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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옥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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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호리카와의 영주님 같은 분은 이제까지는 물론이고 후세에도 둘은 없을 테지요. 소문으로 듣자하니 그분이 태어나기 전에 대위덕명왕께서 모군의 꿈자리에 나타나셨다는데 어찌 됐든 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하고는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 하나 저희가 생각하는 영역 안에 드는 법이 없지요. 당장에 호리카와의 저택을 보아도 장대하다 할까요, 호방하다 할까요 도무지 우리의 평범함으론 미칠 수 없는 기세 같은 게 존재합니다. 이게 소위 장님 코끼리 만지기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생각은 그처럼 자신만 호의호식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좀 더 아래 것까지 생각하시는 말하자면 천하와 함께 즐긴다 해도 좋을 배포가 커다란 그릇이 존재하지요.
 그러하시니 니죠대궁의 백귀야행을 마주하셔도 별문제가 없었던 걸 테지요. 또 무츠시오가마의 경치를 그렸다 명성 높은 히가시산죠의 카와라노인에게 밤마다 나타났다는 좌대신의 영혼마저 나리의 꾸지람을 듣고 모습을 감춘 게 분명합니다. 그러한 위광이 있으니 그 시절 교토의 남녀노소 모두가 나리라 하면 마치 부처님의 재림처럼 존경한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한때는 매화의 연회서 돌아올 적에 가마의 소가 풀려나 지나가던 노인을 다치게 했을 때마저 그 노인이 손을 마주하여 나리의 소에 치인 걸 감사히 여겼다 할 정도입니다.
 그러하니 나리가 계시는 동안은 후세에 대대로 전해질만 한 일이 마치 산처럼 쌓였답니다. 나랏님의 잔치서 백마 서른 필을 받았던 적도 있지요. 나가라바시의 기둥에 총애하는 아이를 세우신 적도 있지요. 또 카다의 기술을 전한 중국 스님께서 허벅지의 종기를 떼어내신 적도 있지요――하나하나 열거해서는 도무지 끝이 없답니다. 하지만 그런 수없이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이제는 가보가 된 지옥변 병풍의 유래만큼 무서운 이야기도 없을 테지요. 평소에는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안 하시는 나리께서도 그때만큼은 놀라신 듯하셨습니다. 하물며 옆에서 모시던 저희가 혼이 쏙 빠질 것만 같었던 건 말할 필요가 없지요. 개중에서도 저는 나리 옆에서 이십 년을 모셔왔는데 그럼에도 그만큼 굉장한 구경거리를 만난 적은 또 없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지옥변 병풍을 그린 요시히데란 화가 이야기부터 해드려야 할 듯합니다.
 


 어쩌면 지금도 요시히데란 남자를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 시절 붓은 든 사람 중에 요시히데보다 뛰어난 자가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이지요. 그 일이 있었을 적에는 이래저래 오십여 개의 판에 그 손이 닿았었을까요. 보기에는 단지 키가 작고 뼈와 가죽뿐인 마르고 성미 나쁜 노인인 듯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리의 저택에 올 적에는 황갈색 카리기누에 모미에보시를 쓰고 왔는데 인상은 지극히 추했지요. 어째서인지 나잇값도 못하는 거 같고 입술이 특히 붉은 게 어딘가 동물을 연상시키는 꺼림칙함을 들게 했습니다. 개중에는 붓을 핥기에 붉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계시지만 실제로는 어떨까요. 물론 그보다 입이 험한 자들은 요시히데의 행동거지가 원숭이 같다 하여 사루히데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사루히데라 하니 이런 이야기도 있군요. 그 시절 나리의 저택에는 열다섯 먹은 히데요시의 외동딸이 시녀방에 와있었는데 이 아이가 또 부모와 닮지 않은 애교 넘치는 소녀였지요. 그런 데다가 일찍부터 어머니와 헤어진 탓인지 배려심이 깊고 나이보다 똑똑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빠르니 안주인을 비롯한 시녀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모종의 박자로 탄바서 사람을 따르는 원숭이 하나를 헌상하였습니다. 장난기가 많던 도련님께서 그 원숭이에게 요시히데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안 그래도 그 원숭이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운 마당에 그러한 이름마저 붙었으니 저택 사람들 중 안 웃는 이가 없었습니다. 웃는 정도면 차라리 양반이요 다들 반쯤 재미 삼아 정원 소나무에 올랐단 이유로 또 궁녀방의 다다미를 더럽혔단 이유로 번번이 요시히데요시히데하면서 괴롭히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앞서 말한 요시히데의 딸이 오후미를 묶은 겨울 매화나무 가지를 들고서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멀리 문 너머서 원숭이 요시히데가 다리라도 삐었는지 여느 때처럼 기둥에 오를 기미도 없이 발을 절며 일사불란 도망치는 중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뒤에선 회초리를 든 도련님이 "귤 도둑아, 서라. 서라"하고 말하며 뒤를 쫓고 계시지 뭡니까. 요시히데의 딸은 그걸 보고는 잠시 주저하였습니다만 도망쳐 온 원숭이가 옷자락에 매달려 애처로운 목소리로 우는 걸 보고는――불쌍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걸 테지요. 한 손에 매화 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보라색 우치기 소매를 가볍게 살랑 열고는 부드럽게 그 원숭이를 안아 올려 도련님 앞에서 자세를 낮춘 채로 "외람되오나 짐승이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지요"하고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은 기세가 꺾인 심정이니 얼굴을 찌푸리시며 발을 두세 번 구르면서
 "왜 감싸느냐. 귤 도둑이란 말이다."
 "짐승이지 않습니까……"
 딸은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으나 이윽고 쓸쓸히 웃고는
 "게다가 요시히데라 하니 아버지께서 벌이라도 받는 듯하여 도무지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하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니 아무리 도련님이라 해도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냐. 아버지의 목숨 구걸이라면 받아 줄 수밖에 없구나."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고는 회초리를 던지고는 본래 있던 방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로 요시히데의 딸과 원숭이가 친해졌습니다. 딸은 공주님께 받은 황금 방울을 아름다운 진홍 끈에 매달아 원숭이 머리에 걸어주었습니다. 원숭이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쉽사리 딸의 옆을 벗어나지 않았지요. 한 번은 딸이 감기에 걸려 드러누웠을 때도 원숭이는 그 머리맡에 앉아서 마치 초조한 듯한 표정이라도 지으며 빈번히 손톱을 물어뜯었습니다.
 그러니 일이 또 묘하게 굴러가서 다들 더 이상 원숭이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 되려 서서히 귀여워하기 시작해서 끝내는 도련님마저 이따금 감이나 밤을 던져주는 걸로 모자라 아무개 사무라이가 이 원숭이를 걷어찰 때는 아주 크게 화를 내셨다지요. 그 후 나리께서 일부러 요시히데의 딸보고 원숭이를 안게 하여 어전에 나오라 한 것도 도련님이 화 내신 걸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때에 딸이 원숭이를 귀여워하는 이유도 들으신 걸 테죠.
 "효녀로구나. 내 칭찬하마."
 그러한 칭찬과 함께 붉은 아코메를 딸에게 상으로 주었습니다. 헌데 원숭이가 이 아코메를 보더니 공손히 받는 흉내를 내니 나리께서 기분이 한 층 더 좋아졌다고 하십니다. 이러하니 나리께서 요시히데의 딸을 아끼신 건 전적으로 이렇게 원숭이를 귀여워하는 효심을 높게 샀기 때문이지 결코 세간에서 떠드는 듯이 색욕이 섞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소문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그건 또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여기서는 단지 나리께서 그림쟁이 나부랭이의 딸이 아무리 이뻐본들 마음을 주실 나리가 아니란 것만 말해두면 될 터입니다.
 어찌 되었든 요시히데의 딸은 체면을 세워 어전을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본래 똑똑한 아이였으니 시녀들의 꼴사나운 질투를 받는 법도 없었지요. 되려 그 후로 원숭이와 함께 공주님의 옆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며 밖으로 나갈 때도 항상 함께하였지요.
 하지만 딸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다시 아버지인 요시히데의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확실히 원숭이 쪽은 금세 모두의 귀여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허나 정작 중요한 요시히데는 역시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았고 뒤에서는 여전히 사루히데라 불렸습니다. 심지어 그게 또 저택 안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지요. 요가와의 승도님께서도 요시히데라 하면 마장이라도 만난 것처럼 얼굴색을 바꾸어 미워하셨지요.(물론 이는 요시히데가 승도님의 행색을 그림으로 풍자했기 때문이라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 남자의 평판은 어디서든 그런 식이었습니다. 만약 나쁘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두세 명의 화가 동료거나 혹은 그 남자의 그림만 알지 그 남자의 사람 됨됨이를 모르는 사람뿐일 테지요.
 하지만 실제로 요시히데는 외견이 추할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나쁜 버릇이 있으니 전부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할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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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버릇이라 함이 인색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며 게으르고 욕심만 많아――아뇨,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건 흉포하고 오만하여 여느 때나 왕조 제일의 화가임을 코 끝에 걸고 있는 거라 해야 할 테죠. 그마저도 그림 바닥에서만 그러면 또 모를까, 그 남자의 고집이란 세간의 습관이나 관례도 전부 하찮은 걸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요시히데의 밑에서 배운 남자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어떤 분의 저택에서 명성 높은 히가키 무녀에게 영혼이 빙의되어 무서운 신탁이 내려졌을 때도 그 남자는 딴청을 피우며 가지고 있던 붓과 먹으로 그 무녀의 무서운 얼굴을 정성 들여 묘사할 정도였지요. 분명 영혼의 강림도 그 남자의 눈으로는 어린애 속임수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걸 테지요.
 그러한 남자이니 길상천을 그릴 때는 추한 꼭두각시의 얼굴을 그리거나 부동명왕을 그릴 때는 무뢰한으로 그리는 등 천벌받아 마땅한 일을 여럿 했는데 그럼에도 당사자는 "요시히데가 그린 신이 요시히데에게 벌을 내린다니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하고 듣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마저 질색을 해서 개중에는 미래가 두려워 그 밑에서 벗어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한 마디로 하면 만업중첩慢業重疊이라 해야 할까요. 어찌 되었든 하늘 아래에 자신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던 남자입니다.
 그런 게 되려 요시히데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말해주고 있을 테지요. 물론 그 그림마저도 붓을 놀리는 거나 색을 칠하는 거나 다른 화가들과 달랐으니 사이가 나쁜 동료 중에는 사기꾼이라 부르는 사람도 꽤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기론 카와나리니 카나오카니 과거 명사들의 그림은 문에 그려진 매화마저 밤마다 향을 품기고 병풍의 연주가가 피리 부는 소리마저 들린다는 우아한 소문이 돌았지만 요시히데의 그림은 한사코 꺼림칙하며 묘할 뿐이라지요. 이를테면 그 남자가 류가이지 문에 그린 오종생사란 그림만 해도 밤중에 문 아래를 지나면 천인의 한숨 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지요. 아니, 개중에는 시체 썩는 냄새를 맡은 사람마저 있답니다. 또 나리의 명령으로 시녀들의 그림을 그리면 3년도 되지 않아 모두 혼이 빠진 듯이 병에 걸려 죽었다지요.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로선 그야말로 요시히데의 그림이 사도에 떨어진 무엇보다도 분명한 증거랍니다.
 하지만 몇 분 전에도 말해드린 것처럼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니 이는 되려 요시히데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나리께서 농담 삼아 "선생께선 추한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하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붉은 입술로 꺼림칙하게 히죽 웃으며 "그렇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화가는 추한 것의 아름다움은 알 수도 없으니까요"하고 거만하게 답하였습니다. 아무리 왕조 제일의 화가라지만 나리 앞에서 그런 콧대 높은 소리를 하다니요. 방금 전 이야기한 제자가 곧 스승에게 "지라영수智羅永壽"란 별명을 붙여 오만함을 비난했는데 이도 이해가 갑니다. 아시겠지만 "지라영수"라 함은 과거 중국에서 건너온 텐구를 말하는 거지요.
 하지만 이런 요시히데마저――이 논할 가치 없는 거만한 요시히데에게도 단 하나, 인간 다운 사랑을 품은 구석이 있었지요.
 

다섯


 그건 바로 요시히데가 외동딸을 정말 미치광이처럼 아끼고 귀여워한다는 점입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딸 또한 굉장히 나긋나긋하고 효심이 깊은 아이이나, 그 남자의 팔불출도 결코 그에 밀리지 않지요. 그렇게 느낄 만도 한 게 어떤 스님에게도 나서서 보시를 하지 않은 그 남자가 딸의 옷이나 머리장식에는 돈을 아끼는 기미가 없으니 도무지 거짓말 같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요시히데가 딸을 귀여워하는 건 단지 귀여워만 할 뿐이지 언젠가 좋은 남편에게 시집보내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심지어는 딸에게도 다가오는 녀석이라도 있으면 부랑배라도 모아와 폭력도 불사하지 않을 낌새였죠. 그러하니  나리께서 시녀방으로 올렸을 때도 나이 많은 신하들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여 어전 앞에서도 불쾌함을 드러낼 지경이었습니다. 나리가 소녀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부모가 불손함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이셨다. 그러한 소문은 대강 이러한 기미를 본 자들의 추측이지 싶습니다.
 물론 그러한 소문은 거짓이라도 팔불출인 요시히데가 줄곧 딸을 돌려달라 청한 건 분명합니다. 당시 나리의 명령으로 어린 문주보살을 그릴 때에도 총애하는 아이의 아이를 그려 훌륭한 완성도로 이뤄내니 나리께서도 극히 만족하시어
 "상으로 원하는 걸 주마. 사양 말고 말해보거라"하고 고마운 말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시히데가 무어라 말하였는가 하면
 "부디 제 딸을 돌려주시지요"하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딸이 귀엽다 한들 외각 영주면 또 모를까 호리카와 영주 옆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를 그리도 불손히 돌려달라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요. 그 말에는 크게 기뻐하던 나리께서도 꽤나 기분이 상하셨는지 잠시 말없이 요시히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허나 이윽고
 "그럴 순 없다"하고 토해내듯이 말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물러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이래저래 네다섯 번 정도 있었을까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요시히데를 보는 나리의 눈도 그때마다 서서히 차가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하니 이번에는 또 딸이 아버지가 걱정되기라도 한 건지 궁녀방을 들여다보면 자주 소맷자락을 물고서 훌쩍훌쩍 울고 계셨지요. 그러하니 나리께서 요시히데의 딸을 아낀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져 나간 걸 테지요. 개중에는 지옥변 병풍의 유래도 실은 딸이 나리 말을 따르지 않았던 탓이라 말하는 자도 있는데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보기에 나리가 요시히데의 딸을 보내지 않은 건 전적으로 딸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완고한 부모 옆에 두느니 저택에 두어 부족함 없이 살게 두자는 고마운 생각이었던 걸 테지요. 그야 마음씨 착한 그 딸을 아끼게 된 거야 분명합니다. 하지만 색을 품었다는 건 견강부회라 해야 할 테지요. 아니, 차라리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실랑이 속에서 요시히데의 고집이 더욱 심해졌을 때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지, 나리께선 대뜸 요시히데를 불러서는 지옥변 병풍을 그리라 말씀하셨지요.
 

여섯


 저는 지옥변 병풍이란 말만 들어도 그 무서운 풍경의 그림이 눈앞에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같은 지옥변이라 해도 요시히데가 그린 건 다른 화가가 그린 것에 비하면 밑그림부터가 다릅니다. 병풍 한 폭 구석에 자그마한 시왕을 시작으로 권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붉은, 그야말로 새빨간 맹화가 검산도수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한 면 한가득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그러니 당의 명관들이 노란색이나 남색 의상을 두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어딜 보아도 격렬한 화염색으로, 그 안을 마치 만자처럼 묵을 날린 검은 연기와 금가루를 뿌린 불똥 같은 게 휘날리고 있었답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기세인데 이러한 업화에 불타 괴로워하는 죄인 또한 누구 하나 일반적인 지옥도라 할 수 없습니다. 요시히데가 그 많은 죄인 안에 위로는 귀족부터 아래로는 죄인까지 온갖 신분의 인간을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속대 차림의 텐죠비토, 이츠츠기누를 입은 궁녀, 염주를 두른 염불승, 높은 게다를 신은 사무라이, 호소나가를 입은 여자아이, 미테구라를 든 음양사――하나하나 꼽아서는 도무지 끝이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런 다양한 인간이 불과 연기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소머리 말머리를 한 옥졸에게 끌려 큰 바람에 날리는 낙엽마냥 사방팔방으로 도망쳤지요. 사스마타에 머리를 붙들려 거미처럼 몸을 움츠러뜨린 여자는 무녀쯤 될까요. 창에 가슴을 찔려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남자는 지방관리가 분명합니다. 그 외엔 강철 몽둥이에 얻어맞는 자, 또 무거운 돌에 깔린 자, 또 괴조에게 부리로 뜯어 먹힌 자, 또 독룡의 턱에 물린 자――벌 또한 죄인의 수만큼 수를 셀 수 없이 존재하였지요.
 하지만 개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건 마치 짐승 이빨 같은 칼나무의 정점을 반쯤 스쳐(그 칼나무 가지에도 수많은 망자가 주렁주렁 다섯 개 가량 꽂혀 있었습니다만) 공중에서 떨어지는 한 채의 달구지일 테죠. 지옥 바람에 떠오른 달구지 발 안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옷시중 시녀 하나가 긴 검은 머리를 불속에 나부끼며 하얀 목덜미를 거꾸로 뻗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도 그렇고 불타는 달구지도 그렇고 모두가 화염지옥의 괴로움을 연상케 했지요. 말하자면 넓은 병풍화의 두려움이 사람 하나에게 모여 있다 해야 할까요. 보고 있으면 귀 깊은 곳에 자연스레 무서운 절규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신기 들인 완성도였습니다.
 아아, 이것입니다. 이걸 그리기 위해 그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난 거지요. 그 남자는 이 병풍을 그려내는 대신에 목숨마저 버리는 듯한 비참한 꼴을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 속 지옥은 왕조 제일의 화가 요시히데가 언젠가 스스로 떨어질 그림이었던 셈이지요……
 제가 그 보기 드문 지옥변 병풍을 이야기하는데 서두른 나머지 이야기 순서를 실수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제부터는 다시 나리께 지옥변을 그리라 명령받은 요시히데의 이야기를 해보지요.
 

일곱


 요시히도는 그로부터 대여섯 달 가량 저택에도 찾아오는 법 없이 병풍 그림에만 임했습니다. 그만큼 팔불출인 요시히데가 여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딸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이니 신기할 따름이지요. 방금 이야기한 제자 말로는 그 남자는 일을 시작하면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것처럼 되어버린답니다. 아니, 실제로 당시 말이 돌기로도 요시히데가 그림으로 이름을 떨친 건 복덕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기 때문이며 그 증거로 그 남자가 그림 그리는 걸 뒤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음울한 여우 혼령 한 마리가 전후좌우에 무리 짓는 게 보인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마당이니 여차 붓을 들면 그림 이외엔 전부 잊고 마는 걸 테지요. 낮이나 밤이나 방에 틀어박혀서 햇살도 잘 보지 않는――특히 지옥변 병풍을 그릴 때엔 그렇게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드는 게 잦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꼭 낮에도 문을 닫은 방에 틀어박혀 촛대불 아래서 비밀의 그림 도구를 쓴다거나 혹은 제자들에게 스이칸이니 카리기누니 갖은 옷을 입혀 그 모습을 하나하나 정중히 그리거나――그런 말은 아닙니다. 겨우 그 정도로 독특한 일이라면 딱히 지옥변 병풍이 아니라 평소 일할 때에도 할 법한 남자였으니까요. 아니, 실제로 류가이지에 오종생사 그림을 그렸을 때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시선을 피해 걷는 거리의 시체 앞에 유유히 앉아 반쯤 썩은 얼굴이나 손발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 없이 그릴 정도였지요. 그럼 대체 어느 정도로 무아몽중이 되었는가. 그걸 궁금해하는 분도 계실 테지요. 단지 자세히 이야기해드리기엔 시간이 부족할 테니 주된 이야기를 정리하면 대개 아래와 같습니다.

 요시히데의 제자 하나가(이 또한 앞서 말한 남자입니다) 어느 날 도구를 준비하고 있으니 불쑥 스승이 와서
 "잠시 낮잠 좀 자야겠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꿈자리가 안 좋아"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제자는 손도 쉬지 않고 단지
 "그러신가요"하고 평범한 인사를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히데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쓸쓸한 얼굴로
 "그러니까 내가 자는 동안 머리맡에 앉아 있었으면 하는데"하고 조심스레 부탁하지 뭡니까. 제자는 스승이 꿈 따위를 신경 쓰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요. 그래도 어려운 일도 아니니
 "좋습니다"하고 말하자 스승은 또 걱정스레
 "그럼 바로 안으로 와다오. 하지만 나중에 다른 제자가 오더라도 들이진 말아라"하고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안이라 함은 그 남자가 그림을 그리는 방으로, 그날도 밤처럼 문을 닫은 채로 희미한 불빛을 드리우며 아직 소필로 밑그림만 그려진 병풍이 둥글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니 요시히데는 팔을 베개 삼아 마치 지친 사람처럼 새근새근 잠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삼십 분이 채 되지도 않아 머리맡에 앉은 제자의 귀에 요시히데의 것인지 누구 것인지 모를 꺼림칙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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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그게 당초에는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서서히 띄엄띄엄 말이 되어 말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이 물 안에서 신음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지요.
 "나보고 오라는구나――어디로――어디로 오란 게야? 나락으로 와라. 염열지옥으로 와라――누구냐. 그렇게 말하는 놈은――네놈은 누구냐――누구인 거 같으냐."
 제자는 도구를 준비하던 손을 멈추고 머뭇머뭇 스승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그러자 주름투성이인 얼굴이 하얗게 질린 데다가 큼지막한 땀을 흘리며 입술이 말라 갈라지고 이빨이 띄엄띄엄 자리한 입을 신음하듯 크게 벌리고 있었다지요. 그리고 그 입안에 무언가 실이라도 쳐져 있나 싶을 정도로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게 있다 싶더니 그게 그 남자의 혀였다지 뭡니까. 띄엄띄엄 끊어진 말은 그 혀에서 나오던 겁니다.
 "누구인가 했더니――그래, 네놈이구나. 나도 네놈일 줄 알았다. 무얼, 데리러 왔다고? 그러니까 와라. 나락에 와라. 나락에는――나락에는 내 딸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 제자의 눈에는 몽롱한 이형의 그림자가 병풍을 스치듯이 내려오는 게 보일 정도로 꺼림칙했다고 합니다. 물론 제자는 곧장 요시히데에게 손을 뻗어 있는 힘껏 흔들어 깨웠습니다만 스승은 더욱 비몽사몽 혼잣말을 이어가며 쉽게 눈을 뜰 기색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제자는 옆에 있던 붓을 씻는 물을 남자의 얼굴에 첨벙 끼얹었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걸 타고 오거라――타고 나락으로 오너라――" 동시에 그런 말이 목을 조이는 듯한 신음으로 변하는가 했더니 요시히데는 겨우 눈을 뜨고 바늘로 찔린 것처럼 벌떡 일어났답니다. 하지만 아직 꿈속의 광경의 눈꺼풀 뒤에서 가시지 않은 걸 테지요. 잠시간 입을 크게 열고 단지 겁에 질린 눈초리로 하날을 바라보았습니다만 이윽고 정신이 돌아왔는지
 "이만 됐으니 가보거라"하고 이번에는 참으로 매몰차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말을 듣지 않으면 크게 잔소리를 듣는다는 걸 모를 리나 있을까요. 제자는 곧장 스승의 방을 뒤로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직 밝은 바깥을 보니 마치 자신이 악몽에서 깬 듯한 안도한 기분마저 들었다나요.
 하지만 이는 차라리 양반인 편이지요. 한 달 가량 지나니 이번에는 다른 제자를 방안으로 들였답니다. 요시히데는 역시나 어두컴컴한 등잔불 안에서 붓을 물고 있었는데 대뜸 제자를 보더니
 "미안하지만 또 옷 좀 벗어다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이제까지도 곧잘 들었던 말이니 제자는 곧장 옷을 벗어 전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묘하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사슬에 묶인 사람을 좀 보고 싶구나. 어려운 일인 건 알지만 잠시 내가 하게 두어다오"하고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차갑게 말했습니다. 본래 이 제자는 붓을 드는 것보다 검을 드는 걸 좋아하는 듬직한 젊은이였다는데, 그 말에는 적잖이 놀랐는지 그 후로도 이때 이야기만 나오면 "스승님이 미쳐서 저를 죽이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하고 거듭 이야기한다지요. 하지만 요시히데는 상대가 우물쭈물하는 게 답답했던 걸 테지요. 어디서 꺼낸 건지 얇은 쇠사슬을 잘그락잘그락거리며 거의 달려드는 듯한 기세로 제자의 등 뒤에 올라타더니 무작정 그 팔을 비틀어서 빙글빙글 감기 시작했습니다. 하물며 그 사슬 끝을 거칠게 쭉 잡아당기기까지 하니 버틸 수가 없지요. 제자의 몸은 삐걱삐걱 기세 좋게 바닥을 울리며 옆으로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홉


 그때 제자의 모습은 마치 술독이 구르는 듯했다 해야 할까요. 그도 그럴 게 손발이 비참하게 꺾여 있으니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목 하나뿐이었습니다. 거기에 사슬이 듬직한 온몸을 둘러 피의 순환을 막고 있으니 얼굴이고 몸이고 할 거 없이 온몸의 피부색이 새빨갛게 오르지 뭡니까. 하지만 요시히데는 그마저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지 그 술독 같은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같은 그림을 몇 장이나 그렸답니다. 묶인 제자가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일부러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만약 아무 일도 없었다면 이 괴로움은 아마 그 후로도 계속됐을 테지요. 다행히(혹은 불행히라 해야 할지 모릅니다만) 얼마 안 있으니 방구석에 놓여 있던 항아리 뒤에서 마치 검은 기름 같은 게 얇게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습니다. 당초에는 엿과 같이 점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습니다만 서서히 매끈하게 움직이기 시작해 이따금 힐끔힐끔 빛났습니다. 그렇게 코끝까지 이르자 제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빼면서
 "뱀――뱀이"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때는 마치 온몸의 피가 단숨에 얼어붙는 거 같았다는데 그럴 만도 하지요. 뱀은 당장이라도 사슬에 삼켜진 제자의 목덜미에 차가운 혀끝을 얹으려 했으니까요. 이 생각지 못한 일에는 아무리 거침없는 요시히데라도 놀랐을 게 분명합니다. 황급히 붓을 던지며 몸을 낮추나 싶더니 재빨리 뱀꼬리를 붙잡아 대롱 거꾸로 매달았답니다. 뱀은 매달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몸에 들러붙으려 했는데 도무지 그 남자의 손까지는 닿지 않았습니다.
 "너 때문에 붓 하나를 손해 봤잖느냐."
 요시히데는 원망스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뱀을 다시 구석 항아리 안에 던지고는 꽤나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제자를 묶던 사슬을 풀어주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풀어주기만 할 뿐으로 정작 제자에겐 상냥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습니다. 분명 제자가 뱀에 물리는 것보다 한 장의 붓질을 실수한 게 더 화가 났던 걸 테지요――나중에 들으니 이 뱀 또한 그 모습을 묘사하게 위해 그 남자가 키우는 것이라 합니다.
 이만한 이야기로도 요시히데의 미치광이 같고 꺼림칙한 집중력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이번에는 아직 열셋인가 열넷 먹은 제자가 역시나 지옥변 병풍 덕에 말하자면 목숨마저 위험할 무서운 꼴을 보아야 했지요. 그 제자는 날 때부터 색이 하얀 여자 같은 남자였는데 어느 날 밤, 스승의 부름에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가니 요시히데는 등잔불 아래서 손바닥에 무어라 비린내 나는 고기를 얹은 채로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크기는 평범한 고양이 정도일까요. 그러고 보면 귀처럼 양쪽에 솟은 깃털도 그렇고 호박색을 한 커다란 눈도 그렇고 어딘가 고양이와 닮은 새였다고 합니다.
 


 본래 요시히데란 남자는 남이 자기 하는 일에 간섭하는 걸 아주 싫어하여 방금 말한 뱀도 그렇 듯이 자기 방에 무엇이 있는지 제자들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은 책상 위에 해골이 올라가 있지를 않나 또 어느 날은 은그릇이나 마키에 잔이 놓여 있지를 않나, 그때 그리는 그림에 따라 꽤나 생각지도 못한 게 튀어나오곤 했지요. 하지만 평소에 그런 걸 당최 어디에 두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남자가 복덕의 신의 도움을 받는단 소문도 이런 일에 기반을 두고 있을 테지요.
 여하튼 제자는 책상 위에 자리한 그 기이한 새도 지옥변 병풍을 그리기 위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홀로 생각하며 긴장한 채 스승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하고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시히데는 마치 들리지 않은 것처럼 그 붉은 입술을 혀로 핥더니
 "어때, 잘 길들었지?"하고 새를 턱으로 가리킵니다.
 "이건 무슨 새이지요. 저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제자는 그렇게 말하며 깃이 귀처럼 뻗은 고양이 같은 새를 꺼림칙하게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그러니 요시히데는 여전히 여느 때처럼 비웃는 듯한 투로
 "뭐, 본 적이 없어? 교토서 자란 사람들은 이래서 곤란해. 이건 이삼일 전에 쿠라마의 사냥꾼이 내게 준 수리부엉이란 새야. 단지 이렇게나 사람을 따르는 건 그리 많지 않지."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손을 들어 마침 먹이를 다 먹은 수리부엉이의 등 깃털을 아래서 위로 쓸어 올렸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새는 불쑥 날카로운 목소리로 짧게 한 번 울더니 곧장 책상 위에서 날아올라 두 다리의 발톱을 뻗으며 대뜸 제자의 얼굴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만약 제자가 팔을 들어 황급히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상처 한둘로 끝나지 않았을 테죠. 놀라서 팔을 들어 떨쳐내려는 걸 수리부엉이는 울면서 정수리를 향해 다시 한 번 부리로――제자는 스승 앞이란 것도 잊고서 일어서서 막고, 앉아서 쫓아내고 저도 모르게 방안을 이리저리 도망쳐 다녔습니다. 괴조도 그에 따라 높고 낮게 날면서 틈만 보이면 눈을 향해 달려들었지요. 그때마다 퍼덕퍼덕 날개 소리가 거칠게 울리는 게 낙엽 냄새나 폭포 물소리 혹은 원숭이주 같은 괴상한 걸 연상케 하여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제자도 어두컴컴한 기름불마저 몽롱한 달빛인가 싶고 스승의 방이 저 먼 산 깊은 곳의 요기로 가득 찬 계곡같이 느껴져 기댈 곳 하나 없는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자라고 비단 수리부엉이의 공격에만 겁을 먹은 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한 층 더 온몸의 소름이 돋았던 건 스승인 요시히데가 그 소동을 차갑게 바라보더니 끝내는 종이를 두고 붓을 핥아 여자 같은 소년이 이형 새에게 괴롭힘당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단 점입니다. 제자는 그걸 보고는 말로 다 못할 두려움에 휩싸여 한때는 스승 때문에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열하나


 실제로 스승에게 죽는다는 게 아예 없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사실 그날 제자를 부른 이유부터가 수리부엉이를 풀고 제자가 도망치는 모습을 그리려는 의도였으니까요. 그러하니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스스로도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문 옆 구석에 몸을 작게 말았지요. 그 박자에 요시히데도 무어라 거친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듯했습니다만 곧 수리부엉이의 날개 소리가 전보다 격해지더니 물건이 쓰러지거나 박살 나는 소리가 험악하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제자도 몇 번인가 놀라 저도 모르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보니 방안은 어느 틈엔가 어둠에 물들었고 제자를 부르는 스승의 목소리만이 거칠게 들렸다고 합니다. 
 이윽고 제자 중 하나가 멀리서 답을 하고 불을 켠 채 서둘러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탄내 나는 횃불로 바라보니 등잔이 쓰러져 바닥도 다다미도 기름투성이가 된 채 수리부엉이가 한쪽 날개만 괴롭게 퍼덕이며 구르고 있었습니다. 요시히데는 책상 너머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멍한 표정으로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습니다――그럴 만도 하지요. 새까만 뱀 한 마리가 수리부엉이의 목에서 한 쪽 날개까지 둘둘 묶여 있었으니까요. 아마 이는 제자가 몸을 피하는 도중에 항아리를 뒤집고 그 안에서 뱀이 기어 나온 걸 수리부엉이가 붙들어 대소동으로 번진 걸 테지요. 두 제자는 서로 눈과 눈을 맞추고 잠시간 이 괴이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만 이윽고 스승에게 말없이 인사를 하고 슬쩍 방에서 물러났습니다. 뱀과 수리부엉이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 합니다――

 이러한 일이 또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해드리는 걸 잊었는데 지옥변 병풍을 그리라 명한 게 초가을이었고 요시히데의 제자들은 늦겨울까지 스승의 괴상한 행동에 떨어야 했던 셈이지요. 하지만 그 늦겨울, 요시히데는 병풍 그림 중 무언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존재했을 테지요. 분위기도 이전보다 한 층 더 어두워지고 눈에 띄게 거칠어졌습니다. 또 동시에 병풍의 그림도 밑그림이 팔 할 가량 완성된 채로 별 진척이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제까지 그린 부분마저 지워버리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기미였지요.
 그런 주제에 어떤 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또 누구도 알려 하지 않았죠. 이전 번의 일로 질색을 한 제자들은 그야말로 호랑이나 늑대와 한 우리에 놓인 심정으로 스승의 주변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열둘


 따라서 그 사이의 일은 딱히 말해드릴만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굳이 말해보자면 그 고집 센 영감이 어째서인지 묘하게 눈물이 많아져 이따금 눈이 없는 곳에서 홀로 울었다는 이야기 정도일 테죠. 특히 어느 날 제자 하나가 모종의 일로 정원을 찾으니 복도에 서 멍하니 봄에 가까운 하늘을 바라보는 스승의 눈이 눈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걸 본 제자는 되려 제가 부끄러워져 조용히 물러났다고 했는데 오종생사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길가의 시체마저 그린다는 오만한 여자가 그 병풍 그림이 생각처럼 그려지지 않는 정도로 아이처럼 우는 건 꽤나 기이했다지요.
 그런 한 편 요시히데가 이처럼 도무지 제정신인 거 같지 않을 정도로 병풍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른 한 편으론 그 딸이 어째서인지 점점 우울해져 울음을 참는 모습이 이따금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본래 얼굴에 애수가 묻어 있고 색이 하얀 얌전한 여자였던 만큼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눈 주변이 어두워져 더욱 쓸쓸한 기색을 두르게 되었지요. 당초엔 아버지가 그리워서 그렇다느니 연심으로 고민하고 있다느니 여러 억측도 있었습니다만 도중부터 저건 나리가 제 옆에 두게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여 남자들은 모두가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지요.
 마침 그쯤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밤 깊은 때에, 제가 홀로 복도를 지나고 있자니 원숭이 요시히데가 대뜸 어디선가 튀어나와 제 소매를 잡아끌더군요. 기억하기론 곧 매화 냄새라도 날 듯한 옅은 달빛이 드는 따스한 밤이었는데, 그 빛을 통해 보니 원숭이는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코끝에 주름을 잡고 미친 것처럼 시끄럽게 울지 뭡니까. 저는 약간의 꺼림칙함과 대부분의 짜증을 섞어 원숭이를 걷어차 지나가려 했는데, 또 생각해 보니 전에 어떤 사무라이가 이 원숭이를 함부로 대했다 도련님을 화나게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원숭이의 행동이 도무지 평범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도 마음을 고치고 잡아당긴 방향으로 몇 걸음인가 발을 옮겼지요.
 그렇게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밤눈으로도 옅은 흰색의 연못물이 가지가 앙상한 소나무 너머서 고스란히 보이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어딘가 가까운 방에서 사람이 다투는 기척이 거칠면서도 또 묘하게 조용히 제 귀를 겁주었습니다. 주위는 하나같이 조용하여 달빛인지 안개인지 구분되지 않는 주위 광경 속에선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 이외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런 소음이 들리니 저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혹여 수상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한 방 먹여주자며 숨을 죽인 채 문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열셋


 하지만 원숭이는 저의 행동이 내키지 않았던 걸 테죠. 요시히데는 답답하다는 양 두세 번 제 다리 주위를 돌더니 마치 목을 조인 듯한 소리로 울면서 대뜸 제 어깨로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저는 바로 고개를 돌려 그 손톱에 걸리지 않으려 했고 원숭이는 또 스이칸 소매에 매달려 제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그 박자에 저는 저도 모르게 두 걸음 세 걸음 비틀거리다 문 뒤에 제 몸을 부딪혔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주저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곧장 문을 열고 달빛이 들지 않는 안쪽으로 달려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눈을 가로막은 건――아뇨, 저는 그보다도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 안에서 튕겨지듯이 달려 나간 여자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자는 자칫 제게 머리를 부딪힐 뻔하다 그대로 밖으로 굴렀는데, 여자는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이며 무언가 무서운 거라도 보듯이 제 얼굴을 올려다볼 따름이었습니다.
 그게 요시히데의 딸이었단 걸 굳이 말해드릴 필요나 있을까요. 하지만 그날 밤 본 그 여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생기로 가득했습니다 눈은 크게 빛나고 있었죠. 뺨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죠. 더군다나 조심성 없이 풀어진 소매나 옷깃은 평소의 앳됨을 반전시켜 요염함마저 덧칠해주었습니다. 이게 정말 연약하고 어떤 일에나 조심스러운 그 요시히데의 딸이란 말인가――저는 문에 몸을 맡긴 채 달빛 속에 담긴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황급히 먼 곳을 달아나는 발소리를 가리켜 눈으로만 조용히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딸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모습이 또 굉장히 안타까워 보였지요.
 때문에 저는 자세를 낮추며 소녀의 귀에 입술을 얹듯이 해 이번에는 "누구입니까"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하지만 딸은 역시나 고개만 저을 뿐으로 무어라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뇨, 그와 동시에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을 한가득 머금으며 전보다 더 강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요.
 저는 아쉽게도 날 적부터 어리석은지라 지나치게 잘 아는 일 말고는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하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은 그저 딸의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가만히 옆에 서있기만 했지요. 물론 이러한 행동에는 어째서인지 더 캐물어서는 안 될 듯한 가책 따위도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윽고 열린 문을 닫으며 조금은 마음이 진정된 듯한 딸 쪽을 보며 "이만 돌아가세요"하고 되도록 부드럽게 말해주었습니다. 저 또한 무언가 봐서 안 되는 걸 본 듯한 불안함에 휩싸여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부끄러운 심정으로 온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그런데 채 열 걸음도 걷지 않은 와중에 또 누군가가 제 소매를 머뭇머뭇 잡아끌지 뭡니까. 저는 놀라 돌아봤지요. 여러분은 그게 누구였을 거 같나요?
 돌아보니 원숭이 요시히데가 인간처럼 두 손을 맞잡은 채 황금종을 울리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열넷


 그날 밤의 일이 있은 후 보름 가량 지난 뒤의 일입니다. 어느 날 요시히데가 불쑥 저택으로 오더니 나리를 직접 뵈자고 청했습니다. 미천한 신분이나 평소부터 특히 아끼셨기 때문일 테죠. 누구도 쉽게 만나지 못하는 나리께서는 그날도 흔쾌히 승낙하셔 곧장 어전으로 불러졌습니다. 그 남자는 여느 때처럼 황갈색 카리기누에 볼품없는 에보시를 쓰고서 평소보다 더 어려운 표정으로 공손히 몸을 숙였습니다. 이윽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르기를
 "이전 번에 명하신 지옥변 병풍 말입니다만 제가 밤낮으로 성실히 붓을 든 보람이 있어 이제는 완성된 거나 다를 바 없사옵니다."
 "그거 잘 됐구나. 나도 만족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그리 말씀하시는 나리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힘이 없고 기운이 빠진 듯하였습니다.
 "아뇨, 그게 말씀과 같지 않습니다." 요시히데는 조금 화가 난 듯한 기색으로 가만히 눈을 낮추며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지금 한 부분을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리지 못한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대체로 직접 본 게 아니면 그리지 못합니다. 설령 그리더라도 납득이 가지 않지요. 그래서야 그리지 못한 것과 매한가지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 나리의 얼굴에 비웃는 듯한 웃음이 드리웠습니다.
 "허면 지옥변 병풍을 그리려면 지옥을 봐야겠구나."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이전 번 대화재 때 염열지옥의 맹화를 방불케하는 불을 직접 보았습니다. "불속의 부동명왕" 그림 속 화염을 그릴 수 있었던 것도 그 화재를 겪은 덕이었지요. 나리께서도 그 그림은 알고 계실 겁니다."
 "허나 죄인은? 옥졸도 보지 못하였을 테고." 나리는 마치 요시히데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재차 물으셨습니다.
 "저는 사슬에 묶인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괴조에게 쫓기는 모습도 자세히 그려냈지요. 허면 죄인이 괴로워하는 모습도 모른다고는 못할 테지요. 또 옥졸은――" 요시히데는 꺼림칙한 웃음을 지으며 "또 옥졸은 꿈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소머리, 어떤 이는 말머리, 또 어떤 이는 얼굴 셋에 팔이 여섯 달린 오니가 소리 없이 손뼉 치고 목소리 없이 입을 벌리며 저를 괴롭히러 오는 걸 거의 매일 밤 겪었습니다――제가 그리고 싶어도 그리지 못하는 건 그런 게 아니옵니다."
 나리께서도 그 말엔 놀랄 수밖에 없으셨겠죠. 한동안 짜증 섞인 표정으로 요시히데의 얼굴을 바라보셨습니다만, 이윽고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허면 뭘 못 그리겠다는 것이냐"하고 내치듯이 물으셨습니다.
 

SMALL

열다섯


 "저는 단지 병풍 안에 달구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그리려 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요시히데는 처음으로 나리의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보았습니다. 그림 이야기만 나오면 미치광이나 다를 바 없는 남자라더니, 그때 본 눈매서는 확실히 그러한 박력이 담겨 있었지요.
 "그 달구지 안에는 아름다운 귀부인 하나가 맹화 속에서 검은 머리를 나부끼며 괴로워하고 있지요. 얼굴은 연기를 뒤집어써 미간을 찌푸린 채 달구지의 천막을 올려다보고 있을 터입니다. 손은 달구지의 천을 찢어 내려오는 불똥비를 막으려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 주위서는 열인지 스물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괴이한 새가 사납게 울며 날고 있는 그림이지요――아아, 저는 그 달구지 안의 귀부인을 도무지 그릴 수가 없사옵니다."
 "해서――어쩌란 말이냐."
 나리께서는 어떻게 된 건지 묘하게 기쁜 듯한 기색으로 요시히데를 재촉하셨습니다. 요시히데는 열이라도 난 것처럼 그 붉은 입술을 떨면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미로
 "저는 도무지 그릴 수가 없사옵니다"하고 다시 한 번 반복하였으나 이윽고 달려드는 듯한 기세로
 "부디 제가 보는 앞에서 달구지 한 척을 태워주시지요. 만약 그래주신다면――"
 나리께서는 얼굴이 어두워지시는가 했더니 대뜸 크게 웃으셨습니다. 또 그 웃음에 숨을 헐떡이면서 말씀하시길
 "그래, 전부 네 말처럼 해주마. 할 수 있네 없네 따지는 건 불필요하니라."
 그 말을 들은 저는 육감이라도 느꼈는지 어쩐지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나리께서도 입 끝자락에 하얀 거품을 물으시고 눈썹 주변이 움찔움찔 경련 되는 등 마치 요시히데의 광기에 물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상치 않으셨지요. 그렇게 잠시 말을 끊으시더니 또 무언가가 폭발한 듯한 기세로 거침없이 웃으시면서 
 "달구지에 불을 질러주마. 또 그 안에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귀부인의 차림을 한 채 태워주마. 불과 검은 연기에 달구지 안의 여자는 괴로워하며 죽게 되겠지――그런 걸 그리겠다니 괜히 천하제일의 화가가 아니로구나. 내 칭찬하마. 아무렴, 마땅히 칭찬해야 하고 말고."
 나리의 말을 들은 요시히데는 불쑥 새하얗게 질려 신음하듯이 입술만 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온몸의 근육이 풀어진 것처럼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감사합니다"하고 들릴 듯 들리지 않을 듯 작은 목소리로 정중히 인사를 올렸습니다. 이는 아마 자신이 생각하던 무서운 광경이 나리의 말을 따라 고스란히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일까요. 저는 평생 속에서 단 한 번, 이때만큼은 요시히데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열여섯


 그로부터 이삼일 지난 어떤 밤의 일입니다. 나리께선 약속하신 것처럼 요시히데를 불러 달구지가 타는 걸 가까이서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이는 호리카와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소위 눈이 녹는 곳이라 하여 과거에 나리의 누이동생께서 계시던 교토 바깥의 산장에서 하신 일이시죠.
 이 눈이 녹는 곳은 한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으로 넓은 정원에도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상태였죠. 아마 이렇게 인기척 없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떠올린 것일 텐데, 여기서 죽은 누이동생에 관한 소문도 돌아서 개중에는 달이 없는 밤마다 붉은색을 한 괴이한 하카마가 땅도 짚지 않고 복도를 걷는단 이야기마저 있었습니다――그럴 만도 하지요. 안 그래도 쓸쓸한 곳이 한 번 해가 지면 정원의 물소리가 한 층 더 음울하게 울리고 별빛을 따라 나는 해오라기도 괴물인가 싶을 정도로 꺼림칙했으니까요.
 마침 그날 밤도 달이 없는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등불을 붙이고 툇마루에 자리를 튼 나리께선 노란색 나오시에 짙은 자색의 사시누키를 입은 채 하얀 비단 방석 위에 높게 앉아 계셨죠. 그 전후좌우에 대여섯 명의 측근이 공손히 자리한 건 달리 말해드릴 필요도 없을 테지요. 하지만 개중 한 명 눈에 띄는 건 이전 번의 미치노쿠 전투서 배가 주려 사람 고기를 먹은 후로 사슴뿔마저 자를 수 있게 되었다는 강인한 사무라이가 아래에 복대를 입고 검을 언제라도 뽑을 수 있게 찬 채 툇마루 밑에서 험악함을 내뿜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그 모든 게 밤바람에 나부끼는 등불 속에서 어떤 건 밝게 또 어떤 건 어둡게 비쳐 거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또 그런 데다가 정원에 끌려 나온 달구지차가 높은 천장으로 어둠을 끌고 소는 끌지 않은 채 검은 끌채를 비스듬하게 걸어두고 황금 쇠붙이가 별처럼 빛나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봄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오싹해집니다. 물론 그 차 안에는 문양으로 테두리를 새긴 푸른천이 무겁게 내려와 있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아래서는 시종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서 연기가 나리께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요시히데는 살짝 거리를 둔 채 나리를 향해 자세를 낮추고 있었는데 항상 입는 황갈색 카리기누나 모미에보시도 더해져 밤하늘의 무게에 짓눌렸나 싶을 정도로 평소보다 더 작고 볼품없이 보였습니다. 그 뒤에서 마찬가지로 에보시에 카리기누를 입은 건 아마 함께 데려온 제자 중 하나일까요. 두 사람 모두 먼 어둠 속에 자리해 있었기에 제가 있었던 툇마루 밑에선 카리기누의 색마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열일곱


 이래저래 한밤중에 가까웠을 테지요. 수풀과 샘을 감산 어둠이 조용히 소리를 삼긴 채 일동의 숨소리를 엿보는가 싶은 가운데 자그마한 밤바람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때마다 횃불 연기가 탄내를 옮겨 옵니다. 나리는 잠시간 말없이 이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셨으나 이윽고 몸을 앞으로 내미시고는
 "요시히데"하고 날카롭게 부르셨습니다.
 요시히데는 무어라 답한 듯하였으나 제 귀에는 단지 신음하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요시히데. 오늘 밤은 네가 바란 대로 달구지에 불을 질러주마."
 나리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옆에 있는 자들을 흘겨 보셨습니다. 그때 나리와 그들 사이서 의미심장한 웃음이 오고 간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제가 착각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요시히데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고 툇마루를 올려다보았는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이만 되었다. 그건 내가 평소에 타는 달구지니라. 그편이 더 와닿는 게 있을 테지――나는 이제부터 그 차에 불을 질러 눈앞에 열열지옥을 펼칠 셈이다만."
 나리는 다시 말을 끊고는 옆에 있는 자들에게 시선을 보내셨습니다. 그러고는 불쑥 안타깝다는 기색으로 "그 안에는 죄인의 아내 하나가 붙들린 채로 타고 있느니라. 허면 차에 불을 지르는 이상 그 여자도 필시 살이 타고 뼈가 그슬러져 괴로운 최후를 맞이할 테지. 그게 또 병풍을 마무리하는데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눈처럼 하얀 피부가 불타 빛나는 걸 놓치지 말거라. 검은 머리가 불똥을 튀기며 날리는 걸 잘 봐두어라."
 나리는 세 번인가 말을 잇지 못하셨는데 이번에는 무슨 생각이신지 소리도 없이 웃으시며
 "두 번은 못 볼 구경거리지 않으냐. 나도 여기서 지켜보마. 여봐라, 발을 들어 요시히데에게 안에 탄 여자를 보여주거라."
 명을 들은 하인 중 하나가 한 손에 든 횃불을 높게 뻗으며 척척 달구지에 다가가 한 쪽 팔을 뻗어 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불타는 횃불빛은 하염없이 붉게 흔들리며 좁은 수레 안을 비추었지요. 해서 그 안에는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꼴로 사슬에 묶인 여인이――아아, 누가 잘못 볼 일이나 있을까요. 휘황찬란한 자수가 새겨진 옷에 스베카라시로 묶은 검은 머리가 요염하게 뻗고 안을 향한 황금 사츠시 또한 아름답게 빛났습니다만 차림은 달라도 자그마한 체구는, 또 색이 하얀 목덜미는, 그리고 그 쓸쓸할 정도로 얌전한 옆얼굴은 요시히데의 딸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자칫 비명을 지를 뻔했지요.
 그때였습니다. 저와 마주해 있던 사무라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자루 끝을 한 손으로 누르며 우뚝 서 요시히데를 노려보았습니다. 그에 놀라 바라보니 요시히데는 이 광경에 반쯤 정신을 잃은 듯했습니다. 이제까지 숙이고 있던 몸을 대뜸 벌떡 일으키더니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로 달구지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 가려 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앞서 말한 것처럼 먼 그림자 속에 있었기에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한 건 아주 잠깐으로 새파랗게 질린 요시히데의 얼굴은 아니, 마치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공중에 매단 듯한 요시히데의 모습은 곧 어둠을 가르고 눈앞에 고스란히 떠올랐습니다. "불을 붙여라"하는 나리의 명령과 함께 하인들이 던진 횃불이 딸을 태운 달구지를 활활 태우기 시작한 탓이었습니다.
 

열여덟


 불은 서서히 달구지를 감쌌습니다. 정원에 핀 보라색 이팝나무가 떠밀리듯 흔들리자 그 아래서 밤눈에도 또렷이 보이는 하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솟구치고 어떤 건 발이, 어떤 건 소매가, 또 어떤 건 마룻대의 나사 따위가 단숨에 박살 나 날아온 건가 싶을 정도로 불똥이 비처럼 내려왔지요――그 경치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뇨, 그보다도 활활 숨을 토하며 달구지를 삼키고 낮은 하늘까지 솟구친 격렬한 화염의 색은 마치 해가 땅에 떨어져 불꽃이 하늘로 뻗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죠. 앞서 자칫 소리칠 뻔했던 저도 이제는 혼이 완전히 빠져나가 단지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모인 요시히데는――
 그때 본 요시히데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달구지를 향해 달려가던 남자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함과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역시나 손을 뻗은 채로 집어삼킬 거 같은 눈초리로 차를 둘러싼 연기를 바라보았는데, 온몸에 뻗은 불빛은 주름투성이인 추한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했습니다. 커다랗게 뜬 눈도 그렇고 일그러진 입술도 그렇고 혹은 끝없이 경련 되는 뺨의 떨림도 그렇고, 요시히데의 마음서 이리저리 오고 가는 두려움과 슬픔, 경악 따위가 얼굴에 또렷이 그려져 있었지요. 목이 잘리기 전의 도둑도 내지는 시왕 앞에 끌려 나간 지독한 죄인도 그토록 괴로운 표정은 짓지 않을 터입니다. 그 강인한 사무라이마저 그 모습에는 그만 얼굴색이 바뀌어 머뭇머뭇 나리의 얼굴색을 살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리는 굳게 입술을 깨무신 채로 이따금 꺼림칙하게 웃으며 눈을 돌리는 법 없이 가만히 달구지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안에는――아아, 저는 그때 그 차에서 딸의 어떤 모습을 보았던가요. 이를 자세히 말할 용기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기를 마신 채 위를 뻗은 얼굴의 창백함, 불이 붙어 휘날리는 머리의 길이, 또 서서히 불로 바뀌어 가는 옷의 아름다움――이리 비참한 광경이 또 존재할까요. 특히 밤바람이 불어 연기가 반대편으로 날아갔을 때, 붉은색 위에 금가루를 뿌린 듯한 화염 속에 떠오른 머리를 입에 문 채 온몸을 둘러싼 사슬마저 끊어질 것처럼 몸부림치던 모습은 지옥의 괴로움을 눈앞에 재현한 게 아닐까 싶어 저는 물론이요 강인한 사무라이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죠.
 그러자 또 밤바람이 불어 정원 안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갈 때――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한 소리가 어두운 하늘을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 수 없이 뻗는다 싶더니 곧 무언가 새까만 게 땅에도 닿지 않고 하늘에도 날아가지 않으며 공처럼 튀더니 불에 휩싸인 달구지를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붉게 칠한 듯한 기둥이 불타 떨어지는 와중에 드러누운 딸의 어깨를 붙들고서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단지 괴롭고 길게 연기 밖을 향해 질렀습니다. 또 이어서 두 번, 세 번――저희는 저도 모르게 같은 마찬가지로 소리쳤습니다. 벽처럼 솟은 불을 뒤로한 채 딸의 어개를 붙든 건 호리카와의 저택서 사이좋게 지낸 원숭이 요시히데였으니까요. 그 원숭이가 언제 어떻게 이 장소까지 숨어들었는가. 이는 물론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평소 아껴주던 딸이기에 원숭이도 함께 불속으로 뛰어든 걸 테지요.
 

열아홉


 하지만 원숭이의 모습이 보인 건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금으로 된 나시지 같은 불똥이 하늘로 오르는가 싶더니 원숭이는 물론이요 딸의 모습도 검은 연기 밑바닥에 가려져 정원 한가운데에는 단지 한 대의 불달구지만이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전소되었을 뿐입니다. 아뇨, 혹은 불달구지가 아니라 불기둥이라 하는 편이 그 밤하늘을 꿰뚫으며 일그러트린 무서운 화염의 모습에 걸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불기둥을 앞에 둔 채로 굳어 있던 요시히데는――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방금 전까지 지옥의 괴로움에 사로잡힌 듯했던 요시히데가 이제는 말로 다 못할 빛을, 마치 황홀한 기쁨의 빛을 주름투성이 얼굴에 가득 채우며 나리의 앞이란 것도 잊은 건지 팔짱을 낀 채로 서있지 뭡니까. 그 남자의 눈에는 마치 딸이 괴로워하며 죽는 모습이 비치지 않는 듯했습니다. 단지 아름다운 화염의 색과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이 한없이 마음을 들끓게 하는――그런 광경으로 보였지요.
 심지어 이상한 건 비단 그 남자가 외동딸이 지르는 단말마를 기쁘게 바라보는 광경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요시히데에게선 어째서인지 인간이란 게 믿기지 않는, 꿈에서나 볼 법한 사자왕의 분노와 닮은 괴이한 엄숙함마저 느껴졌습니다. 그러하니 갑작스러운 불에 놀라 시끄럽게 울며 날아가는 수를 셀 수 없는 밤새마저 어쩐지 요시히데의 모미에보시 주변에는 다가가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새마저도 그 남자의 머리 위에 원광처럼 걸려 있는 신비한 위엄을 보았던 걸 테지요.
 새마저 그럴 지경입니다. 하물며 저희는 말단 하인마저 다들 숨을 죽인 채로 몸을 떨뿐으로, 기이한 환희로 가득 차 눈도 떼지 않은 채 마치 눈이 떠진 부처라도 보는 심정으로 요시히데를 바라보았지요. 하늘을 불로 가득 채운 달구지와 그에 혼을 빼앗겨 서있는 요시히데――그야말로 말로 다 못할 장엄, 말로 다 못할 환희이옵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명, 툇마루 위의 나리만큼은 마치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입가에 거품을 무신 채로 보라색 사시누키의 무릎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마치 목이 마른 동물처럼 신음하고 계셨습니다……
 

스물


 그날 밤 나리가 눈이 녹는 곳에서 달구지를 태운 이야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에 따라 여러 비판도 들리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나리께선 왜 요시히데의 딸을 태워 죽였는가――이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원수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리의 생각은 달구지를 태우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병풍 그림을 그리려 하는 삐뚤어진 화가 근성을 고쳐주려 했던 게 분명합니다. 실제로 저는 나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지요.
 또 요시히데가 눈앞에서 딸이 타죽는 와중에도 병풍 그림을 그려낸 무정한 심리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모양입니다. 개중에는 그 남자를 매도하여 그림을 위해 부모 자식 사이의 애정도 잊고 마는 인면수심의 미치광이라 말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요가와의 승도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편든 한 사람으로 "아무리 재능이 우수해도 인간으로서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나 요시히데가 병풍이 완성되었다며 저택을 찾아 공손히 나리를 뵈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승도님께서도 계셔서 함께 병풍 그림을 보았습니다. 허나 아무리 승도님이라 하셔도 천지에 불바람이 거칠게 부는 한 폭의 그림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걸 테지요. 그전까지는 내키지 않는단 얼굴로 요시히데를 뚫어져라 노려보셨습니다만,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대단하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은 나리가 지은 쓴웃음을 이제까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후론 적어도 저택 안에서는 누구도 그 남자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아무리 요시히데를 미워했어도 그 병풍을 보는 순간 신비한 엄숙함에 삼켜져 열열지옥의 괴로움을 여실히 느껴버리기 때문일 테죠.
 하지만 그렇게 됐을 때 요시히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병풍을 완성한 다음 날 밤에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린 거지요. 외동딸을 먼저 보낸 그 남자는 더 이상 평안히 살 수 없었던 걸 테지요. 시체는 지금도 그 남자의 집이었던 곳에 묻혀 있습니다. 물론 돌로 만든 자그마한 표식은 그 후 몇 십 년 동안의 비바람에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지고 말았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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