색을 보이며 제 목을 안았습니다.
 "아아, 로뮤오 님……"
 그녀는 하프 소리를 연주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속삭였습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시나요.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으나 당신이 오지 않아 죽었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결혼의 약속을 했지요. 저는 당신을 만날 수 있어요. 찾아갈 수도 있어요. 잘 있으세요, 로뮤오 님. 잘 있으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건 단지 이거뿐이에요. 저는 당신이 입맞춤을 한 몸을 살려 당신께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금방 만날 수 있을 테지요."
 그녀의 머리가 뒤로 풀썩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팔은 아직 저를 붙들 듯이 감고 있었지요. 불쑥 강한 바람이 창문에서 방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하얀 장미에 남아 있던 단 한 장뿐인 잎이 잠시 가지 끝에서 나비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그 잎은 가지서 벗어나 클라리몽드의 영혼을 실고 창문으로 날아가 버렸지요. 램프 불도 꺼졌습니다. 저는 그만 유해의 가슴 위에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넷

 제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저는 사제관의 작은방 안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전 사제 때부터 키우던 개가 이불 밖으로 늘어진 제 손을 핥고 있었죠.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저는 그대로 삼일 밤낮을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동안에 조금도 호흡도 안 하고 살아 있는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는군요. 노파 발바라가 말하기를 제가 사제관을 출발한 밤에 찾아온 금속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다음 날 아침에 말없이 저를 짊어지고 오더니 그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클라리몽드를 다시 본 그 성에 관한 건 주변 이웃 중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어느 아침, 세라피온은 제 방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제 건강을 위선적이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으며 마치 라이온처럼 커다랗고 노란 눈으로 측량이라도 하듯이 제 품 안을 살피려 들다 대뜸 깔끔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긴 제 귀에 최후의 심판날의 나팔처럼만 울렸답니다.
 "그 유명한 창부 클라리몽드가 2, 3일 전에 팔일 밤낮으로 연회를 계속한 끝에 죽었습니다. 그건 마게라 해야 될 대연회로 발타자르나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의 난행이 다시 한 번 고스란히 되풀이 된 꼴이지요. 아아, 우리는 참으로 무서운 시기에 태어난 모양입니다. 어떤 말을 쓰는 건지 모를 검은 노예가 손님의 급사를 보았다는데 제게는 그게 이 세상의 악마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요. 연회장 사람들이 입은 옷에 이르러서는 제왕의 대외용 옷에도 어울릴 정도로 훌륭했답니다. 그 클라리몽드에 관해서는 여러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연인은 모두 무섭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하는군요. 세간에선 그 여자를 구울이나 뱀파이어라 부르는 모양인데 제게는 역시 악마인 걸로만 보입니다."
 세라피온은 여기서 대화를 끊고는 그 이야기가 제게 어떤 효과를 주었는지 이전보다 깊게 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클라리몽드의 이름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그녀가 죽은 걸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 저를 괴롭히는 건 그 사건이 그날 밤에 제가 본 광경과 조금도 틀리지 않은 우연의 합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번뇌나 공포를 되도록 평정으로 겉꾸몄습니다만 도무지 얼굴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라피온은 불안이 섞인 험악한 눈초리로 저를 보다 다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고를 해드려야 할 거 같군요. 당신은 지금 나락의 끝자락에 발을 얹은 채 서있는 꼴입니다. 악마의 손톱은 길죠. 그리고 그들의 묘는 진짜 묘가 아닐 때가 있습니다. 클라리몽드의 묘에는 삼 중의 봉인을 해둬야 합니다. 왜냐면 만약 세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녀가 죽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뮤오 군, 부디 당신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말한 세라피온은 조용히 현관 쪽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S로 돌아갔는데 저는 배웅조차 하지 않았지요.
 저는 그러는 사이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직무를 시작했습니다. 클라리몽드의 기억과 세라피온의 말은 끝없이 제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만 세라피온이 말한 불길한 예언이 진실이 되어 나타날 듯한 특별한 사건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세라피온이나 저의 공포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밤에 신비한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채로 침실 커튼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고리가 커튼의 봉 위를 거칠게 미끌어지는 걸 느끼고 서둘러 팔꿈치로 몸을 일으켰지요. 그러자 제 앞에 한 여자가 똑바로 서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그 손에 묘지에서 자주 볼 법한 작은 램프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손가락은 장미색으로 투명하게 비추었고 손가락에서 팔에 걸쳐 서서히 어두운 백색을 두르고 있었지요.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는 건 죽음의 침상에 누울 때에 덮어진 하얀 아마천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빈곤한 차림을 부끄러워하듯이 가슴 언저리를 감쌌습니다만 작은 손으로는 충분하지 못 했습니다. 램프의 창백한 빛을 받아 그녀의 몸도 몸에 두르고 있는 것도 모두 통일되어 보였으나 한 색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그녀의 모든 윤곽이 잘 드러나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젖은 미녀를 표현한 과거의 대리석상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리지 않고 또 조각이든 살아 있는 여자든 그녀의 아름다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녹색 눈동자에 빛이 없는 것과 과거엔 진홍색이었던 입술이 뺨과 같은 약한 장미색으로 하고 있는 것만이 달랐습니다. 그녀는 그 머리에 작고 푸른 꽃을 꽂고 있었는데 그 잎이 거의 떨어지고 꽃도 말라 있었지요. 하지만 그마저도 그녀의 우아함은 조금도 방해하지 못했고 이런 모험을 시도하여 신비한 차림으로 이 방에 들어와 있었음에도 제가 조금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램프를 테이블 위에 두고 제 침대 아래에 앉아 제 쪽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선 아직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하지만 때로는 은처럼 개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로뮤오 님,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은 분명 제가 당신을 잊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멀고 정말로 먼, 누구도 두 번은 돌아오지 못할 곳에서 찾아왔답니다. 그곳에는 태양도 없고 달도 없지요. 그곳에는 단지 공간과 그림자만 있을 뿐이고 지나는 길도 없고 땅도 없고 날개로 날 공기도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찾아왔어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끝내는 죽음마저 극복해야 하니까요…… 아아,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슬픈 얼굴이나 무서운 것과 만났는지 당신이 알까요. 제 영혼이 단지 의지의 힘만으로 이 지상으로 돌아와 제 본래 몸을 찾고 그 안에 돌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저는 제 위에 덮여 있는 무거운 돌을 밀어내는데 무서울 정도의 노력을 필요로 했답니다. 제 손바닥을 보세요.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죠. 이 위에 입맞춤을 해주세요. 이게 나을 수 있도록……"
 그녀는 차가운 손을 번갈아 제 입에 대었습니다. 저는 그에 전부 입맞춤을 했지요. 그녀는 그 사이에 무어라 말로 못할 애정을 담아 저를 보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세라피온의 충고도 또 제가 신성한 직업을 맡고 있단 사실도 전부 잊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방문에 어떠한 거절도 없이 복종하였고 그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클라리몽드의 피부가 가진 차가움이 스며 들어 제 전신을 오싹하게 만들어 떨게 했습니다. 불쌍하게도 저는 그 후로도 많은 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녀를 악마라 믿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녀는 악마 다운 모습을 가지지 않았을뿐더러 악마가 그만큼이나 교묘하게 손톱이나 뿔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뒤로 몸을 빼고는 참으로 나른한 유혹을 보이며 긴 의자의 끝자락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제 머리에 작은 손을 넣고는 머리를 다듬어 새로운 형태가 제 얼굴에 걸맞는지 살폈습니다.
 저는 이 죄 깊은 환락에 취해 그녀의 동작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 동안에도 그녀는 상냥하고 아이 같은 잡담을 나누었지요. 무엇보다 신비한 건 이런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와중에도 저 스스로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단 점입니다. 그건 마치 꿈을 꿀 적에 굉장히 환상적인 일이 벌어져도 그걸 당연한 걸로 여겨 딱히 신비해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지금의 모든 상황도 제 온몸에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지요.
 "로뮤오 님, 저는 당신을 발견하기 전부터 사랑했지요. 그리고 당신을 찾았답니다. 당신은 제가 꿈꾸던 사람이에요. 교회 안에서, 심지어 그 운명적인 순간에 당신을 처음 보았었지요? 저는 그때 바로 '저 분이야'하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랑을, 당신을 위해 가진 미래의 모든 사랑을, 그야말로 사제의 운명마저 바꾸고 제왕도 제 발밑에 무릎 꿇릴 정도의 사랑을 담아 당신을 바라보았지요. 그런데 당신은 제게 오지 않으시고 하느님을 고르셨어요…… 아아, 저는 하느님이 미워요. 당신은 저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니까요. 생각해 보면 억울해요. 저는 불행한 여자지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저 하나만의 것으로 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 번의 입맞춤으로 저를 이 세상으로 다시 되살려주었답니다. 이 죽은 클라리몽드를…… 그 클라리몽드는 지금 당신을 위해 묘의 문을 열고 찾아왔답니다. 저는 당신에게 살아 있는 기쁨을 드리고 싶어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여기로 온 거죠."
 그러한 정열적인 사랑의 말은 제 감정이나 이성을 현혹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향해 "신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한다" 같은 굉장히 불경한 말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녀의 눈은 다시 불타기 시작해 녹옥처럼 빛났답니다.
 "정말이신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저도 사랑해주시는 건가요?" 그녀는 아름다운 손을 제게 감으며 소리쳤습니다. "그럼 저랑 가주시는 거죠? 제가 가고 싶은 곳에 와주시는 거죠? 이제 이 음험한 장사는 그만하세요. 당신을 기사 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드리겠어요. 저는 당신의 연인이랍니다. 클라리몽드의 마음에 든 연인――로마 교왕마저 물리칠 정도의 제 연인――그거라면 남자의 긍지가 될만 하겠지요. 아아, 내 사람…… 저는 무어라 말 못할 정도로 행복하답니다. 앞으로 아름다운 황금 생활을 함께 하는 거예요. 저희는 언제 출발하는 거죠?"
 "내일, 내일……" 저는 무아몽중히 소리쳤습니다.
 "내일……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저는 그동안 화장을 고치겠어요. 이대로는 너무 볼품없어서 여행하기엔 곤란하니까요. 저는 이제 가서 제가 죽은 줄 알고 슬퍼하는 친구들에게 알려줘야겠어요. 돈도, 옷도, 마차도 전부 준비해서 오늘 밤과 같은 시간에 찾아오죠. 잘 있어요."
 그녀는 제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램프를 들고 사라지자 커튼은 원래대로 닫혔고 주위는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깊은 잠에 들어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했지요.

       다섯

 저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는데 이 신비한 일이 떠올라 종일 고민해야 했지요. 저는 결국 어제 일은 제 열성적인 상상에서 터져 나온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의 감각이 너무 생생하여 어제 일이 도무지 공상이 아닌 것처럼 이겨졌고 다음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악마적 생각을 떨쳐내달라 신께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들었지요.
 저는 곧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또 그 꿈이 이어졌습니다. 커튼이 다시 열리고 클라리몽드가 이전과 달리 수의에 둘러싸인 창백한 색을 하거나 뺨에 죽음의 보라색을 드러내는 법도 없이 화려하고 쾌활한 얼굴색을 한 채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금색 테두리를 한 명주 바지가 보일 정도로 파져 있는 녹색 벌벳 여행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금색 머리는 넓은 검은색 펠트 모자 아래서 길게 퍼져 있었고 모자 위에는 하얀 깃털이 여러 형태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손에 금색 피리가 달린 작은 마편을 들고 있었는데 그 피리로 제 머리를 가볍게 튕기며 말했습니다.
 "정말 잠꾸러기네. 이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야? 진작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서 일어나, 이제 시간 없어."
 저는 곧장 침대에서 튀어 올랐죠.
 "자, 스스로 옷을 갈아입어. 어서 가자."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작은 짐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어물거리니까 말이 갑갑해서 문을 뜯어먹기 시작했어. 진작 출발했으면 삼십 마일은 더 갔을 텐데……"
 제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그녀는 제게 옷을 하나씩 건넸습니다. 그렇게 제 서투른 손놀림을 보며 웃거나 제가 실수하면 입는 법을 가르쳐주곤 했죠. 그녀는 더욱이 제 머리를 다듬어주더니 불쑥 품에서 끝에 금은 세공이 된 베니스풍의 작은 수정 거울을 꺼내 연극투를 가미하여 "마음에 드셨습니까, 당신의 시녀로 삼아주시지요."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미 이전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고 스스로 조차 아닐 정도로 변해 있었습니다. 훌륭히 만들어진 석상과 단순한 돌 정도의 차이였지요. 저는 정말로 미남이 되었고 어쩐지 낯간지러웠습니다. 질 좋은 옷, 사치스러운 가슴 장식은 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고 줄무니가 새겨진 2, 3 야드의 천이 사람을 이렇게 바꿀 수가 있는 거냐며 놀랐습니다. 옷이 달라지자 제 피부색마저 달라져 고작 십 분도 되지 않아 상당히 세련된 사람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 새로운 옷에 익숙해지기 위해 실내를 걸어 보았습니다. 클라리몽드는 어머니와 같은 기쁨으로 찬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자신의 일에 만족한 듯 보였습니다.
 "자, 그쯤하고 나가자. 멀리 가야 하니까…… 안 그러면 늦고 말 거야."
 그녀는 제 손을 잡았습니다. 모든 문은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열렸지요. 저희는 자는 개도 깨우지 않고 그 옆을 지났습니다. 현관 근처에는 마르그리토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저를 데리러 온 까무잡잡한 남자지요. 그는 세 마리의 말의 고삐를 끌고 있었는데 말은 하나 같이 성에 갈 때와 같은 흙마였습니다. 한 마리는 저, 한 마리는 그, 또 한 마리는 클라리몽드가 타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한 말은 서풍이 암말에게 잉태했다는 스페인의 사향 고양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람처럼 빠르게 달렸지요. 출발 때에 마침 오르기 시작한 달이 저희가 가는 길을 비춰주어 전차의 한 바키가 수레서 떨어졌을 때처럼 하늘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오른쪽에서는 클라리몽드가 날 듯이 말을 달리게 해 저희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숨을 헐떡이며 노력하는 게 보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평평한 들판에 나왔는데 거기에 솟은 나무 깊은 곳에 네 마리의 커다란 말이 끄는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마차에 타자 마부가 말을 재촉하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한 팔을 클라리몽드의 가슴가로 두르고 있었는데 그녀 또한 한 팔을 제게 둘러 그 머리를 제 어깨에 맡겼지요. 저는 그녀의 반쯤 드러난 가슴이 제 팔을 가볍게 누르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이런 열렬한 행복을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걸 잊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걸 잊었던 것처럼 제가 성직자의 몸이란 걸 잊고 악마에게 매려 될 정도의 황홀한 심정이 든 것입니다.
 그날부터 제 성질은 어쩐지 절반씩 갈린 듯하여 제 안에 서로를 알지 못하는 두 인간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때의 저는 성직자이면서 신사의 꿈을 꾸는 거 같았고 또 어느 때는 신사면서 성직자의 꿈을 꾸는 거 같았습니다. 저는 이제 꿈과 현실의 경계조차 판단할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사실이고 어디서 꿈이 끝나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고귀하고 젊은 귀족이자 방탕자로서 성직자를 매도하거나 성직자로서 젊은 귀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미워하곤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이 다른 두 생활을 인정하면서 한없이 강렬히 이어갔습니다. 단지 스스로 알 수 없는 불합리함이란 하나의 인간이 가진 자아가 성격이 다른 두 인간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었지요. 저는 자그마한 C 마을의 사제인가, 아니면 클라리몽드의 애인 로뮤오 군인가. 이 법칙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건 어찌 되었든 저는 베니스에서 살았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지요. 제 이 환상적인 여행은 얼마나 현실이고 얼마나 환상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저희 두 사람은 카나레지오 해안의 대저택에 살았습니다. 저택 내부는 벽화나 조각으로 가득했고 대가의 명작 중에는 티치아노(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활동한 베니스의 화가)의 두 작품도 클라리몽드의 방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왕궁이라 해도 좋을 장소였죠. 두 사람 모두 화려한 곤돌라와 가풍의 정복을 입은 선두를 지녔으며 음악실도 있는가 하면 특별한 전속 시인마저 있었습니다.
 크랄리몽드는 항상 화려한 생활을 하여 자연스레 클레오파트라의 분위기를 뿜어냈습니다. 또 저는 공작 가문의 아들로서 마치 열두 사도 중 하나이며 혹은 이 조용한 공화국(베니스)의 네 선교사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존경받았고 베니스 총독이라도 길을 비켜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악마(사탄)이 이 세상에 내려온 이후로 저만큼 오만하고 무례한 동물도 없었을 테지요. 저는 더욱이 리도로 향해 도박을 꾀했는데 그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의 항구라 해도 좋았습니다. 저는 여러 계급몰락한 귀족 자제, 극장의 여자들, 교활한 악당, 허세부리는 난폭자 등을 불러 놀았답니다.

 이러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클라리몽드에게 충실했으며 또 열렬히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클라리몽드도 크게 만족하여 사랑이 달라지는 법은 없었지요. 클라리몽드를 지닌 건 스무 명의 여자 아니, 모든 여자를 지닌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느끼기 쉬운 성질과 여러모로 독특한 풍채, 새롭고 생생한 매력을 모두 몸에 갖추어서 그 카멜레온만 같은 여자였습니다. 사람이 만약 다른 여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음란한 마음을 느끼면 그녀는 곧장 그 미녀의 성격이나 용모를 완전히 몸에 둘러 그 사람에게 같은 음란함을 느끼게 하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제 사랑을 백 배로 돌려주었답니다. 이 땅의 젊은 귀공자나 십법관에게도 화려한 결혼 신청이 들어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지요. 포스칼리 가문(베니스 총독 포스칼리 프랑세소의 가문)의 사람도 결혼을 청했지만 그녀는 그걸 전부 거절했습니다. 돈은 충분히 지녔으니 그녀는 사랑 이외의 건 하나도 바라지 않았지요. 단지 이 사랑――청춘의 사랑, 순진한 사랑, 그건 자신의 마음에서 불타는 사랑, 그리고 그게 최초이자 또 마지막인 열정 이외엔 무엇도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행복하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단지 단 하나의 괴로움은 매일 밤 저주나 다름 없는 악몽에 사로잡힌단 거였죠. 가난한 마을의 사제로서 시종 자신의 난행을 참회하고 또 죄를 줄이기 위해 고행을 하는 꿈이었으니까요.
 항상 그녀와 같이 있다는 안심 탓에 저는 클라리몽드의 달라진 분위기에 별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라피온이 그녀를 두고 한 말은 이따금 제 기억을 불러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게 했습니다.
 클라리몽드의 건강은 이전만큼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피부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불러온 의사들도 그 병명을 알지 못해 치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다들 영문 모를 약을 주었습니다만 하나같이 효과가 없어 두 번 부를 일은 없었지요. 그녀는 눈에 보일 정도로 더 질려 갔고 몸은 점점 차가워졌으며 그날 밤, 그 모르는 성에서 만난 것처럼 하얗게 죽어갔습니다. 저는 그 말라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말로 다 못할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제 괴로움에 감동하여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 느낄 법한 운명적인 미소를 아름답고 또 쓸쓸하게 드리웠습니다.
 어느 아침의 일입니다. 저는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은 작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은 후 조금도 그녀 옆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 옆에 앉았습니다. 그때 과일 껍질을 벗기다 실수로 제 손가락에 깊은 상처를 내버렸지요. 자그마한 보라색 피가 새어 나와 클라리몽드에게도 조금 흘렀나 싶었더니 얼굴색이 갑자기 달라지더니 이제까지의 그녀가 보인 적 없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기쁨의 표정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동물 같은 가벼움――마치 원숭이나 고양이처럼 가볍게 뛰어내려 제 상처에 입을 얹고서 정말로 기쁘다는 양 그 피를 빨기 시작했죠.
 그녀는――마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셀레스나 시라쿠스 술을 맛보듯이 천천히 조심스레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눈동자는 점점 반쯤 감겨 갔고 녹색 눈동자의 둥근 공동이 타원형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이따금 제 손에 입맞춤을 하기 위해 피를 빠는 걸 멈추었습니다만 더욱이 붉은 피가 나오는 걸 기다려 상처에 입술을 대고 있었지요. 피가 나오지 않는 걸 알자 그녀의 눈은 생기 넘치게 빛났고 오월의 여명보다도 장미색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얼굴색도 기운이 넘쳤고 손에서도 따스함이 돌기 시작했으며 이제까지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해진 것입니다.
 "나는 죽지 않아. 죽지 않아." 그녀는 반쯤 미치광이처럼 제 목덜미에 매달려 외쳤습니다.
 "나는 아직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내 생명은 당신 거야. 내 몸은 전부 당신한테 받은 거야. 당신의 존귀하고 값나가며 이 세계의 어떤 영약보다도 우수한 고귀한 핏방울이 내 생명을 원래대로 해주었으니까."
 이 광경은 영원히 저를 겁주었고 클라리몽드를 향해 이상한 의문을 들게 했습니다. 그날 밤, 제가 침상에 들어가자 수면은 저를 불러내 과거의 사제관으로 돌려보냈지요. 저는 세라피온이 그전보다 더 엄숙하고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는 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윽고 슬프게 소리쳤지요.
 "너는 혼만 잃는 게 아니다. 이제는 그 몸도 잃으려 하고 있어. 타락한 젊은 사람은 실로 지독한 꼴을 본다."
 그 말은 저를 강하게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인상이 또렷함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곧 제 안에서 사라져 다른 여러 생각도 제 마음에서 떠나갔습니다.

       여섯

 그러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제가 거울을 보고 있자니 클라리몽드는 그 거울에 자신이 담긴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이 항상 식후에 먹는 향료를 넣은 포도주 잔에 무언가 가루를 넣고 있지 뭡니까. 그런 걸 거울로 보았으니 저는 잔을 손에 들고 입으로 옮기는 흉내를 하고는 옆에 놓인 탁자 위에 두었습니다. 그녀가 돌아볼 때에 저는 그 잔의 내용물을 몰래 바닥에 흘리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지요. 하지만 그런 걸 보고 잠이 올 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발견하자 결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리몽드는 밤의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옷을 벗고는 제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가만히 제 옆에 누웠습니다. 그녀는 제가 잠든 걸 확인하고는 이윽고 제 팔을 들어 올렸죠. 그리고 머리에서 황금의 핀을 뽑아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한 방울……딱 한 방울이야. 이 침 끝에 루비만큼……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죽지 않아……아아, 슬픈 사랑…… 당신의 아름답고 보라색으로 빛나는 피를 나는 마셔야만 해. 잘 자렴, 내 존귀한 보물…… 잘 자렴, 나의 하느님, 나의 아기…… 나는 당신한테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빨아들여야 해. 나는 당신을 아주 사랑해서 다른 연인의 피를 빨기로 했어. 하지만 당신을 알고 나니 다른 사람들은 싫어졌어…… 아아, 아름다운 팔…… 어쩜 이리 둥글고 어쩜 이리 하얀 팔일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깔끔히 푸른 혈관을 찌를 수 있을까."
 그녀는 혼잣말을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 눈물이 제 팔을 타고 흐르는 걸 느끼고 그녀가 그 손으로 매달리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기어코 결심해서 핀으로 제 팔을 가볍게 찌르고 거기서 새어나오는 피를 빨기 시작했죠. 두, 세 방울 밖에 마시지 않았건만 그녀는 제가 눈을 뜨는 걸 두려워해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조심스레 제 팔에 작은 붕대를 감아주었습니다. 아픔은 금세 사라졌죠.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라피온의 말은 틀리지 않았던 거죠. 이 명백한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클라리몽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먼저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해 원하는 만큼 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지요. 그녀도 자신을 흡혈귀(뱀파이어)라 생각하지 말라고 탄원하는 듯했습니다. 저도 이제까지 보고 들은 바에 따라 그런 걸 의심하지 않았기에 한 방울씩의 피를 주는 건 아깝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되려 먼저 팔의 혈관을 펼치고 "자, 마셔도 돼. 내 사랑이 내 피와 함께 네 피에 스며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마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거나 또 핀을 찔리는 건 항상 주의 깊게 피했기에 두 사람은 조화를 이룬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직자로서의 제 양심의 가책은 이제까지 이상으로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갖은 방법으로 제 육체를 제어하고 정화하려 노력했지만 전혀 손 쓸 도리가 없었지요. 그 수많은 환상이 무의식 중에 벌어져 저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다 해도, 또 그게 꿈이든 사실이든 그러한 음욕에 젖은 마음과 손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불쾌한 환각에 이끌리지 않을 수단으로 잠에 들지 않기로 노력했습니다. 저는 손가락으로 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벽에 기대어 몇 시간이나 서있는 등 되도록 잠기운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잠기운은 여전히 제 눈을 덮쳐와 참을 수 없었고 절망적인 불쾌함 속에 두 팔은 저절로 내려가 수면의 파도는 다시 저를 불성실한 절벽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세라피온은 가장 격한 훈계를 하셨고 제 유약함과 열성의 부족함을 꾸지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다른 때보다 더 고민할 때에 그가 말하였지요.
 "당신이 이 끝없는 고뇌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비상수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병고는 큰 치료를 필요로 하죠. 저는 클라리몽드가 묻혀 있는 장소를 압니다. 저희는 그녀의 유해를 발굴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당신의 연인이 얼마나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시지요. 그럼 그 벌레 먹은 부정한 시체――흙이 되어가는 시체를 위해 당신의 혼을 잃을 일은 없을 테지요. 반드시 당신을 원래대로 되돌려줄 겁니다."
 저도 설령 한때의 만족은 느꼈다 해도 이중생활에는 이미 학을 떼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공상의 희생양이 된 게 신사인지 혹은 성직자인지를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두 사람 중 누구 하나를 죽여 다른 한 쪽을 살리는가, 혹은 양쪽 모두 죽이는가. 도무지 지금의 무서운 상태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세라피온은 막대기와 곡괭이, 또 제등을 준비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밤중에 저희는――묘지로 향했습니다. 세라피온은 그 주변이나 묘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죠. 수많은 묘비가 어두운 제등의 빛을 받은 끝에 두 사람은 긴 잡초에 가려지고 이끼가 끼었으며 기생식물이 솟은 석판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묘비명의 전문을 낭독하니 아래와 같았지요.

 여기에 클라리몽드 묻히다
 살아 있을 적에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 불렸던

 "여기가 분명하겠죠." 세라피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등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막대기를 석판 끝자락 아래로 밀어 넣어 들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돌이 열리자 이번에는 곡괭이로 파기 시작했지요. 밤보다도 어두운 침묵 속에서 저는 그가 하는 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작업 위에 몸을 기울인 채 땀을 흘리고 있었지요. 그는 죽음에 접한 사람처럼 끝없이 거친 호흡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로 괴상한 광경으로 만약 남이 이걸 본다면 신을 모시는 성직자라 생각하지 못하고 모독 당해 마땅한 악한이거나 수의를 훔치러 온 거라 착각해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겁니다.
 열성적인 세라피온의 준엄함과 난폭함은 사도나 천사라기 보다 되려 일종의 악마와 같았습니다. 독수리 같은 얼굴을 시작으로 모든 게 거칠고 지독한 모습이 등불 빛에 더욱 강하게 느껴져 불쾌한 상상력을 자극하게 했지요. 제 이마에는 얼음 같은 땀이 큰 방울을 이루어 흘렀고 머리는 공포에 거꾸로 섰답니다. 가혹한 세라피온은 실로 미워해 마땅한 신성모독의 행위를 하는 것처럼만 느껴졌고 우리 위에 무겁게 소용돌이치는 검은 구름에서 번개가 내려와 그를 재로 태워버리기를 저는 남 몰래 기도했습니다.
 사이프러스 가지에 자리해 있던 올빼미는 등불에 놀라 날아오르고 회색 날개를 제등 유리에 부딪히며 슬프게 웁니다. 야생 여우도 어둠 속에서 멀게 울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를 셀 수 없는 꺼림칙한 소리가 이 침묵 속에서 울렸지요. 세라피온의 곡괭이가 마지막으로 관을 꿰뚫자 관은 격한 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곡괭이를 돌려 관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클라리몽드는――그녀는 대리석상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두 손을 맞잡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수의 한 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색 없는 입 끝자락엔 작고 붉은 방울 하나가 이슬처럼 빛났지요. 세라피온은 그걸 보고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오오, 악마가 여기 있구나. 더러운 창부 같으니! 피와 황금을 빨아먹는 괴물아!"
 그로부터 그는 시체와 관위에 성수를 뿌리고 그 위에 성수의 붓으로 십자를 그었습니다. 불쌍한 클라리몽드――그녀는 성수가 뿌려지자마자 아름다운 몸이 단순한 흙과 재가 되어 반쯤 석화된 뼈와 거의 형태도 없는 덩어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냉정한 세라피온은 안타까운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로뮤오 경, 당신의 정부를 보시지요. 이래도 당신은 이 미인과 함께 리도나 후슈나를 산책하고 싶습니까?"
 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거다란 파멸에 잠겼습니다. 저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지요.
 클라리몽드의 연인이자 높은 신분을 가진 로뮤오 경은 오랫동안 신비한 동반자였던 성직자의 몸에서 벗어나고 만 겁니다. 심지어 단 한 번, 묘를 파낸 다음 날에 저는 클라리몽드의 모습을 보았지요. 그녀는 처음 교회 입구에서 제게 한 말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불행한 분, 정말로 불행한 분…… 왜 당신은 그런 바보 성직자가 하는 말을 긍정한 건가요. 당신은 불행하지 않았잖아요. 제 비참한 묘를 욕보이고 허무한 걸 뒤지는 나쁜 일을 제가 당신께 요구했던가요? 당신과 저 사이의 영혼과 육체의 교환은 이제 영원히 파괴되고 말았어요. 잘 있으세요. 당신은 분명 저를 후회하게 될 테지요."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져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요.
 아아, 그녀의 말은 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얼마나 한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녀를 후회하고 있지요. 제 마음은 그 후 진정되었지만 하느님의 사랑도 그녀의 사랑과 바꿀 정도로 크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는 제가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결코 여자를 봐서는 안 됩니다. 밖을 걸을 때는 항상 땅을 보며 걸어야 하지요. 아무리 자신을 청렴하고 주의 깊게 유지하더라도 단 한순간의 실수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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