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독서노트]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noh0058 2022. 12. 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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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감기

 

그렇게 보면 무슨 재미야?

 

 언제인가 한 번 동생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동생은 넷플릭스 예능을 1.5 배속으로 보고 있었다. 동생이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어라 이유를 이야기한 거 같기도 하고, "내맴"하고 짧고 퉁명스럽게 넘기기도 했던 거 같다. 어느 쪽이든 크게 인상적인 기억은 아니었다. 너무 일상적이기도 했으니까. TV 넷플릭스에는 빨리 감기가 없단 사실을 알았을 때나 새삼 떠올린 정도이다.

 나는 영상을 배속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유튜브 영상도 배속으로 보지 않는다.(애당초 유튜브 영상을 잘 보지 않는 건 차차하고) 뉴스는 활자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게 대부분이라 역시 필요하지 않다. 그나마 대학 비대면 강의 정도일까. 하지만 이건 변호 좀 받고 싶다. 녹강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들의 강의는 참을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었으니까.

 어찌 됐든 이런 극명한 차이가 있었기에 내가 이 책을 손에 집은 걸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이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여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이었던가. 동생에게 들이 밀며 웃는 일이었다. "야 ㅋㅋㅋ 너 같은 사람이 또 있나 봐 ㅋㅋㅋ"하고서. 솔직한 이야기로 꽤나 가벼운 감각으로 손에 집은 책이란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가볍게 책을 든 탓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단언은 할 수 없지만 어찌 됐든 내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빨리 보기로 보는 동생과 정속으로 보는 나. 다수파인 건 놀랍게도 동생 쪽이었다. 그것도 대학생의 8할 가까이가 빨리 보기로 보거나 본 적이 있단다.

 물론 나라고 세대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빨리 감기나 넘겨가며 보는 것'은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관람 방식은 자유, 소통을 위한 관람, 평론보다는 개인의 감각 중시' 등에선 확실히 공감할 수 있었다. 후자가 '타자성의 결여'란 표현으로 던져졌을 때엔 아무리 그래도 "헉"할 수밖에 없었지마는.

 이렇듯 이 책은 2030의 컨텐츠 소비 방법을 중심으로 세대론과 현재의 컨텐츠, 앞으로의 컨텐츠를 다룬다. 단순히 2030 사이의 사회적 분위기 방법을 쫓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테고, 창작가에 속해 있다면 앞으로의 창작 방향을 위해 읽어보는 것도 권한다. 그 외에도 익히 아는 작품(여러 라이트노벨이나 애니메이션, 오징어 게임 등의 한류 작품까지) 이름이나 소위 '사이다패스'에 관한 이야기도 다루니 오타쿠라면 두루 권할만 하다.

 개인적으로는(사실 무엇이든 요즘 내가 관심 있는 소재랑 결부하는 건 나의 나쁜 버릇이다) 요즘 말이 많은 AI 창작과 결부해서 봤다. 책 안에서 말한 것처럼 "작품"이 "컨텐츠"가 되고 "감상"이 "소비"가 되며 "무언가를 곱씹는 것"보다 "시간을 떼우는 것"(외에 다양한 "용도"로)으로 이용된다면, 특정한 창작가의 깊이를 들여다 보기 보다는 AI가 소위 인기 있을 소재만 가볍게 추합해 만든 작품이 더 인기를 끌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직 AI 창작이 "감상"으로 접하는 계층(= 오타쿠)에서만 향유되는 만큼, 창작자의 존재와 예술론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언젠가 "소비"로만 접하는 계층(= 대다수의 일반 감상자)의 손에도 AI 창작이 떨어졌을 때에도 과연 같은 논의가 활발할 수 있을까.

 "야, 그거 AI가 만든 거래."

 "흠,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음 거나 보자."

 하는 대화도 마냥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유행을 따라가려면 봐야 할 작품도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할 SNS도 넘쳐나는데 시간이 부족하니 빨리 감기란 기능이 인기를 끈다. 10대~20대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빨리 감기가 당연시되었다. '바쁘기도 하고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녹화해서 빨리 감기로 본다.'(후략)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22p

고찰점: 이 부분은 알 거 같다. 당장 나만 해도 밀린 애니가 많다. 지금 보거나 볼 예정인 작품은 다섯 개이다. <스파이 패밀리>, <수성의 마녀>, <블루 록>, <봇치 더 록!>, <나이브스 아웃 2>. 스파이 패밀리는 24화까지, 수성의 마녀는 프롤로그만, 후자 둘은 아예 미감상 상태다. 얼마 전에는 친구가 수성의 마녀를 보고 있단 이야기를 했는데 프롤로그만 본 상황이라 말을 맞출 수 없었다. 기껏해야 넷플릭스에 더빙으로 올라왔단 정도. 물론 그렇다고 빨리 감기로 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재밌는 작품이기에 더욱 그렇다.

 

아니,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영상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대신 '콘텐츠'라는 말을 사용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미디어 오락을 '콘텐츠'라고 총칭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작품을 감상한다'보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익숙하다.
작품과 콘텐츠, 감상과 소비, 24p

고찰점: 아마 이 책의 핵심은 이 부분에 있으리라 싶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책을 직접 읽길 바라기에 할애하겠다. 어찌 됐든 나 스스로의 취미 생활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수많은 작품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가능하면 감상 쪽에 가깝길 바란다.

 

"소위 정보통, 정보 강자로서의 우월감을 느끼려는 게 아닐까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봤다는 사실만으로 비판할 자격이 생기니까."
'보고 싶다'가 아니라 '알고 싶다', 60p

고찰점: 인터넷에서 보면 한 작품을 두르고 이야기가 뱅글뱅글 돌 때가 있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까냐 -> 다 보고 왔다 -> 다 봤으면 즐길만큼 즐겼네 -> 아닌데? 재미 없던데?" 하는 대화 말이다. 사실 '재미도 없는데 까기 위해 본다'란 개념은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이 단락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면 좀 납득이 간다. 물론 그렇게 알았다면 키보드 배틀 말고 좀 더 유익한데 썼으면 싶지마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관객이 유치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점점 더 편한 것만 추구하죠. 세계적인 경향인 걸요. 그냥 분명하게 보여달란 겁니다. 이해를 못하는 게 자기 탓이 아니길 바라죠. 그러니 이해하지 못하면 불친절한 작품 탓으로 돌려요."(마키 씨)
작품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82p

고찰점: 이렇게나 대놓고 말해도 되나 싶었다. 아마 인터넷을 타는 말이라면 분명 활활 불탈 사안이리라. 모르지는 않는다. 나도 영화를 보고 나서 의문점 같은 게 생기면 곱씹지 않고 인터넷부터 찾고는 하니까. 그런 만큼 내게 이 단락에 나온 '오독의 자유'란 말은 어떤 의미론 허락이나 다를 바 없었다. 틀려도 되는구나! 하는 허락 말이다.

 

하지만 X 씨에 따르면 독자는 한순간도 '진흙탕'을 맛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2010년 경에 우리 회사로 응모된 한 원고가 신인상을 받고 책으로 출간되었어요. 저도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존 리뷰에서는 별점이 하나만 붙더라고요. 주인공이 따돌림 당하는 이야기가 문제였던 거예요. 읽기 괴로워서 그만 읽는다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후략)
불쾌함을 견디지 못한다, 148p

고찰점: 소위 '고구마'와 '사이다'의 논리다. 사실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내게 가장 큰 고구마로 남아 있는 기억은 17년의 케모노 프렌즈 11화이다. 정말 비명 가까운 걸 질렀고, 12화를 볼 때까지 일주일 동안 내내 그 생각만 했던 거 같다. 하지만 마냥 나쁜 기억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소위 '고구마'란 이야기에 그리 잘 공감은 못하는 거 같다. 혹은 내가 그들만큼 작품에 애정이 깊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몰입하지 않으면 고구마고 사이다고 느낄 겨를도 없을 테니까.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 의무까지 포함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중략) 결과적으로 자기 생각을 보강해줄 이야기나 말을 찾고 그것만 강화하게 된다.
공감지상주의와 타자성의 결여, 160p

고찰점: 이 부분은 확실히 "뼈맞았다"고 느꼈다. 내가 '나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주로 "무시"였다. 인터넷을 하다가도 '아 이 사람하고는 안 맞네' 싶으면 닉네임을 기억해두고 굳이 글이나 댓글을 눌러보지 않는다.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이윽고 모종의 방법으로 차단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접하는 것까지 차단하는 건 분명 좋지 않은 방법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기 때문이다. 조심하고 고쳐가야 할 일이다.

 

지금 우리는 "옛날에 레코드 같은 건 진짜 음악 축에 끼지 못한다며 쌍심지를 켜던 사람이 있었대"하고 웃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지 멀지 않은 미래에 웃음을 당하는 쪽이 될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빨리 감기에 대해 일일이 쌍심지를 켜는 사람이 있었대"하고.
빨리 감기에 쌍심지를 켜는 사람이 있었대, 222p

고찰점: 이 책의 가장 좋은 부분이기도 했다. 시대가 변하면 기존의 가치관은 변하는 법이다. 그게 아쉬울 때도 있을 거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을 멈추지 못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서 과거만을 곱씹으며 살아갈 수도 없다. 변화를 인정하고 쫓아가며 적응하는 것. 격동의 시대에선 더욱 필요한 덕목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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